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사회 통합 및 양극화 해소 방안 연구
이진로.채진원.하봉준 지음, 한국정치평론학회 엮음 / 인간사랑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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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극심한 양극화 때문에 큰 홍역을 치르는 중입니다. 경제 면에서 보는 빈부 격차의 확대도 문제이거니와 이제는 정치의 측면에서도 보수 진보 양 진영으로 나뉘어 극심한 대립이 진행되며, 정치인들을 향한 폭력, 테러까지 발생하는 판국입니다. 미디어 중에는 전통적으로 기능해 온, 레거시 미디어라는 게 있고(요즘은 매스 미디어라는 말을 잘 쓰지 않습니다), 유튜브 등 인터넷 발전에 크게 기대어 우리 곁에 새로 다가온 뉴미디어가 있습니다(p76 등). 레거시 미디어 중 대형 신문들을 가리켜 보통은 언론이라고 부르는데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서도 언론이라는 용어를 대개는 미디어와 같은 의미로 쓰고 있으며, 일개인의 스트리밍 채널이라 해도 요즘은 파급력이 클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 역시 막중하겠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언론은 보통 제4부(府)라고도 하며, 사회의 공기(公器)라고도 부릅니다. 사회가 이처럼 양극화로 치달은 데에는 언론, 즉 미디어의 책임이 없다 할 수 없으며, 반대로 언젠가는 상처가 봉합되고 치유되어야 할 공동체의 미래를 위해 언론의 위상이 어떻게 재조정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심도 있는 논의를 진행해야 마땅합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에 양극단이 있다면 그 중간지대가 있는 것도 확실합니다. 한국에서는 과거 안철수씨가 극중주의라는 말을 썼는데 많은 정치평론가들은 대체 극중의 개념이 무엇인지를 놓고 많은 비판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 p133에도 나오지만 극중(extreme centrism)은 안철수씨가 최초 고안한 게 아니고 프랑스의 현 대통령 마크롱이 정치 데뷔할 때부터 들고나온 말이며 안철수씨도 이를 밝힌 만큼 그 개념적실체성까지를 비웃을 일은 아닙니다. 다만 원조라 할 수 있는 마크롱이 말의 성찬에 그치지 않고 이를 현실정치에서 구현하고 있는지야 또 별개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는 있겠습니다. 아무튼 정치와 언론의 양극화는 한국만의 일은 아니며 저런 "극중" 트렌드가 새로운 대세로 부각할 만큼 이미 양극화가 상당히 굳어진 프랑스, 또 미국에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지적(p115)하듯이, 마크롱 같은 정치신인이 유구한 공화정 역사를 자랑하는 프랑스 같은 나라에서 일약 기린아로 대두할 수 있었던 건, 좌우 양극화 때문에 나라가 망할 지경까지 갔다는 우려가 퍼지고 그 나름 위기 해소와 대안 제시 움직임의 일환이었다고 하겠습니다.  

p77을 보면 1980년대에는 이른바 5대 신문이 서로 논조가 비슷했는데, 이를 종래에는 군부 정권의 통제, 이른바 보도지침으로 대표되는 언론장악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책에서도 그렇게 지적하지만, 그 외에 사회 구조가 단순하다보니 언론들 사이에 차이가 나타날 특별한 동기가 있지 않았다는 시사도 하는 것 같습니다. 1997년 대선에서 처음으로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고, 1997년 초부터 대형 스캔들이 연거푸 터지다 보니 청와대 레벨에서의 언론 관제(?)가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정치의 신랄한 민낯이 드러나는 보도가 터져나왔으며 이때부터 신문 보는 일이 특히 재미있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헌법에서 보장하므로 원칙적으로 언론은 가이드라인 없이 모든 진실을 보도할 권리와 의무가 있으며, 의견 표방의 자유도 이를 지지하는 일각의 시민들이 있는 이상 얼마든지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지나쳐 대립과 갈등이 노골적으로 조장되는 지경까지 가면 그건 그것대로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문의 정파성(p78)은 그런 의미에서 (극복이냐 지양이냐를 놓고) 더 깊이 숙고되어야 할 이슈입니다. 시민의 정파성을 그대로 대변해야 하느냐 아니면 순화, 조정해야 하느냐를 놓고 말입니다. 

언론의 정파성, 양극화는 비단 정치 대립상의 보도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경제 뉴스 보도에서도 언론사의 성향에 따라, 대기업의 특정한 행보에 대한 옹호, 비판이 갈리는데,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이해가 언제나 대립한다는 시각 역시 편향성의 발로라는 비판도 있습니다. 나아가, 이제는 남녀 간의 대립, 젠더 이슈마저도 진영 양극화로 치달아 인터넷 공간 곳곳에서 소모적인(때로는 대중의 주목을 끌기 위한, 지극히 비생산적이고 상업적 속셈이 드러나는) 싸움이 벌어지는데, 이 역시도 사회 파괴를 노리는 불순 세력의 갈라치기 의도가 개입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입니다. p211에서는 이에 더하여 가짜 뉴스의 조직적 생산까지 우려의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p251을 보면 선호되는 신문으로(꼭 구독한다는 뚯이 아니라 인터넷 포털 등에서 찾아보는 선호도도 포함됩니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매경, 경향, 동아일보, 한경 등의 순서가 나오는데 이걸 보면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책에서는 세 가지의 결론을 내놓습니다. 우선 각 매체는 정파성, 편향성을 극복하고 시민의 공론을 하나로 모으는 보다 성숙한 보도 자세를 정립해야 하겠으며, 둘째 편파적 극단적인 의견을 원색적으로 쏟아내는 패널이나 정치인, 스피커의 출연을 무책임하게 방관하지 말고 거중조정하는 원숙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의 존립을 흔드는 가짜 뉴스의 창궐을 적극 저지하여 참된 미디어의 존재 이유를 사회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실 미디어의 정치 편향성이 우리뿐 아니라 오히려 미국 같은 데서 더 심하게 불거지는 상황인지라 문제 해결이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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