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글만리 1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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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은 그간 한반도 내의 웅혼한 기상과 민족 정기 그 정맥, 그리고 정직한 민족혼의 표출과 유장한 서사혼의 구현, 이런 지극히 민족주의적인 과제에서 벗어나지 않는 일종의 일관성과 경향을 드러내어 왔습니다. <태백산맥>,<한강>은 우리 민족의 생활 터전이자 그 영혼의 구현태인 한반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뼈대를 이루는 두 척수적 지명을 동, 서로 각각 하나씩 뽑은 것이나 마찬가지구요(조 선생께서 직접 언급하신 적은 없으나, 독자에게 그런 총체적 시사를 주기에는 충분하죠), <아리랑>은 그 동서의 척수가 교차하는 지점에 자리했으리라 여겨지는 영혼이, 자신의 지난 사연과 격정, 앞으로의 예시적 진로와 비전을 장쾌하게 부르짖는 서사시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결코 다작의 작가라고는 할 수 없는 선생이 그간의 이력에서 뽑아낸 작품들이란 이처럼 무게감 있고 상징적 중핵을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 이루는 거대 이정표들이어서, 향후 어떤 작품을 쓰시든 그 중압감이란 실로 대단하실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독자가 소박한 생각으로 더듬어 보아도, 일단 물리적으로 작명과 소재로 쓸 지명이 부족하다는 게 첫째 이유입니다.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 과연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우리가 잊고 있었던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이들이 자신의 등과 가슴에 아로새긴 사연의 비계판 어느 한 결무늬는 남북으로건 동서로건 대륙 중국을 향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태백산맥은 낭림산맥, 함경산맥과 더불어 백두대간의 뻐대를 이루는데, 우리가 잘 알듯이 그 가장 북쪽의 지향은 2744m의 백두산이요, 이는 중국이 그 국경으로부터 우리와 공유하는 거대 자연 지형지물입니다. 우리 민족 뿐 아니라, 중국인, 그리고 이 소설의 주인공 북경대생 송재형이 잘 알고 있을 분야인 청 제국의 경영 주역 만주족 들이 공히 신성하게 여겨온 곳입니다. 중국 동북(둥베이) 지방에 다녀 온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이 장백산맥은 거대한 밀림 지대를 이룹니다. 밀림지대는 압록-두만강의 길고도 긴 동서 축을 따라 광활히 펼쳐지다가, 바로 달리는 북쪽 방향을 만나 또 거대한 벌판을 빚어내죠. 황량하면서도 그 위에 터잡고 사는 숱한 겨레(만주족, 한족, 그 예전의 거란, 보다 북서로 향해 몽골족 등등)의 기질과 외모, 혼의 개성을 형성한 곳입니다. 이러니 이 지역은, 남의 사정에 오롯한 이역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건 우리민족이 그 애틋하고 절절한 사연을 공유하는 역사적, 정서적 텃밭이기도 합니다. 


조정래 선생은, 배포 좋고 통 크게도 혼자서 배달 겨레의 대표 터전을 당신의 작품 소재로 알뜰하게 다 써버린 다음, 우리 옛 선조의 거칠 것 없는 기상대로 시선을 중국으로 향합니다. 그곳이 과연 중국이 배타적 귀속을 논할 수 있는 곳일지는 모르겠지만, 조 선생은 여러 복합적 계획을 가슴에 품고 대뜸 항공편으로 인천발 대륙행의 비행기를 잡아 타, 천연덕스럽게도 한글 외에 어떤 표음, 표의 문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명함 한 장 외에 그저 자신의 빼어난 기술과 지식만을 지닌 채 알몸으로(?) 황해를 건넌 성형 전문의 서하원의 시선을 빌려, 어떤 양해를 구함 없이 중국의 오늘을 흰 자 검은 동자 교대로 굴려 가며 응시합니다. 


우리 속된 독자의 선입견으로는, 이번에야말로 최남선(한때 조선 최고의 준재로 칭송 받았으나 그 의지의 유약함으로 가장 치욕적인 친일의 주홍 글씨를 달았던)이나 단재 신채호 선생, 혹은 만화가 김산 선생처럼, 불꽃 같은 민족혼의 시선을 만주 지역(중국인들이 신경증적으로 "둥베이"라 부르는 그곳)으로 향할 줄 알았습니다. 앞서 말했듯. 중국 영역 안에서 "정글'이 분포하는 곳은가장 직접적으로는 이곳 백두산 밀림 지대이기도 하고, 이를 넘어서면 서남 방향으로 아득히 달려 가야 그 비슷한 지형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건 웬걸, 선생은 만주를 건너 뛰고, 바로 대륙의 한복판, 옛 중원의 심장부였던 북경, 그 남쪽(이라고 간단히 말하나, 이 작품 곳곳에서 등장하는 고속철의 종단 시간으로 알 수 있듯, 이 둘은 멀고도 먼 거리를 서로 격하고 있습니다)으로 장강의 초입을 이루는 상하이, 이 두 핵심 지역을 오가며 이야기를 펼치고 있습니다. 시간적 배경 역시, 우리 독자가 지금 현재 살아 숨쉬고 있는 현재입니다. "역사"의 요소는 송재형이 간간히 상기 시키는 단편의 에피소드에서 간접으로 연상할 뿐, 조 선생이 다루고 있는 주 무대는 한국의 사업가, 학생, 전문직 종사자, 예술가, 심지어 음성적 영역에 머무는 지하경제의 일원 군상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우리와 감각과 이해를 공유하는 바로 지금의 현대인들입니다. 이 점 역시 어설픈 독자의 선입견을 배반하는 부분이죠. 


이런 대담한 비약을 이룬 동기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 해답을 찾기란, 여태의 어느 대서사시 못지 않은 길고 긴 분량의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딱떨어지는 해로 정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조 선생은 비록 한 눈에 담기 어려운, 진지하고 숭고한 외피와 세부 내용을 엄밀히 고안했을망정 그 핵심과 지향은 비교적 명쾌한 답을 독자들에 제시해 왔으며, 그 성과는 우리 모두의 공명을 예외 없이 불러 오는 쪽이었습니다. 문제가 비록 심각하고 진지했다뿐, 그 답의 진로는 대강의 방향을 예측하기가 어렵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하지만, 이번 작품, 그의 작품 세계의 진로 예측(올해 일흔의 연세시나, 앞으로 우리 곁에 반 세기는 족히 더 머무셔서 계속 머리와 가슴을 일깨워 주실 겨레의 스승으로 남아 주시길 넉넉히 기대하기에) 과정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을 이룰 이 작품은, 설정과 출발점, 그리고 그 역점의 마무리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기대를 즐겁게 배반하는 한 획기였습니다. 


이 신나고 재미있고, 한편으로 증권 소식지의 그것만큼이나 토픽이 다양히 삽입되고, 그 세속적이고 가벼우면서도 마침내 정로를 향해 회귀하는 대 장편 소설을 끝까지 감상했을 제 동료 독자분들, 혹시 선생님의 전작을 빠짐없이 섭렵한 층에 그 중 가려 이 질문을 삼가 묻자면, 어떠셨어요, 과연 이 소설이, <태백산맥>, <한강>, 그리고 <아리랑>을 쓰신 그 조정래 선생님의 작품처럼 느껴지시던가요? 선생의 작품은 그 이전의 숙연한 텍스트에서도 언제나 잘 읽히는 경향이었습니다. 담은 메시지야 한 개인의 한 길 속을 백 번이고 반동하며 그 곳곳을 울리는 심오함을 담았지만, 만약 피 한 방울 안 섞인 외국인이 행여 읽더라도 (한국어의 독해에 어려움이 없는 이상) 그저 이야기만으로 읽어도 일단 재미있게 읽힌다는 장점이 분명히 있습니다. 이 이정표적 장편과 종전의 민족혼 서사시의 공통점이라면, 일단 이 천의무봉의 가독성, 서사성이 일단 눈에 띕니다. 하지만  그 외의 요소에서는, 선생의 내면과 세계관, 미래를 향한 예지(이는 과거에의 통찰과 직결되는 쌍생아 관계죠)에 어떤 큰 변화가 있었나 싶게, 일흔의 연세(가 그저 속된 독자에게 부르는 선입견)이 무색하게, 새롭고 참신한 각종의 에피소드와 거대 줄기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마치 황석영의 <장길산>과 <머나먼 쑹바강>의 시선과 주제 의식이, 박범신의 <불의 나라>와 김홍신의 <인간시장>의 내러티브를 만난 것만 같았어요. 우리가 익히 알던 바로 그 조선생님인데, 일흔의 연세에 오히려 새로운 활력을 구하신 새로운 이야기꾼 조정래를 다시 만난 듯한 신선함과 활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제 생각에, 우리 겨레 일쳔 년 미래, 전 세계 시민 일만 년 미래를 좌우할 중국 민족의 대 약진의 조짐이 그에게 끼친 영감과 영향이 너무도 강했던 이유가 있지 않았나 봅니다. 소설의 주 무대에 결국 자연지리적 의미의 정글은 없습니다. 대신, 지난 시절 치욕의 한 세기를 겪었던 중국인의 자존이 비로소 그 활개를 펴는 순간, 이 실용적이고 상업혼 가득한 민족이 제 오랜 터전을 무대로 펼치는 자본주의의 거대 물결이 빚는 온갖 파장이, 말 그대로 사회학적 의미에서의 정글을 연출하고 있다는 그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정글에는 온갖 낲선 병해와 생태적 라이벌 생명체들이, 기존의 정착자들을 향해 비수를 품고 그 패권 교체를 노리고 있습니다. 민족 문학의 대부격인 조 선생은 이런 각별한 시대 흐름에 특별히 주목하여, 이번의 미래 지향적 장편을 통해 동ㅅ히대 겨레의 집단 경각을 시도한 것입니다. 선생의 내공과 달관은, 어깨에 완전히 힘을 뺀 채 서사된 이런 쉽고 유장한 내러티브가 새로이 구축된 것을 보아도 그 엿봄이 가능했습니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에 영감 받을지는 우리 독자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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