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일기 - 머무름, 기다림, 비움
아르투로 파올리 지음, 최현식 옮김 / 보누스 / 2013년 7월
평점 :
절판


저자 아르투로 파올리 신부는 1912년생입니다. 아직도 살아 계신 분입니다. 우리 나이로 백 살이 넘으셨죠. 그 긴 생애 동안, 주로 사회에서 가장 소외되고 불우한 처지에 놓였다고 평가 받는 계층을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뛴 실천의 사도직을 맡아 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 책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저자 파올리 신부는 꽤 많은 책을 낸 분인데, 이 책 <La pazienza del nulla>는 예전에 나왔던 책의 개정판이 아니고, 작년에 처음 발행되었습니다. 우리 말로 <사막일기>라고 번역되었는데요, 실제로 사막의 풍광이나 그곳에서의 경험을 길고 자세하게 적은 내용은 아닙니다. 

책의 맨 처음(p18)에 나와 있듯이, 1933년, 샤를 드 푸코 신부의 선종 17주기를 맞아, 다섯 명의 신부가 특별한 서원을 하고 결성한 모임이 "예수의 작은 형제회"입니다. 드 푸코가 사막에서 생을 마쳤기 때문에, 그들도 알제리에 위치한 지역의 사하라로 가서(사하라가 워낙 넓으니까요) 사막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특별한 영적, 육적 고행을 시도합니다. 이것이 이 사막 일기가 쓰여진 배경입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사막의 구체적인 체험이 자세히 기록된 책은 아닙니다.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사막에서 느낄 수 있는 두려움, 불안, 이런 인간적인 감정을 극복하고, 그가 믿는 신과의 보다 밀접한 접촉, 대화, 체험이 어떤 식으로 발전했었는지, 그 최종적인 신앙적 결론은 무엇이었는지를 담담하게 적은 기록입니다. 제목이 <사막일기>이고, 또 처음에 사막에서의 영성 체험임을 분명히 밝혀 놓아서 사막과의 연관성을 눈치 챌 수 있을 뿐, 책의 본문만 보아서는 "사막"의 심상을 쉽게 떠올릴 수 없는 내용입니다. 물론, 로마 가톨릭, 그 중에서도 파올리 신부의 신앙처럼 현실 참여, 청빈, 신비적 체험을 따르는 경향이라면. 이 책이 사막에서의 체험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을 염두에 둘 때에 한 구절 한 단어가 더 깊은 공감으로 다가올 수 있겠습니다.

다시 책 제목으로 돌아가겠습니다. <La pazienza del nulla>,이 말의 뜻은, "아무것도 없음"을 인종, 인내하기, 이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어요. 실제로 이 책의 일관된 주제어, 키워드는 비움, 무존재("무소유"와도 연결시킬 수 있겠죠)입니다. "인내"는 우리가 아는 의미 그대로 참고 견딘다는 뜻인데, 가톨릭에서는 특히 이 단어가 예수의 수난과 연관되어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럼 무엇을 인내한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없는 상태"입니다. 

우리 존재의 비극은, 무엇인가를 가지려는 탐욕이고, 무엇인가를 충족하려는 사악한 의지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겠죠. 사실 무소유나 비존재 등은 기독교보다는 우리 동양권의 종교나 윤리적 가르침에서 더 강조되는 개념입니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서구의 종교적 경향에서는 다소 특이한 흐름을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지만, 13세기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인 프란체스코가 청빈을 강조하며 자연 친화적 가르침을 널리 퍼뜨린 것을 생각하면 오랜 전통을 지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즉위한 교황도 이 성인의 이름을 따라 자신의 타이틀을 채택한 것은 잘 알려진 일이죠.

59페이지에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비움의 경험을 하는 것은, 다른 경험을 하지 않는 것과 다르다." 이 말은 이탈리아어 de nulla의 뜻이 다소 모호한 데서 비롯합니다. de nulla는 of nothing의 뜻입니다. 만약 experience of nothing 이란 말이 있으면, 아마 "아무것도 체험하지 않기"라고 해석될 것입니다, 보통은요. 하지만  nothing, 즉 무(無)를 체험하기, 처럼 해석될 수도 있죠. 파올리 신부의 저 말은 그가 사용하는 서구어 특유의 성질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우리 동양인들은 이런 언어 관습에 익숙하지 않아 다소의 혼란이 올 수도 있습니다.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또 하나의 것은, 가톨릭 사제의 저술이라는 점과는 어울리지 않게, 한 무정부주의자, 아르헨티나 군사 정권의 이른바 "더러운 전쟁" 과정에서 실종된 어느 여성 운동가의 생애와 사상, 인간적 개성이 책 전체를 두고서 회고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녀는 사상적으로 무신론자였으며, 따라서 가톨릭 신부의 세계관과 철학과는 화합할 수가 없는 뚜렷한 충돌 지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파올리 신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생각과 신조, 실천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적 의미의 비움, 무소유를 떠올리게 했으며, 그녀의 사상이 무정부주의라기보다는, 그녀 존재 자체가 무정부주의였다."는 진술까지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그녀, 넬리 소사 데 포르티에게 생전에 "당신이 그토록이나 갈구하고 지향하는 바로 그것이 신 아닌가?"라고 몇 번이나 다그쳤다고 합니다. 그때마다 그녀의 반응은 눈물 섞인 "왜 그래야 하죠?"였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위적으로 구획된 소속과 신분, 그 외의 모든 차별성이 어떻게 가로막건, 나면서부터의 영혼이 지닌 개성과 특성이 부르는 상호 친화성은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강한 끌림을 낳는 법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무정부주의와 특정 신앙도, 정직한 실천 앞에 본디는 한 배에서 나온 형제 자매임을 통렬히 깨달을 수도 있음을 깨우치는 좋은 사례였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끝까지 짜증스러웠던 것은, 책 18페이지에 나오는 "예수의 작은 형제회"가 무엇이냐는 점이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읽으신 분은, 책 중에서 특정 교파에게 이단으로 자주 매도되는 "소형제회"가 기억에 남을 것입니다. 이는 이윤기 선생의 오역으로, 정확한 이름은 "작은 형제회"입니다. 이탈리아어로는 Ordine dei frati minori 라고 씁니다.  이 단체는 저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걸로 알 수 있듯이, 그 역사가 매우 오래된 단체죠. 이것과, 이 저자분이 소속한 단체 Piccolo Fratello di Gesu는 서로 완전히 다른 단체입니다. 책에 나온 대로 1933년에 다섯 사제의 주도로 처음 생긴 거구요. 일반 번역자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박사 학위까지 받으신 신부님이 번역하신 책인데 왜 이런 사항을 좀 구체적으로 알려 주지 않고 모호하게 방치하셨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역주가 적은 편은 아닌데, 예를 들어 러네 보아욤 신부가 토미즘 전통의 환경에서 성장하고도 결국 이런 단체를 창립하게 된 건 대단히 특이한 모습입니다. 역주를 통해 이런 점이 특별히 주목할 만한 것임을 독자에게 친절히 알려 주셨으면 더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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