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X형사 대본집 상·하 세트 - 전2권
김바다 지음 / 너와숲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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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피소드 9,10에서 처음에 의심을 받는 하남수한테 진이수가 같은 양아치과로서 동족 혐오(?)를 드러내는 장면이 재미있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재벌3세가 왜 경찰직에 집착하며, 경찰관으로 불리는 걸 무 척이나 자랑스러워하는지는 이미 상권에서 우리들이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재벌 3세가 아니라, 불륜 관계에서 태어난 혼외자였고, 어떤 소속감이 필요했습니다. 또한 상류층의 타락하고 공허한 삶을 약간은 국외자로서 체험하고 통찰할 수 있었기에 사치스럽고 부유한 삶에 큰 가치를 두지 않습니다. 이강현의 외골수 기질, 오로지 경찰 업무에만 헌신하려는 성품도 반(反)속물성 지향이라는 점에서 공감이 갔기에 진이수는 호감을 가진 것입니다. 이강현 캐릭터는 토머스 해리스의 클라리스 스탈링 캐릭터와 닮기도 했습니다. 물론 혈통(?)은 이강현이 더 좋습니다. 

에피소드 13, 특히 p283을 보면 SNS에서 "불륜녀 아들 주제에.."라는 악플이 달리는 대목이 있는데, 드라마에서는 "금수저가 아니라 불륜수저였네!"라며 더 찰진 악플이 추가됩니다. p286을 보면 이강현의 대사가 "진이수한테 가!"리고 나오는데, 미세한 차이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는 "진이수한테 가 봐."라며 보다 진정된 어조, 또 상대방을 걱정해 주는 감정이 드러납니다. 에피소드 9, 10, 특히 p54에서 김영환 대표보다 더 실세인 배후 투자자를 찾으러 가자는 제안에 긴장 혹은 기대를 갖게 된("역시 금수저로군") 이강현과 시청자들은, 알고보니 그 대표가 바로 진이수임을 알고 또 폭소가 터집니다. 역시 돈이 좋긴 좋습니다. 그런데 녹스의 십계에도 중국인을 등장시키지 말라 했건만 이렇게 무속 쇼를 통해 자백을 받아내는 게 과연 장르 반칙이 아닐지는 좀 생각해 봐야 하겠습니다. 또, 증거능력은 있을까요? 

양아치들의 삶은 공허합니다. p116을 보면 김영환은 중학교 때부터의 인연을 강조하며 진이수를 원망하지만 진이수는 냉정하게 그를 손절하죠. 양아치들은 원래 철저하게 남을 이용하고, 이용할 가치가 있을 때에만 관계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보듯, 별다르게 치밀한 계산이 깔린 게 아니라 대단히 허술하고 충동적입니다. p230을 보면 "너의 그 무계획적이고 대책 없는 작전"이란 대사가 있는데, 여기서뿐 아니라 상권 p406을 보면 조성구의 집에서 괴한을 잡을 때 완강기만 믿고 진이수가 뛰어내리는 장면이 있죠. 사실 이강현이 진이수 해촉을 상신하려 들었던 건 순전히 그의 안위가 걱정되어서였던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돈 보고 접근한) 친구 말고 그냥 있어 줄 친구를 찾아 봐"라는 충고에서, 진이수가 자신의 삶에 대해 많은 반성과 각성이 있었음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p225를 보면 이강현이 ooo에게 미란다 고지를 하는데, 죄명을 읊으며 울먹울먹합니다. 아무리 강한 그녀라도 죽을 고비를 막 넘긴지라 어쩔수없습니다. 이 대목은 예전 드라마 <38사기동대>에서 천성희(소녀시대 수영 扮)가 탈세범을 잡고 추징금 고지를 하던 장면이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참고로 황성구 서장 역을 맡은 김병춘씨가 그 드라마에서는 강노승 과장 역인데, 거기선 잠시 일탈을 해도 결국에는 양심의 부름을 따르는 선인이었지만 여기서는 경로가 사뭇 다릅니다(그 정도가 아니라 순 악...). 그리고 이강현 부친 역에 권해효씨가 나와 좋은 연기를 보여 주는데 안 보는 사이에 참 많이 늙으셨다 싶었습니다. 

안락의자형 탐정의 시조 격인, 오르치 남작부인의 피조물 "구석의 노인" 시리즈를 보면 마지막에 가서 탐정인 주인공 신상의 문제로 갑자기 접근하여 긴장감을 높입니다. 반대로 셜록 홈즈는 본인의 가정사가 사건에 직접 엮이거나 하지는 않고 내내 범죄로부터 외계 관찰자로 남습니다. 니콜 윌리엄슨, 로버트 듀발 주연의 1970년대 영화 <7퍼센트 용액>에서는, 마치 이 드라마에서의 진이수처럼 어렸을 적의 기억이 지워진 셜록 홈즈의 고뇌가 (마지막에 충격적으로) 다뤄지긴 하나 이는 외전입니다. 또 21세기 들어 만들어진 BBC 드라마 <셜록> 시즌4에서도 여동생에 대한 과거사가 나오지만 역시 정전(canon)으로 볼 것까진 아니죠. 

그런가하면 엘퀼 푸아로는 마지막에 본인이 직접... 여튼 이 드라마도, 진이수가 계속 범죄자를 잡아들이는 외부의 해결사로만 활약하는 게 아니라, 바로 자신, 자신의 아픈 과거사로 계속 닿을 듯 말 듯하며 시청자의 가슴을 졸입니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재벌3세(혈통에 하자가 있든 말든)의 유쾌함, 거침없음이지, 과거에 발목잡혀 아파하고 주저하는 모습이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p324에서 조희자(전혜진 扮. 참고로 고 이선균씨 배우자와는 동명이인입니다)는 처음으로 진이수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데, 참 안타깝습니다. 드라마 내내 그토록 재벌가의 마나님으로서 위신을 세웠건만... 한편 이즈음에서 진승주, 비록 배다른형(?)이지만 내내 동생 이수에게 잘해줬던 그에 대해서도 비밀이 드러나는데, 역시 인간 행동의 어떤 얄팍한 동기가 드러나는 대목이기도 해서 기분이 씁쓸해집니다. 

결말이 묵직합니다. 15, 16화를 보고 나면 이 진씨 가문의 비극적인 역사가 메인이고 여태 들려 준 범죄 해결 에피소드는 곁가지로 보일 만큼입니다. 아! 사람이란 어쩌면 이렇게도 간단하게, 또 한심한 동기에서 사람이길 포기할 수 있는지... 사실 15화 시작부터 이미 드라마의 진행이 나침반(p362)의 어느 방향을 가리킬지 짐작은 훤히 되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시청했고, 이 대본집으로 잔향을 음미했습니다. 하권 뒤표지의 진이수 미소가 플렉스하기보다 차라리 슬퍼보입니다. 세상이 본래 그런 거죠 뭐.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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