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겐슈타인 입문 -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 필독서
롤라 유네스 지음, 이영철 옮김 / 21세기문화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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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베이루트 소재 성 요셉 대학교에 재직 중인 학자입니다. 책 뒤표지를 보면 "프랑스어권의 비트겐슈타인 입문서"라는 말이 있는데, 레바논은 1차 대전 후 프랑스의 관리 하에 들어갔었고, 사실 19세기에 이미 나폴레옹 1세가 지중해 일대에 세력을 확장하며 투르크로부터 빼앗아 온 상태였습니다. 프랑스 제3공화정 시대에 베이루트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세운 교육시설이 성요셉대학교입니다. 앞표지에 나온 원제 "Introduction a(아 그라브) Wittgenstein"이라는 문구만 봐도 불어로 원래 쓰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철학계의 원로이신 이영철 부대 명예교수가 번역했습니다. 역자 서문 p13을 보면, 원저 중 독어나 영어로 된 문장은 가급적 (불어 원서로부터의) 재인용이 아닌 원문으로부터 번역했다고 밝히시는데 이런 점만 봐도 벌써 믿음이 생깁니다.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에 죽은 비트겐슈타인은 그 후로도 끊임없이 재해석되었는데 그의 사상적 깊이와 입체성이 증명되는 대목입니다. 게다가 타고난 지능 자체가 범상치 않아서 천재 캐릭터 자체가 주는 매력이라는 게 있습니다. 저자 서문 p17을 보면 공산주의자, 소련 간첩(p61 이하 참조), 동성애 아이콘 등으로 매번 거듭나고 재해석되는 그를 황홀하게 바라보는 어조가 느껴지는데, 이 중에는 "탈식민의 기수"도 있습니다. 저자도 레바논 사람이다 보니 이런 시각에 특히 공명하는 듯하며, 이렇게 성격 규정을 한 사람은 인도 델리大 교수 비나 다스(Veena Das)입니다. 본문이나 권말 참고문헌 소개에도 이 여성학자의 풀 네임이 나오지 않아서 제가 이 후기에 따로 적어 둡니다. 

아무래도 비트겐슈타인 하면 일반인들이 대뜸 떠올리는 사항이 분석철학, 논리실증주의 등이겠습니다. 이 역시도 사실은 40여년 먼저 고틀로프 프레게가 정초를 놓은 분야이기는 합니다(p219). p73을 보면 역자 각주에서, 프랑스어 원서에는 (독일어로) ist라고 표기되나 이 번역서에는 영어로 is라고 표기한다고 밝힙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은 대단히 영어에 능통했고(물론 처음엔 서툴렀죠. p37) 그가 사상의 핵심을 공유한 지인들도 영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p73에 나오는 계사(繫詞. copular)를 설명할 때, 뜻이 같은 것 같아도 외연이 훨씬 넓은 영어의 is가 독일어 ist보다 더 적절한 예시 아니었겠습니까. 

전국시대 조(趙)의 공손룡도 백마비마론(白馬非馬論)을 폈습니다만 2300년 후의 비트겐슈타인 역시 계사로 연결되는 주부와 술부의 관계가 단일하지 않음에 주목했습니다. 다만 이것이 그저 한가하고 무익한 말장난이 아니라 불합리한 언어의 지배로부터 인간 정신을 해방시키려는 노력(p75), 언어에 의해 걸린 마법에 맞서는 투쟁(p151)임을 우리들이 알아야 하겠습니다. p78을 보면 역자는 각주를 통해 부정적 사실("일각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과 비사실("지구는 항성이다")을 구별하여 초보자를 돕습니다. 우리가 탈근대 탈근대 하는 건 근대의 긍정적 속성에 주목하기보다, 비트겐슈타인도 내내 예민하게 여겼던, "근대의 제국주의적 본질"을 전제로 한 반응인데, 비트겐슈타인은 과학에서 경탄이라는 반응을 제거하고, 오히려 과학의 본래 스탠스인 무관심, 냉담으로, 저런 의도된 탄성과 난리법석에 맞서라고 합니다. 번역문에서, 역자 이영철 박사님의 스타일이 발랄하십니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꿈꿀 수 없는 걸 꿈꾸고 견딜 수 없는 걸 견디며 이길 수 없는 적을 이기는 낭만과 시련을 말했는데, p95에 인용되는 <논리철학 논고>의 한 구절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생각될 수 있는 것을 경계짓고, 그로부터, 생각될 수 없는 것을 (따로) 경계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뒤르켐은 궁극의 인간 자유 발현은 바로 "자살"이라고까지 했는데, p115에서 저자 유네스 박사는 비트겐슈타인이 본격적으로 논하지는 않은 자살이라는 테마에 대해 잠시 곁가지 삼아 얘기를 꺼냅니다. 

생전에 비트겐슈타인이 말하지도 않은 걸 어떻게 논의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는 브라운 신부와 대도 플랑보의 창조자로 유명한 G K 체스터튼(비트겐슈타인보다 15년 연상)은 생전에 <정통론>에서 자살에 대해 일정 분석을 한 적 있는데, 여기서 그는 자살이 하나의 죄일 뿐 아니라, 궁극의 죄라고 합니다. 하다못해 꽃을 훔치는 도둑도 그 아름다움을 칭찬할 줄은 아는데, 자살자는 꽃밭을 아무도 못 즐기게 파괴하는 반달에 가깝다고 비유하면서 말입니다. 그건 그렇다치고, 저자 유네스 박사는 비트겐슈타인과 체스터튼이 어디서 어떤 연결지점을 가진다고 여기길래 이런 대변(代辯)의 구조를 세울까요? 그 근거는 윌리엄 브레너 교수의 논문 "윤리학 기초"에서 찾습니다. 이 논문에서 브레너 교수는 체스터튼의 정통론과 비트겐슈타인의 가치중립론 사이에서 기묘한 공통점을 찾았습니다. 

과연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암살자(p16, p225)일까요? 직업 암살자는 물론 생명들도 빼앗지만, 명성이 나려면 기술도 좋아야 합니다. 기존의 모든 엉성한 담론 기초를 일일이 지적, 비판하며 모든 체계를 다시 세워 보려던 그의 노력은 꽃밭에 불을 지르려는 게 아니라 궁극의 낙원을 지으려는 집요함이었습니다. 장자(莊子)의 비유에서처럼, 내가 지금 꿈을 꾸는지 아닌지(p182)를 명확히 알려면 제2의 데카르트가 되어 모든 걸 의심하고 끝까지 파헤치는 수밖에 없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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