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토피아 무의식의 저널 Umbr(a)
슬라보예 지젝.가라타니 고진 외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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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 명망을 지닌 철학자이며 특히 한국에서는 좌파의 록 스타와도 같은 위상과 인기를 누린 슬라보예 지젝의 책입니다. 그의 책은 언제 읽어도 시원시원하고 재미있습니다. 물론 그의 속깊은 의도까지를 다 읽어내는 독자라면 (정치적 입장에 무관하게) 더욱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칸트의 정언 명법이라는 게 있습니다. 어떠어떠한 조건 하에(가언. 假言) 이것을 하라는 게 아니라, 이것이 마땅한 당위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p36)" 여기서 문장의 후단은 무조건으로 주어진 이유이므로 사실 불필요한 언명입니다. 단지 수사법적 효과를 낳을 뿐이죠. 그런데 지젝은 이 구조를, 유머러스하게 비틀어서 신랄한 풍자의 효과를 냅니다. "너는 본체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알아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문장은 지젝보다 훨씬 머리가 나쁜 우리 독자들도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 나치가 수용소에서 저지른 끔찍한 고문을 예로까지 친절히 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 문장 바로 앞에 나왔던 "인식론적 실패는 리비도적 공포의 부차적 효과"라는 말이 좀 어려울 수는 있습니다. 리비도는 프로이트가 충분히 잘 정의한 대로, 자아와 초자아의 앞 단계 저편에 놓인 원초적 욕망으로 뭉친 그 무엇입니다. 그런데 리비도는 욕망을 발동시키는 주체이자 욕망 그 자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공포를 품기도 하는 아주 단순한 아이입니다. 공포는 알고 보면 욕망과 많은 몸이 붙어 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 어떤 이유로든 공포가 욕망 발현 도중에 들러붙은 체험을 하면, 그 사람은 원활한 성관계, 혹은 타인과의 성적 소통을 행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지젝이 이 대목에서 말하는 리비도적 공포는 대강 이런 설명으로 더 쉽게 풀어쓸 수 있겠으며, 헤겔과 칸트와 프로이트가 한데 묶여 화려한 변설의 도구로 쓰이는 책의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지젝의 천재성을 재확인할 수 있습니다. 

역사에 if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도 하지만 지젝은 예를 들어 p34 같은 곳에서 "급진적 마르크스주의자가 대안적 역사에 훨씬 더 진지한 헌신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 바로 밑에 남북전쟁의 리 장군 이야기가 나오기 때문에 독자가 혹 reenactment 같은 걸 떠올릴 수도 있으나 지젝은 이곳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게 아닙니다. 사실 이 진술은 당연한 게, 꼭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라 해도 좌파는 본래부터가 현실의 양태가 얻어진 최선임을 부정하고, 끝없는 if를 통해 대안을 모색하는 지적 활동을 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대안은 공부와 사색과 치열한 현실 체험을 통해 떠오른 것이라야지, 어떤 경솔한 망상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헤겔은 국가를 두고 "인륜의 최상형태"라 규정한 적이 있습니다. 이 말은 헤겔이 국가지상주의를 단언한 것으로 종종 오해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현생 인류가 애써 만들어 놓은 질서가 최대한 미치는 범위를 국가라고 지적한 것이지 터무니없이 국가 만능론을 언명한 게 아닙니다. 그래서 p100에서 지젝이 말하듯, 칸트의 세계공화국을 헤겔이 비웃듯 평가절하한 것인데 다만 칸트의 그 주장은 수백년이 흐른 후 힘들게나마 그 나름대로 현실태를 찾아가고는 있습니다. 

앞에 보면 무젤만이라는 독일어 단어가 나오는데 지젝이 이 대목에서 사용한 맥락은 역자 강수영 선생께서 해당 챕터 후주에서 밝힌 대로 과거 아우슈비츠 등의 수감자들에 대한 나치식 멸칭이 맞습니다. 그런데 이 단어의 어원은 무슬림이며, 이 단어가 현재도 사어가 되지 않고 여전히 쓰이는데 그 뜻이 원래대로 또 무슬림이며, 현대의 치열한 문명 격돌 와중에서 이제는 인문적 절실함의 한 파편을 담아 사용되니(이 책 중에서는 아니지만) 아이러니컬합니다.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끼는 바이지만 지젝은 정말 모르는 게 없습니다. 어떻게 이렇게나 많은 대상과 주제를 놓고 정연한 생각을 전개할 수 있으며, 또 어떻게 이처럼 많은 책을 읽을 수나 있었을까요? 세기말이 24년이나 지난 지금 현실은 꿈에 가까워지기는커녕 악몽만을 우리에게 선사하며, 유토피아라는 단어는 이제 냉소의 전구체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지젝 같은 진지한 사색가, 야경꾼이 있기에 인간은 비천한 동물 단계로 도로 떨어지지 않고 여전히 푸른 하늘을 두 눈에 품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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