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명작 단편소설 모음집
알퐁스 도데 지음, 김이랑 옮김, 최경락 그림 / 시간과공간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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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스무 편의 고전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누구나 평생 한 번쯤은 꼭 읽어야 할 명작들" 물론 이 중 단 한 편도 읽지 않고 한세상 마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삭막하게 살다 가기엔 생이 너무도 소중하고 아깝습니다. 문장이 쉽고 책 편집이 예뻐서 부담 없이 읽어나갈 수 있고, 특히 이런 고전 명작을 조금이라도 이른 시기에 읽어야 할 청소년들에게 알맞은 포맷이라고 생각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 둘이 책 맨처음에 나오는데 우리 모두가 적어도 그 제목만은 들어봤을 두 고전이며, 이 둘 중 한 편도 안 읽어 봤을 사람이 과연 있겠나 싶을 정도입니다. 아멜 선생님이 제대로 우리 주인공 프란츠에게 못 가르친 내용은 분사법(分詞法)인데, "법"은 빼도 되며 이 수업에서 무슈 아멜이 가르치려 했던 건 분사(participle)입니다. 과거분사, 현재분사 하는 그것... 프랑스어에는 영어와 달리 완료분사가 따로 있는데 복합과거 시제를 만드는 데 쓰입니다. 오늘 이후로 더이상 아름다운 우리말을 배울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면 그 까다로웠던 문법 시간도 마냥 소중하게만 여겨지는데 1930년대 후반 일제하에서 민족 말살 정책을 겪은 우리 민족 입장에서도 공감되는 바가 많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정철의 관동별곡 가르칠 때 고마운 줄 알고 제발 졸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별>에서 새삼 놀란 건 목동인 주인공 소년이 역사와 별자리에 대해 저렇게 해박(p29)했나 하는 점입니다. 역시 여자 잘 꼬시려면 아는 게 많아야 합니다. 

이무렵에 프로이센이 비스마르크 같은 명재상을 만나 마침내 독일 통일을 이루고 프랑스를 어지간히 피곤하게 만들어서인지 프랑스 문학 작품들 속에 그 흔적이 많이 배어납니다. 모파상의 <비계 덩어리>에도 프로이센에 대한 적개심(p93)이 수시로 드러나며 저 앞 <마지막 수업>도 알자스와 로렌을 나폴레옹 3세로부터 빼앗았던 역사적 사건이 모티브가 되었습니다. 흔한 이름이기도 하지만 모파상의 작품에는 잔(느)라는 니름의 여성이 자주 등장하는 듯합니다. 한때 그렇게도 세련되었던 마틸드이지만 긴 세월 동안 그렇게나 고생을 겪고 나니 친구가 몰라볼 만큼 늙었습니다. 이 작품에서 독자에게 결정적 충격을 주는 대목도, 어떻게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큰 피해를 본 주인공에 대한 연민입니다. 그래도 소시민으로서의 알량한 자존을 지키기 위해 10년 동안 독하게 마음 먹고 빚을 갚은 마틸드 부부가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모파상의 의도는 다른 데 있었겠지만 사실 진짜 잔인한 건(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건) 잔느입니다. 그 진실은 끝까지 밝히지 말았어야죠(물론 너무도 미안해서 그랬겠지만). 

톨스토이가 그렇게나 극찬했다는 체홉의 대표작 <귀여운 여인>이라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이 왜 그리 명작 평가를 받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결말에서 잠꼬대를 하며 곤하게 자는 사샤의 한 마디로 작품이 덜컥 끝나는 처리가 인상적이죠. 물론 리처드 기어,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그 영화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 책은 유독 사샤가 꿈 속에서의 전쟁놀이 중 기세 좋게 호통치는 대상을 "운명"이라며 해석까지 따로 넣었는데 원문에는 그런 말이 사실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새긴다면 사샤는 주인공 올렌카의 심정을 대변이나 해 주는 셈인데 그렇게나 사려깊고 조숙한 애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 책에는 투르게네프의 <밀회>, 톨스토이의 <사람은...>, 고골의 <외투> 등 러시아 작가들의 작품 셋이 더 실렸습니다. 

세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은 희곡(극시)이지만 여기서는 단편 소설로 각색되어 실렸습니다. 에드가 앨런 포의 단편이 둘 실렸는데 <검은 고양이>와 <어셔 가의 몰락>입니다. 두 편 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으스스한 걸작입니다. 전자는 이번에 다시 읽으니 1인칭 주인공 화자가 자신의 가증스러운 범죄를 감추고 합리화하려 드는 대목(p192)이 두드러진다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후자에서 로더릭 어셔가 작중에서 즉흥으로 짓는 <The haunted palace>가 또 근사한데, 치품천사로 번역되는 세라핌(p202)은 현재 한국과 세계에서 잘나가는 걸그룹 이름의 일부이기도 하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영국 작가 중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는 캐서린 맨스필드의 <가든파티>가 이 책에 실렸습니다. 

현대 단편 플롯을 최종 완성하다시피한 사람이 미국작가 오 헨리이겠으므로 그의 단편이 셋이나 이 책에 실렸는데 당연한 결과입니다. <마지막 잎새>와 <크리스마스 선물>은 뭐 모르는 이가 있을까 싶습니다. 후자는 어렸을 때 읽으며 감동도 감동이지만 정말 기발한 이야기라며 감탄했었습니다. <20년 후>는 이걸 어렸을 때 읽으면 20년이란 세월이 어느 정도인지 감이 안 와서 그러려니 했는데 지금 읽으니까 느낌이 완전히 새롭네요. 결말을 다 알고 읽어도 온몸에 전율이 돋는 명작입니다. 다른 미국 작가 중에는 호손의 <큰바위얼굴>이 실렸는데 아마 국어 교과서에서 이 작을 처음 접한 이들도 있겠습니다. 개더골드(스캐터카퍼), 올드스토니피즈는 원어 그대로인데 천둥장군(p357)만 번역어로 실렸네요(원어는 올드블러드앤썬더). 제가 피즈(phiz)라는 단어를 몰라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physiognomy(骨相學)에서 유래했다고 나옵니다. 

프랑스 작가들의 비중이 단연 높은데 후반부에도 앙드레 지드, 위고의 작품이 한 편씩 실렸습니다. 동양인 작품은 루쉰의 <고향>, 독일어 작품은 카프카의 <변신>뿐입니다. 여튼 이런 앤솔로지를 감상하는 기분은 언제나 새롭고 벅차며 영감에 가득한 듯하네요. 적절하게 곳곳에 컬러 일러스트가 들어간 점까지 너무 좋았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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