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간의 세계일주 쥘 베른 베스트 컬렉션
쥘 베른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림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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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간의 세계일주>는 "쥬울 베르느", 요즘 표기로 쓰면 쥘 베른이 지은 멋진 SF 고전입니다. 확실히, SF라는 말을 "공상과학"이라 옮기는 건 문제가 있는 게, 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보면 드러납니다. 이 작품은 유쾌하고 기발한 상상을 담은 데다, 자연지리적으로 치밀한 조사와 지식에 기반하여 창작되었지만, "공상"의 요소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필리어스 포그라는 매우 개성적인 캐릭터를 만들어낸 공적만으로도 문학사에 길이 남아 마땅합니다. 1960년대에 영국 배우 데이비드 니븐이 이 역을 맡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지금 봐도 재미있습니다. 영화 초반에, 집으로 배달되는 조간신문이 구겨진 채 배달되자 하인더러 다시 새 걸로 한 부 사오라는 명령을 내리는데 개인적으로 이 장면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이 장면은 원작 소설에는 없고, 요즘 일부 불량 제책본에서 보듯, 페이지가 아직 잘려지지 않은 채 배달된(물론 19세기 런던 타임즈에서는 의도적으로 그리한 것입니다) 신문을 포그 선생이 편지 봉투 자르는 칼로 능숙하게 자르는 그 대목이 오리지널입니다.

19세기 프랑스 소설은 다소 장광설이 늘어지는 게 하나의 공통점인데, 이 작품 초반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하인 파스파르투는 캐릭터 자체보다 더 수다스러운 전지적 화자에 의해 요란하게 소개되는데 작품의 프로타고니스트가 영국인이요, 고작 산초 판사 격의 사이드킥이 프랑스인으로 설정된 건 의외의 선택이 아닐 수 없습니다(작가가 프랑스 사람인데). 개인적으로 저는 영미식 군대에서 사병이나 하급자에게 징계를 내릴 때 체벌을 가하지 않고(물론 야만적인 수단이지만), 쫀쫀하게(?) 벌금이나 감봉 처분을 내리는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에서도 가스 잠그는 걸 잊고 집을 나온 파스파르투에게 "가스 요금은 자네가 내!"라고 하는 포그의 말이 우스웠습니다.

한편으로 이 작품은, 마치 현대 헐리우드물처럼, 이중삼중의 흥미 요소를 진행 전반에 깔아 놓은 점도 놀랍습니다. 필리어스 포그 나리께서 클럽 동료들에게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역량을 과시하기 위해 그 큰 돈을 걸고 무려 세계일주에 즉석에서 나선 것도 놀랍지만(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여장을 챙김), 공교롭게도 하필 은행에서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범인의 행방이 핫이슈였던 시점 그런 결정을 내린 통에 주변인물들은 물론 독자들마저도 필리어스 포그를 의심하게 되니 말입니다.

여기서 또 주목해 볼 것은, 프랑스 작가인 쥘 베른이 당시 영국 금융기관 내의 질서에 대해, 그야말로 도불습유, 즉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안 주워가는 놀라운 사회적 신뢰가 지배하는 분위기였음을 정당하게 평가한다는 점입니다. 필리어스 포그가 혁신 클럽(원어는 Reform Club입니다)에 가입할 수 있게 추천해 준 이들이 베어링 형제라고 나오는데, 1995년 닉 리슨이라는 신출내기 금융인의 실수로 232년의 역사를 뒤로한 채 파산해 버린 베어링스 은행이 생각나기도 하죠. 작중에서 필리어스 포그가 과연 모험에 성공할지를 두고 내기가 벌어지며 아마도 성공 시 상금을 딸 수 있는 권리가 증서화하여 시장에서 거래까지되는 모습이 또한 놀랍습니다. 심지어 현물 말고 선물(future) 상품까지 등장합니다. 런던은 이처럼 19세기에조차 파생금융시스템이 고도화했던 것입니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하는 동안, 아니 구태여 세계를 한 바퀴 다 돌게 아니라 적당히 카이로 같은 데서 놀다가, 지중해를 통해 대서양으로 빠져 유유히 귀항하면 알 게 뭐겠습니까? 그러나 거액의 판돈이 걸린 내기에서 깐깐한 영국 신사들이 그리 허술하게 일을 처리할 리 없고, 이 작품을 보면 일일이 영사관에 들러 사증(査證)을 받는 걸로 나옵니다. 이 사증 발급 여부는 작중에도 나오듯 전신(電信)상으로 런던에 타전되어 필리어스 포그가 지금 지구상의 어느 지점에 있는지까지와 함께 당사자들에게 공유되는 식입니다.  

이 작품에는 영국인의 특징적인 행태가 다채롭게 묘사되는데 p126에는 인도 갠지스 강의 아름다운 계곡을 앞에 두고서도 보려고 들지 않는다는 말이 나옵니다. 저 앞 p61을 보면 "영국인이란 관광조차 하인을 시켜 대리하는 족속"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게 뭘 개탄한다거나 경멸하는 의도가 아님은 물론 독자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p71에서는 또 이집트 홍해에 도달한 포그가 "태초의 추억을 품에 안은 이곳"을 구경하려 들지도 않았다고 서술합니다. 그런가하면 p81에서는 고양이조차도 한 명의 "여행자"로 융숭히 대접할 것을 지시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사실 이 대목은 현대 PC 관점에서라면 인종차별로 단정될 수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 또하나 흥미로운 캐릭터는 픽스 헝사인데, 마치 장발장을 집요하게 추적하는 자베르 경감처럼 주인공을 쫓아다니지만 물론 일종의 강박증 환자인 자베르와는 달리 유쾌하고 상식적입니다. 그러나 상식의 세계에 철저히 머무는 그가, 훨훨 상상의 세계를 날아다니는 포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그가 그토록 약이 올라 포그를 망치려 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상식으로 80일간의 세계일주는 완성될 수 없는 과업이어야 하며, 이를 증명하는 게 범죄자로서 포그를 법정에 세우는 것보다 사실은 더 중요한 동기였던 거죠.

p163을 보면 쥘 베른의 놀라운 과학 상식, 또 항해공학적 지식이 잘 드러납니다. 대체 이런 건 어디서 참조해서 소설에 끼워넣었을지 경이롭기만 합니다. 이런 대목들 때문에 이 소설은 그저 픽션이 아니라 독자들을 상대로 "80일간의 세계일주" 정말로 가능하다, 운에 기대지 않아도 된다는, 바로 작가 자신의 웅변을 매뉴얼처럼 증명하는 하나의 시방서가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p367의 루주3에 보면 바이런 경을 설명하며 "장애자"였다고 하는 대목이 있는데 김석희씨가 연로한 분이라서 별 생각 없이 이런 단어를 쓴 듯합니다만 편집측에서라도 교정했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이 작품은 또한 마지막의 반전으로도 유명한데 그 반전장치 또한 자연지리적 원리에 의한 것이라서 독자는 전율마저 느끼게 됩니다. 다른 하나의 반전이 있다면 정말 재수없는 이지적, 이기적 신사인 필리어스 포그가 드디어 사랑에 눈을 뜨게 해주는 여성과 잘된다는 로맨틱한 결말이겠습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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