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리아드
마릴린 로빈슨 지음, 공경희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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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에게 편지를 쓰는 아버지의 그 사연이란, 언제나 사람을 뭉클하고 숙연하게 만듭니다. 부모님은 나에게 육신과 영혼을 준 분이고, 나의 한계와 나의 장점은 언제나 그들을 돌이켜 보면 분명하게 드러나죠. 한국처럼 짧은 시간에 급격한 사회 변혁, 가치관의 변용을 겪은 곳에서는 세대 간의 단절이 일어나기도 하지만, 어느 정도 성숙기에 접어든 공동체, 분단 없이 가치관과 정신적 미덕을 generation to generation 으로 이어 오는 풍토가 정착되면, 아들은 아버지의 뒷모습에, 아버지는 아들이 주시하는 어딘가의 머나먼 시선 속에 그 살아온 자취가 드러나게 마련입니다. 하물며, 3대가 이어 온 전도와 선교, 그리고 고독한 소명의 사업이 그 공통의 지향인 집안이라면 어떨까요? 이 이야기는, 그리스도를 향하고 세상에 발을 디디며 성경의 워딩에 그 실천의 발판을 디디고 살아 오길 힘썼으나, 무서운 죄책감의 시련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사역 3대의 사연을, 아버지 목사 잔 에임스를 통해 내러이트되는 형식입니다.


우리도 하근찬의 <수난 이대>같 은 작품에서, 한 개인들의 살의 질곡과 사연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한 나라의 역사와 정체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은 축소된 국가이고 겨레입니다. 일대에 걸친 삶이 그런 기능을 하기에 좀 짧은 감이 있다면, 서로를 많이도 닮은, 닮아야 할 부자의 대(代)로 내러티브의 외연을 넓히면 될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자신의 아버지, 또 자신의 아들 사이에 놓인 "낀 세대"인 잔 에임스 목사는, 부친의 엄혹한 죄책감과 한 치 양보없는 격식주의의 의무는 고스란히 물려 받고, 아들의 상대적 방황과 확신 없음의 불리한 입지는 그것대로 또 뿌리치지 못하는, 좋은 점이라기보다 불리한 사항만 다 끼고 살게 되었던 아픔의 중간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랬기에, 이 에임스 목사는 삼대 중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꺼려지는 와중에도) 마침내 끌어안고, 자신의 아들이 터벅터벅 걸어가야 할 그 머나먼 지향에 대해 자신 있게 정곡을 찌르는, 유언 같은 조언을 해 줄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였던 것처럼, 너 역시 결국 나일진대, 이 말을 나보다 누가 더 자신 있게 일러 줄 수 있겠니?"


길리아드라는 이름이 낯설게 느껴지는 분이라면, "길르앗"이라고 바꾸면 그제서야 아, 하실 겁니다. 미국에는 이 "길리어드" 라는 이름을 가진 소도시, 소읍이 많습니다. 우리는 흔히 미국의 정착사를, 인디언들의 가혹한 절멸과 축출의 연대기로만 알고 있지만, 특히 남부의 경우 기존의 거주민 없는 버려진 땅을 혼자 힘으로 일구고 개척하여 농경 주거 형태를 최초로 도입한 지역이 많았죠. 일을 다 이뤄 놓고 보면 쉽고 편해 보이지만, 제아무리 비옥섣과 광활함이 갖춰진 농장이라고 해도 최초의 손길, 길들임이 없는 상태에선 단테의 지옥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장은 인간이 그를 농장으로 바꾸기 전에는 그저 아가리에서 용암이 뿜어져 나오는 야수의 대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대지를 나의 벗, 동반자로 삼기 위해서는 산 멀고 물 낯선 천만리 타지에서 불굴의 의지와 집요함이 필요했는데, 그래도 거친 자연의 시련을 받아 내기엔 그것만으로 부족했습니다. "신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지금의 시련은 그분의 크신 의지 한 조각의 발현이니, 나의 장래, 혹은 먼 훗날 내 후손의 앞날에 가득한 행복과 보람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이런 종교적 신념의 뒷받침이 없었으면, 그 문명화와 행복 추구(pursuit of happiness)를 위한 장정은 다 무위로 돌아갔을 겁니다. 개인개인이 다 투철한 신앙혼의 담지자 대변자였지만, 그래도 최종의 조율자, 지휘자, 사역자가 필요했고, 그 일을 이 에임스 가문의 남자들 같은 목사가 떠맡았던 거죠. 따라서 목사라면, 누가 어느 상황에서 그 영적인 해갈을 시도해도, 마치 준비라도 해 두었다는 듯 진정성과 유창성을 동시에 갖춘 답이 나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 일상의 삶이 성경 구절 하나하나에 기속되는, 양심에 의해 절제되고 말씀에 의해 연출되다시피한, 비고 가난하고 그러면서도 정의로운 손놀림 눈짓 발걸음 들숨 날숨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에임스 목사의 부친, 우리 독자에게 "할아버지 목사"로 이 소설에서 설정된 그 사역자는, 남북 전쟁 당시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남부의 그 캔사스 주에서 활동했습니다. 무 서운 일이 있었고, 그 아들과 며느리는 다만 아득한 암시와 예감으로 진실의 잔영을 더듬을 수 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불길한 유품의 항목을 확인하고, 땅에 묻어 버립니다. 며느리는 그에 그치지 않고, 그 중 셔츠를 다시 집어 들어 세탁하고, 다듬고, 다시 깨끗이 손질합니다. 대리석 조각 같이 반질반질해진 그 빛나는 모습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도로 대지의 품으로 이를 돌려 보냅니다. "지금 다시 파 보면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마치 우리네 여인들이, 가뜩이나 흰 바탕의 옷가지들을 빨고 다듬이질하고, 또 햇볓에 말리던 그 모습을 연상케 하죠. 한 점의 얼룩과 때도 허용하지 않음이 곧 가사의 주관자인 나의 품위와 자존에 직결된다는 듯 말입니다. 작가 매릴린 로빈슨의 서두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재건과 신앙이라는 두 개의 코드는, 유럽보다는 아마 한국의 독자들이 더 쉽게 공감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같은 "세탁, 정결의 절차"라도, 그 안에는 종교적 죄의식이 들어 있는지 아닌지에서 근원적 차이가 발생합니다. 에임스 목사의 사모님은, 시아버지의 내면과 심기, 그 번뇌와 한계를 철저히 이해했기에, 그 죄책감의 상속이 부정적 인계 절차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 희망적이긴 해도 말입니다.


바산의 황소,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길르앗(그런데 기독교 성경의 길르앗은, 도시나 읍이 아닌 광역 단위였습니다. 라몬 길르앗 할 때, 라몬이 도시이고 길르앗은 그를 포함한 지역명임을 상기하세요)의 향유는 당대 일등의 명산품이었습니다. 우리네 같으면 담양 죽제품, 강화의 화문석이라고 할 때나 마찬가지죠. 향유가 어디에 쓰이는 물건일까요. 예수가 마르타에게 부음 받은 그 화합물도 향유였고, 사울과 다윗 이래 선택받은 이들이 언제나 그 징표처럼 장로에게 수여받고 신체에 "입은" 것이 향유입니다. 향유는 죄사함의 표지요, 은총의 언약표징입니다. 향유를 생산하는 길르앗 땅, 여기에 부인할 수 없는 과거의 사연이 있고, 미래의 화해가 있으며, 끝내 저버리지 못할 절대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길르앗은 이제 인류가 그 죄업으로부터의 사면 희망을 놓지 않는 이상, 보편적 구원의 보통명사로 우리 곁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삼대가 지난 후에는 다음의 삼대가 그를 잇게 마련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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