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립 - 2022 학교도서관저널 추천도서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웬들린 밴 드라닌 지음, 김율희 옮김 / F(에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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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애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소년 브라이스의 할아버지(외조부입니다)가, 브라이스의 깊고 푸른 눈, 환한 미소에 빠져 정신 못 차리는 중인, 같은 학교 친구 소녀 줄리(애나) 베이커에게 들려 주는 말입니다. 이 할아버지는 평소에 말씀도 잘 하고, 유쾌하며, 여러 면으로 매력이 넘치는 분인데, 이상하게도 브라이스(와 그의 가족) 앞에서는 그저 엄격하고 과묵한 모습만 드러내 왔습니다. 그 이유가 뭐였을까요? 할아버지는 이런 말도 합니다.

"걔가 제 아버지도 많이 닮았지."

할아버지에게는 릭 로스키(자신의 사위이자 소년 브라이스의 아버지)가 영 눈에 차지 않나 봅니다. 이런 던컨 노인이, 줄리애나 베이커가 자신이 아끼던 플라타너스의 벌목(땅 주인이 소유권에 기해 적법히 행사하는 조치)을 막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는 신문(지역 저널이겠죠) 기사를 읽고, 이 소녀에게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립니다.

브라이스는 이 외할아버지를 잘 모릅니다. 브라이스가 다소 서운한 게 있다면, 외할아버지 역시 자신을 알려 들지 않아 보인다는 거죠. 그러던 분이 고작 "그 줄리라는 애가 누구래니?"를 묻기 위해 처음으로 자신과 친해지려 들었다는 게 더 서운합니다. 허나 크게 개의치는 않았습니다. 브라이스는 나이가 아직 어린 탓도 있지만, 매사를 피상적으로 대하고 현재의 풍족한 상황에 만족할 뿐인, 다소 어리석은 남자애라서이죠. 반면 브라이스의 친누나 리네타는, 생각 없는 이 남동생이 싫고 아빠와 엄마(아빠만큼은 아니지만)와도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소설 후반부에서야 잘 드러납니다만 이 리네타는 가난한 베이커 씨네 쌍둥이(나중에 뮤지션이 되고 싶은)를 좋아하나 봅니다.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없는 열정, 정직함, 재능, 생의 바른 방향을 본능적으로 찾아가는 능력 등을 부러워해서가 아닐까 짐작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사실상 줄리라고 봐야겠습니다만, 소설은 무슨 까닭인지(아니, 이유는 우리가 다 알고 있죠) 소년 브라이스와 소녀 줄리의 시점이 매 챕터마다 교차되며 전개됩니다. 같은 사건인데 먼저 브라이스(이 점도 우리 독자들이 눈여겨 봐야겠습니다. 왜 브라이스가 먼저인지)의 시점으로 사건이 묘사되고, 그 다음은 같은 일을 두고 줄리 버전으로 설명하는 식입니다. 처음 브라이스가 본 줄리는, 잘생긴 자신에게 쓸데없이 스토커처럼 들러붙어 말을 거는 "수다스러운" 여자애에 불과했습니다. 이런 멍청한 브라이스의 속은 신경도 안 쓰고, 줄리는 자신에게 발표 대회 그랑프리를 안겨다 준 "닭 사육"에 온갖 정성을 다 쏟은 후, 시가 100불 상당의(ㅎㅎ) 계란을 매번 브라이스에게 갖다 줍니다. 베이커씨네 뒤뜰이 아주 지저분하다는 걸 알게 된 브라이스는 가뜩이나 성가시고 못생긴 줄리의 계란을 쓰레기통에 족족 버리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줄리는 (야무지고 당찬 성격인데도) 너무나 마음이 아파 브라이스 앞에서 울음을 터뜨린 후 자리를 뜹니다.

처음에 저는 줄리가 플라타너스 위에 올라가는 걸 보고, 공부는 못 하고 반사회성만 강한 애인가보다 짐작했는데, 그렇지 않고 (저 대회에서 다양한 미디어를 손수 제작하여 빼어난 PT를 성공시킨 거만 봐도 알 수있듯) 머리가 좋고 영리한 아이더군요. 소설 후반부에, 로스키 씨 집에서 열린 정찬 모임에서도, 어른들과 "영구 기관"에 대한 토론을 거침없이 이어갈 정도인 그 지식 수준만 봐도 알 수 있죠(물론 아직 "극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질문[매우 적절하긴 했으나]을 던저야 하는 단계이긴 합니다만). 브라이스는 머리가 나쁘고 이해 수준이 떨어져 이런 대화에 단 한 마디도 거들지 못합니다. 그가 보기에는, 할아버지 던컨이나 줄리나 다 "수다스러운 인간"의 범주에 들어갈 뿐입니다. 어떤 바보도 다 자기 수준에 맞춰 판단하기 마련이죠.

이런 브라이스가 바뀌기 시작한 건, 뭔가 듬직하고 "완성되어 보이는" 던컨 씨(즉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신문을 가리키며 "겉모습 밑에 가려진 내면을 보라"고 말한 후부터입니다. 그 후 계란 사건이 터지고, 베이커 씨(줄리의 아빠)에 나란히 선 자신의 부친(릭 로스키)의 초라한(분명 손꼽히는 미남자인데도)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뭔가 근본적으로 부족한 면이 있음을 자각하고 나선, 이제 줄리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기 시작합니다. 반면 줄리는 계란 사건 후, 이 브라이스가 생긴 것만 멀쩡할 뿐 많이 모자란 애라는 걸 깨닫게 되죠(이후에, 개럿 등 질 나쁜 애들과 브라이스가 함께 모여 자신의 장애인 삼촌을 험담하는 것도 엿듣게 됩니다). 던컨 씨도 그런 쪽으로 말했고, 엄마한테서 "20년 만에 남편의 참모습을 엿보고 매번 싸운다"는 팻시 로스키 여사(즉 브라이스의 엄마)의 말을 전해 들은 후로는 더욱 그렇습니다.

"난 로스키 아줌마처럼 살고 싶지 않아요." 그 말은 곧, 브라이스 같이 겉으로만 멀쩡해 보이는 애와 사랑에 빠져 이후 불행해지고 싶지 않다는 뜻입니다.

팻시 로스키 여사는 한편, 남편이 느닷 비열하고 찌질한 추측성 험담을 마구잡이로 내뱉는 태도에 충격을 받습니다.

"걔들이 돈이 어디서 나서 데모음반까지 만들었겠어? 분명 마약 같은 걸 팔았겠지."

사실 릭 로스키 씨가 충격을 받은 건, 자기 상식이나 기대에 맞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 그 이유 하나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과거의 좌절된 자신의 꿈, 즉 음악가가 되려 했으나 실패했던 기억이 되살아나서죠. 당시 그는 여건이 허락지 않아 꿈을 이루지 못했다고 적당히 자위하며 넘겼으나, 이번에 베이커 씨네 쌍둥이의 모습을 보니 그게 아니었던 겁니다.

자신은 첫째 재능이 전혀 없고, 둘째 꿈을 이어가기 위한 진지한 열정도 없었으며, 셋째 인생의 각종 어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항상 적당한 도피와 외면, 왜곡으로 때웠다는 자책과 자괴가 밀려왔기 때문이죠. 이제 그는 고통스럽지만, 자신이 누구인지 분명히 알게 된 꼴입니다. 그러니 애먼 아이들한테 "마약상"이란 정신 나간 누명을 씌워야 직성이 풀렸겠고, 그 부인 팻시는 이 순간 남편의 비열한 인격을 눈치채게 된 겁니다. 세상에는 이처럼, 자신의 게으름과 무능, 어리석음을 남 탓으로 언제나 치환하고 보는 열등 분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마지막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건, 소년 브라이스가 문제의 심각성을 알고 같은 전철(즉 아빠 릭)을 밟지 않기 위한 발버둥에 나섰다는 겁니다. 그 방법이 바로, "알고 보니 매력덩어리"였던 추녀 줄리와 사랑에 빠지는 거죠(여기서, 진정 성장이 필요한 브라이스 입장에서 "성장담"이 본격 펼쳐질 걸로, 소설에서 생략되고 만 후일담[언제 나오려나요?]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습니다). 허나 줄리가, 이제 만정이 떨어지다시피한 브라이스를 다시 받아줄지는 의문입니다. 여튼 브라이스는 운이 좋은 편입니다. 줄리 같은 당찬 애를 매혹시킬 수 있었던 잘생긴 용모를 갖추긴 했으니 말입니다. 이도저도 아무것도 안되는, 그저 속물이기만 한 다른 인생은 어떻게 해야 답이 나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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