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전 시집 : 카페 프란스 - 윤동주가 사랑하고 존경한 시인 전 시집
정지용 지음 / 스타북스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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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수, 이동원이 부른 가곡으로도 유명한 <향수(鄕愁)>는 시인 정지용의 대표작입니다. 이 시 전집에서는 p55에 실렸습니다. 이 책 서문에도 나오듯이 정지용 시인은 한때 납북/월북 여부가 불분명하여 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실리지 못한 것은 물론, 그의 성명이 일부 혹은 전부가 가려진 채로만 표기되어야 했습니다. 지금은 제약 없이 그의 모든 작품을 읽을 수 있으며, 우리 독자들도 그 느낌을 거리낌없이 표현할 수 있으니 새삼 자유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됩니다. 박인수, 이동원 두 분이 몇 년 전에 타계해도 그들의 목소리가 영원히 우리 곁에 남듯, 정지용 시인이 사거한지 한 세기가 가까워 와도 그의 아름다운 작품들은 여전히 한국의 혼을 공유하는 독자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스타북스의 이 전집은 몇 가지 특색이 있습니다. 이 책 표지만 봐도 카페의 ㅍ, 프랑스의 ㅍ에 ㅇ이 병기되어 있습니다. 이런 표기는 현대 한국어 맞춤법에서는 전혀 허용하지 않는 것인데, 작품 발표 당시의 표기를 그대로 살려서 대단히 멋스럽기까지 합니다. 사실 훈민정음 창제 당시(15세기)의 표기 관행은 자음 몇에 ㅇ이 붙어서(ㆄ), 그 자음이 이른바 순경음(脣輕音)임을 드러냈는데, 요즘 언어학 용어로 하면 일종의 마찰음(fricative)입니다. cafe, France의 f은 labial fricative인데, 이 음소들이 우리말 [ㅍ]과 다름은 명백합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어학에도 일정 조예가 있었던) 정지용 시인이나 당시(20세기 전반) 한국어(조선어) 문예지 편집진들이 더 합리적인 원칙을 가졌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 외에도, France의 n이 ㄴ으로 표기되었는데 이 경우 [ŋ]으로 발음되는 걸 모른 채 당대인들이 그저 문자대로만 읽은 오류로 생각됩니다(아니면 식민 모국인 일본의 표기를 그대로 따랐었든가). 여하튼 출판사의 이런 의도적인 효과가 현대 독자의 눈에는 그저 정겹습니다. 

시인의 시대가 지금과 거의 90여년 차이가 나다 보니 저런 표기뿐 아니라 어휘도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꽤 낯선 게 많습니다. 책에는 그래서 어려운 단어 밑에 일일이 각주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이 전혀 모르는 어휘라고 해도, 작품 속에서 우리는 그리 큰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편안히 읽습니다. 편안히 읽을 뿐만 아니라 시어가 주는 본연의 리듬과 감동까지 받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우리가 한국인이고 둘째 시인의 작품이 워낙에 잘 짜여졌다 보니 사전지식 없이도 본연의 의도가 그대로 잘 전달되어서가 어닐까 싶습니다. 우리가 가곡 덕분에 "성근"으로 그냥 받아들인 시어도, 이 책에서는 잡지 <조선지광>의 태도를 따라 "석근"으로 정했으며 다만 각주에서 성근, 석근 각각의 경우에 시에서의 맥락이 어떻게 달라지는지까지 자세히 설명합니다. 

p160에는 작품 <절정(絶頂)>이 소개됩니다. 아마 고교 교과서에는 잘 실리지 않았던 작품이겠습니다. 절정이라는 제목을 가진 가장 유명한 작품은 이육사의 시이겠습니다. 나붓기오(나부끼오), 섰오(섰소) 등 종결어미도 오늘날 우리가 쓰는 원칙과는 무척 다른 결과물들입니다. 제2행의 주사(朱砂)는 아래 각주에 상세히 뜻이 나오지만, 당시에는 여성의 입술에 오늘날의 립스틱처럼 바르던 물질이었습니다. 철새를 "기후조"라고 쓴 부분도 무척 흥미로운데 저는 심지어 1970년대 한국 현대 문학 작품에서도 이를 줄여 후조(候鳥)라 쓴 경우를 자주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 어휘를 당시 일본어 corpus에서 수입된 것이라기보다, 더 오래된 중국 기원 한자어로 봅니다. 

정지용과 동갑이었던 소설가 채만식은 그의 단편 <치숙(痴叔)>에서 조선 여성과 이른바 내지(일본) 여성을 대조하며 전자의 열등성을 너절하게 설파하는 1인칭 주인공을 내세운 적 있습니다. 물론 채만식이 실제로 그런 생각을 가진 건 아니고 식민화가 진행되며 본연의 혼까지 빼어놓고 사는 한심한 인간상을 반어적으로 비판한 것입니다. 이 책 p232를 보면 제목이 "우리나라여인들은(띄어쓰기가 없습니다)"인데, 조선 여인들의 미덕과 아름다움을 절절한 형용어구들로 기막히게 묘사합니다. 남자나 여자나 이족의 철제 하에 얼마나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습니까. 그 상황에서 이런 말들이 나오니 구십 년 후에 읽어도 눈물이 핑 돌 정도입니다. 일부 못난 세력이 악질적으로 성별 갈라치기를 하는 요즘, 제발 이런 작품을 교과서에 좀 실어서 젊은 세대가 반대 성별에 대해 근거없는 적대감, 혐오심을 갖지 않게 도와야 하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표기법은 발표 당시의 것을 살렸기에 더욱 맛이 잘 살고 시대 분위기까지 간접으로 풍기게 합니다. "오월ㅅ달"처럼 오늘날과는 전혀 다른 사이시옷 쓰임도 눈에 확 띄어 신기하고 재미있습니다. 표지 안쪽에 실린 정지용 시인의 사진을 보면 그대로 21세기에 모셔 와도 여성들이 환호할 만한, 이지적이고 단정한 외모입니다. 예쁜 책 장정과 잘 조화되어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한눈에 지성인임이 느껴지는 그였기에, 그 작품들도 더욱 강렬한 매력을 풍깁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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