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 국가를 바라보는 젊은 중국 지식인의 인문여행기 1
쉬즈위안 지음, 김태성 옮김 / 이봄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중국 여행기인데 꽤 재미있고, 혹 여행기에 관심 없는 독자라 해도 특정 고전에 큰 의의를 두고 감동을 받은 이라면 꼭 챙겨 읽어 봐야 할 책입니다. 처음부터 그런 기대를 갖고 읽었으며, 읽고 나서도 역시 기대대로였다면서 뿌듯함을 안고 책을 덮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시사주간 <TIME>에서 "인플루엔셜 100" 선정 기획을 처음 시작했을 때 그런 평가를 처음 읽었습니다. 에드가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 대해, 한국의 특정 세대(특히 80년대 학번 어르신들)가 그토록 큰 경외감을 가진 사실과는 반대로, 미국에서는 naive(특히 저 잡지의 평가가 그러했죠)한 판타지로 보는 게 중론이라는 걸 알았죠. 물론 한번 특정 이념에서 제공한 프레임에 사로잡히면, 다른 어떤 유력한 반대증거나 움직일 수 없는 팩트가 출현해도, 이제 "불순세력의 책동, 음모, 혹은 미(未)각성의 산물" 정도로밖에 안 보입니다. 이데올로기의 힘이란 그렇게나 무서운데, 다만 본인은 본인의 순수한 양심, 각성의 사고라 여기지 결코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혔다는 생각을 안 합니다. 오히려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이가 이데올로기의 포로라며 역(逆) 거울 뉴런을 발동합니다. 이런저런 영역에 다 몸을 담가도 보고 객관적인 각성, 휴머니티에 입각한 결론을 내리는 사람과, 그저 위에서 지령 내려오는 대로 똑같은 주문만 반복하는 사람은, 결론이 같아도 그 순도와 가치 면에서 하늘과 땅 차이가 날 뿐입니다.

이 책 저자 쉬즈위안은 중국계 미국 교포 출신도 아니고, 나이도 아직은 장년에 가까운 세대입니다. 이데올로기에 물들지도 않았을 세대(그 부모들처럼)이며, 또 욱일승천하는 신흥 경제 대국으로서의 조국을 마음에 거리낌 없이 자긍심을 갖고 받아들였을 만한 나이이기에, 더군다나 "중국"을 객관화해서 받아들이기 마냥 쉬운 처지는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책은 마치 미국인이 방문자처럼 중국 각처를 돌아보고 코스모폴리탄(미국인 중 상당수는, 특히 우리가 그 책을 읽기도 하는 저자라면, 이런 입장, 시선에서 말하는 이가  꽤 많죠.)처럼 사고하며 기록하는 품입니다. "나는 내 나라가 낯설다"는 그래서 매우 적절한 제목이죠.

중국인들과 대화를 해 보면 그야말로 획일성이 지배하는 사고이고 영혼입니다. 어쩜 저렇게 남의 입장에 한 번도 서 보지 않은 이들이, 자기 생각만에 갇혀 앵무새처럼 뻔한 내용을 녹음기처럼 반복할까 싶을 정도죠. 하긴 한국도 유체이탈 매너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이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 나라 전체가 미세먼지 때문에 폐암, 호흡기 질환으로 인구 사망률이 유의미하게 높아질 판에 엉뚱한 소리만 들먹거리면서 사드가 어쩌구를 떠들다니 말이죠(중국 공산당에게 지령이라도 받았는지). 마스크 아니라 방독면 쓰도 산다 해도 건강에 끼치는 영향이 전과 같을 수가 있으며, 누런 하늘을 보는 절망감이 그저 "참고 견뎌야 할 일" 정도로 무시될 수가 있습니까?

이 책 저자는, "중국을 타자화하여 본, 담담하고 객관적인 여행기"에 가까운 태도로 이야기합니다. 일단 위의 스노 책을 두고도, ".. 중국 공산당의 선전에 그대로 휘말릴 만큼 인식이 확고하지 못하여... " 같은 평가가 나옵니다. 물론 그는 종전에 그 정도로 생각을 정리하고 말았다는 것이며, 이번 여행을 앞두고는 다시 그 책을 읽은 후, 생각보다 훨씬 아름다운 문장, 생생한 인물과 풍경의 묘사가 그 책에 고스란히, 고맙게 녹아 있음을 깨닫고, 전의 평가를 수정합니다. "평소에도 나는 이런 느낌을 갖고 싶었다." 무슨 소린고 하니, 추상화, 이념화, 명제화한 건조하고 딱딱한 틀이 아니라, 내 느낌과 감상이 정직히 반영된 그런 느낌으로 사물과 세상과 타인을 받아들이고 싶었다는 거죠. 스노의 고전에는 생생히 살아 숨쉬는 군웅들(아직 역사의 승자가 될지 어떨지는 아무도 모르던 상황 아니었습니까. 그 반대에 가까웠으면 가까웠지), 정의감과 자존에 처음으로 눈 떠, 결연히 행동하던 농민들이 여기저기서 힘찬 거동과 눈빛에 가득차 있었지요. 저우언라이(周恩來)에 대해 "처녀처럼 날씬한" 몸매였다며 좋은 기억 속에 그를 간직한 대목도 있고, 마오가 수척한 링컨처럼 보였다는 서술도 있습니다(이건 맞습니다. 나중에 장제스와 회동할 때 찍은 사진에도 여전히 그랬고, 다만 통일 직후부터 얼굴과 몸이 불었을 뿐입니다). 어떤 고정관념과 개인적인 못난 원한에 얽매인 인간은, 이런 개별 체험의 인풋이 모두 왜곡된 채 볼품없는 정신에 축적됩니다. 정직할 때는 오로지 "더러운 욕구"의 부추김을 받을 때뿐이죠.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욕구가 꼭 사라지는 건 아니고, 욕망이라는 게 참 비천해서 혹 몸이 욕구를 뒷받침 못한다 해도 마치 유령감각처럼 그 충동만큼은 집요하게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올라올혀 애 씁니다. 뭐 노인들 비웃을 일만은 아니고 우리도 언젠가는 다 겪어야 할 일이므로, 인생 자체가 이렇게 슬픈 과정인가 보다 하고 정리할 필요는 있겠죠. 이번주에는 빌 헤이스가 쓴 올리버 색스의 회상록과 이 책,  두 권이 특히 기억에 남는 독서인데, 두 분 저자 다 나이가 적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가 여전히 당사자들을 괴롭히긴 하나 봅니다. 한 분은 그러나 여전히 자기를 기만하고 살고(누군지는 말 안 하겠습니다. ㅋ 본인도 알더군요), 다른 한 분은 이 책에 잘 나오듯 대단히 초연하며(나이도 십 년 가까이 더 젊은데), 부도덕한 영역에는 알아서 발을 빼는 성숙함을 지녔습니다. 여행기에 꼭 "그 이야기"가 들어갈 필요는 없으나, 요즘은 어딜 가도 "그것"의 유혹이 빠지질 않기에, 어떤 책이든 간접적인 언급은 있는 듯합니다.

사회주의 국가라곤 하나 개인의 생활을 국가가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 책에 나오는 쑨톄춘의 경우, 채벌(採伐)로 한때 크게 번창하던 지역 경기가 갑자기 죽어버림에 따라, 그 역시 하루아침에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좋은 일거리를 찾아 여러 지방을 전전해야 했으나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그를 힘들게 한 건 퇴직급여의 불공정한 지급이었습니다.

"30년을 일한 나와, 십여 년 일한 이들과의 처우가 같다면, 내가 산 20년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국가가 평가, 선언한 셈이 아닌가?'

이분의 생이 중국 인민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겠으나, 어떨까요. 한국에도 이런 부조리가 횡행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어디 가서 하소연을 늘어놓거나, 여차직하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드 보복을 당하는 건 중국 납품 업체와 거래하는 한국의 중소기업도 마찬가지인데, 이 거래처 하는 말이 "억울하면 법원에 소를 제기하라"입니다. 이런 뻔뻔스러운 작태가 또 어디 있을까요. 소송을 해 보야 중국 법원이 니네 편을 들어주겠냐는 배짱으로 하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쑨톄춘이 정신과 건강이 날로 병들어 가는 건, 육체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절망과 분노 때문이죠. 그리고 그 큰 책임은 원칙 없고 탐욕스러운 중국 공산당에 있습니다.

p195에는 마오 주석 실물의 얼굴을 어렸을 때 육안으로 볼 수 있었던 그의 "영광"에 대한 기술이 있습니다. 그의 생전 모습을 보기 위해 차량의 뒤를 따라 달린 군중이 수십만이었고, 이때 길에서 잃어버린 신발만 몇 켤레가 될지도 모르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는군요. 신발의 품질이 워낙 낮아 누가 훔쳐갈 생각도 안 먹었던 듯도 하구요. 그때로부터 다시 십오륙 전, 대약진운동에서 목숨을 잃은 인구만 억 단위로 헤아리는데, 일본 침략군이 죽인 인명의 몇 백배에 달하는 숫자입니다. 과연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을까요?

영토 극북의 하얼빈에서, 아직도 군사적 대치가 이어지는 먼 남방의 대만에 이르기까지, "인민들의 삶과 그 베경"을 눈으로 밟고 다닌 저자 쉬즈위안의 기록은 진솔하며, 마치 뉴요커의 담담한 시선처럼 모던한 색채로 독자를 맞이합니다. 요즘 뉴요커라면 오히려 political correctness 때문에 괜히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잔뜩 우회(그런데, 최근에는 또 그렇지도 않더군요. 워낙 중국인들이 세계 각지에서 진상을 떨어대니)했을지도 모를 텐데, 그의 "내 나라"는 아직도 부족하고, 고통 받고, 갈 길에 멀고, 그러면서도 문제의 실상을 정면으로 마주하지도 않은 채 무엇인가 다른, 오도된 목표를 놓고 열정을 쏟는 모습들입니다. 우리가 만약 이 작은 반도에 태어나지 않고, 저런 광대한 나라에 속해 여전히 가난한 일상을 영위했다면, 과연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나 자신을 마주했을까요? 이런 생각에 이르렀다면, 이미 쉬즈위안과 마음이 통한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