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자의 나성 - 윤흥길 대표중단편선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7
윤흥길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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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작품에서 만약 로스앤젤레스, LA를 "나성"으로 표기한다면 그에는 아마 무슨 특별한 의도나 사정이 있겠거니 독자가 짐작하는 게 보통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발표될 무렵(이 책이 출간된 시점이 아니라)에는 저런 표기가 보통이었으므로 그냥 독일(도이칠란트), 호주(오스트레일리아) 같은 느낌으로 받아들이면 충분합니다. 윤흥길씨는 새삼 소개가 필요 없는, 중고교 교과서에도 작품이 소개되는 작가입니다. 


1970년대라면 한국에도 많은 회사가 들어서서 사무직 직원을 뽑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아들을 대학 보낸 부모들이라면 이런 버젓한 회사에 취업하여 자신들처럼 고생을 하지 않고 더 우아한 일을 하며 돈을 벌 것을 기대했겠습니다. 소설에 묘사된 대로라면 이 무렵부터 벌써 사내 정치가 만연하여 승진을 둘러싸고 치열한 줄서기, 모략, 음모가 판을 치며, 마치 몇 년 전 간부급 검사들(그 중 한 분은 장관이 된) 사이에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한 놀라운 일이 있었듯 이 소설 속에도 명색이 화이트칼라(당시로서는 선망의 대상이었을)끼리 아주 한심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 역시 모두 시대상 단면들을 보여 줍니다. 


그 와중에도 주인공은, 어렵사리 회사에 들어가서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 고뇌를 합니다. 자신을 좋다고 따라다니는 젊은 여성도 있지만 무슨 생각인지 쉽게 마음을 주지 않습니다. 이런 주인공을 자기 라인으로 끌어들이려는 과장도 있고, 그 과장이 타깃으로 삼는 부장도 있어서 막후의 싸움이 본연의 업무보다 더 불꽃튀깁니다. 이 와중에 부장은 그나마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한눈팔지 않고 업무에만 전념하지만 다른 사원들은 그런 제스처 하나도 다 자신에게 유리할 대로만 왜곡합니다. 눈치싸움에 열심이라고 다 똑똑하게 구는 건 아니라서 외부에서 보면 저 인간들이 왜 저러나 싶게 삽질과 헛다리의 연속입니다. 


스트레스를 풀려면 근처 다방에 가서 마담이나 종업원들과 수다도 떨고 커피 한 잔에 담배 한 대(실내 흡연은 거의 필수)가 화이트칼라의 낭만입니다. 이 여자들도 다 시골에서 올라온 처지들인데 따지고 보면 영혼을 팔고 마음에도 없는 아부를 하는 사무직이라는 게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여성들이나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물장사 자리 장사라서 테이블을 오래 차지하고 게다가 커피 한 잔도 안 사며 죽치고 앉은 영감님이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는데 처음에는 전화 한 통화 쓰자는 영감님한테 친절했으나 두번째부터는 온갖 눈치를 다 줍니다.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쫓아내다시피하는데 무슨 생각인지 주인공은 "점잖아 보이는" 영감님한테 그러지 말라며 역성을 들기까지 합니다. 고향에 있는 부친이 생각나서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결국 "꿈꾸는 자"는 그 영감님이고, 이 꿈꾸는 자를 동정하는 게 바로 주인공입니다. "나성"은 한때 희망을 걸었건만 결국 아무 소식도 없는 어떤 지향점을 상징합니다. 지금이야 특별한 다른 목적이 없다면 미국 이민을희망하는 사람이 많지 않지만 1960년대에는 아메리칸 드림을 가진 이가 많았죠. 이 작품에도 그런 지난 시대의 흔적이 묻어나며, 영감님은 마침내 국제전화 걸기를 포기하고 발길을 버스터미널로 돌리는데 그 허탈한 웃음을 보니 아마 자살을 염두에 두는 것도 같습니다. 


이 단편은 TV 단막극으로도 만들어졌는데 영감님 역에 2개월 전(2022. 5) 지병으로 타계한 이일웅씨, 주인공에 <태조 왕건>에서 백두산 도인 역으로 나와 의도치 않게 큰 웃음을 준 강태기씨, 혼자서 검소하게 살다 엉뚱한 오해를 받은 소심한 회사원 역에 백윤식씨, 도시적인 미인 역으로 자주 나온 권기선씨, 음모를 꾸미는 못된 과장 역에 민욱씨(항상 그런 역만), 무덤덤한 부장 역에 문오장씨, 몇십 년 뒤 <사랑과 전쟁>에서 미친 시어머니 역으로 단골 출연한 젊었던 곽정희씨 등이 나와 볼거리를 선사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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