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 윌리엄 제임스의 운명과 믿음, 자유에 대한 특별한 강의
윌리엄 제임스 지음, 박윤정 옮김 / 오엘북스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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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 뒤르껨은 "인간에게 주어진 완전한 자유는 바로 자살에의 선택"이라고 했습니다. 극단적인 언명이지만 사실 알고보면 식욕, 성욕, 명예욕이나 자아실현 욕구 같은 것도 순수한 나의 것은 아닙니다. 속한 사회나 준거집단이나 가족, 친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들 역시 자아상이나 정체성이나 자신의 욕구 같은 걸 어디서 모방했을 것입니다. 한편 식욕 등의 원초적 욕구는 그저 생체 작용의 유지를 위해 주기적으로 발동되는 것일 뿐 나의 인격 등과는 무관합니다. 이처럼 알고 보니 우리 자신의 것도 아니고 그저 비천한 생리작용의 결과물이거나 주입된 착각의 산물이라면 생이 과연 살 가치가 있는 것일지 의문이 들 만합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두고 "이렇게 가난하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하거나, 반대로 생산활동에 참여 않는 기생분자 입장에서 어떤 가난한 사람을 가리켜 "저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면, 이 둘은 똑같은 이유에서 더 이상 살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봐도 됩니다. 본인은 어리석어서 모르겠지만 후자 역시 자신이 잉여인간임을 자인하는 꼴이지요. 이들에게는 저 질문에 대한 답이 (그나마) 명쾌해서 좋겠습니다만 이들보다 복잡하고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생각을 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위의 저 질문은 좀처럼 답이 안 나오는 난제입니다. 19세기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짧지만 짧지 않은 이 고전에서 편 논변은 아마도 독자가 자신만의 답을 찾는 데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보면 중세 가톨릭이 어떤 이단(그들 입장에서)을 얼마나 잔혹한 방식으로 탄압하고 절멸하려 들었는지 잘 나옵니다. "죽여라. 하느님은 당신의 백성을 알아 보신다." 이 책 p40 이하에는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발도파를 말살하려 든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다소 뜬금없이 저자가 발도파 이야기를 꺼낸 건, 저들이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강력한 압제 세력 앞에서 어떻게 자존과 자유를 지키려 애썼는지의 과정을 돌아봄으로써, (그들이 의도했든 아니든) 생이 거의 언제나 살 가치가 있는 것임을 증명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 이들이 오히려 삶의 가치를 증명했다는 게 역설이긴 하지만 그 결론에는 정상적인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되죠. "저렇게 살 바엔 죽는 게 낫다" 같은, 가장 비천한 인생관을 거꾸로 프라이드 삼아 떠드는 인간(물론 이런 인간들이 실제로 곤경에 몰리면 죽을 용기도 없습니다 ㅋ)은 예외로 치고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순신 장군의 "생즉필사 사즉필생"이란 담백한 경구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실제로 당사자가 어떤 삶을 산 분인지를 알면 더 소름끼치는 명언이기도 합니다. 


정통 영국인의 가치관을 강하게 상속한 저자답게 책 곳곳에서, 어리석은 대륙의 미신과 고집, 인습 등과, 각성하고 깨어 있는 영국식 성품을 대조시켜 부각하려는 습관도 드러납니다. 사실 그가 집필 무렵에 참조한(혹은 소일삼아 읽은) 여러 책들은 지금 사학의 관점에서는 많은 오류를 노정했음도 드러나지만 여튼 저자의 좋은 의도(혹은 좋게 이해할 수 있는 취지)가 무엇인지는 우리 독자들이 잘 알아 들을 수 있습니다. 또 영국인들이 저런 발도파의 후예, 혹은 한참 후에 각처에서 추방당한 혁명가 등을 잘 받아들여 최소한의 존엄을 유지하게 도운 건 그 특유의 관용의 정신이라며 얼마든지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제임스의 시대는 또한 미국이 국제 무대를 향해 서서히 발언권을 높일 무렵이므로 책에는 그를 반영한 기술도 있습니다. 영구 먼로주의(고립주의)도 언급되며, p74에는 아서 밸푸어의 이름도 나오는데 책 후주의 설명처럼 이 사람은 영국의 수상이었으며 우리가 잘 아는 밸푸어 선언의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p72에는 올더스 헉슬리의 이름도 나오는데 물론 우리가 잘 아는 <멋진 신세계>의 작가이죠. p111에는 결정론에 대해 약한 결정론/ 강한 결정론의 이대별을 설명하는데 아마 이 무렵에 시도된 구분인가 봅니다. 당시 미국의 표준적 지성인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보면 많은 시사점이 발견됩니다. 


개념은 독일어로 Begriff라 하는데 "사유를 통해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데에 한계가 있음"을 지적하기 위해 칸트가 이에 Grenz를 붙여 한계개념을 만들어낸 것이라고 후주 17번(p163)에 나옵니다. 참고로 이 책의 후주는 원주도 있고 역주도 있는데 역주 역시 내용이 대단히 알찹니다. 윌리엄 제임스뿐 아니라 모든 위대한 저자들의 책에서 원주는 그 역시 본문 내용의 일부이므로 반드시 읽어야 하죠. p166의 후주 11번에 원주로서 자유의지에 대한 짧으면서도 강력한 논의가 있는데 윌리엄 제임스의 신학적 입장을 단적으로 잘 드러냅니다. 윌리엄 제임스는 물론 신교측 입장에 훨씬 가깝지만 역주에서는 예컨대 "루카 복음" 등 신구교에 두루 통할 표기를 씁니다. 한국에서는 허버트 스펜서를 무조건 나쁘게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갤브레이스 시니어의 <불확실성의 시대> 같은 책이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펜서 본인은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반대한 사람이며 윌리엄 제임스는 이 책 여러 곳에서 그를 우호적으로 원용합니다. 


"삶을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 그러면 그 믿음이 삶의 가치를 창조하게 도와 줄 것이다(p60)." 그리고 같은 페이지에서 앙리 4세의 말도 인용되는데 그 역시 편협한 기존 왕실(이 작자는 프랑스 혈통도 아니고 타국에서 시집온 주제에 미친 광신을 고집했죠. 가장 비인도적인 방식으로 과거 회귀를 추구한 악질 반동을 놓고 자칭 진보주의자가 이런 류를 존경한다는 건 코미디 중의 코미디입니다)의 전통을 깨고 자국 영토 안의 모든 백성 모든 신앙을 감싸안으려 든, 진정한 진보주의자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무엇을 가져다주든, 삶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p42)." 인생은 본디 고통과 부조리, 뷸평등, 불운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고 이런 악덕을 당연하게만 여기고 아무 저항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것이지 삶을 살아낸다고 볼 수 없습니다. 악조건이 있다면 이를 극복하고 제거하는 과정이 또한 당사자의 인격과 자존에 플러스 팩터를 쌓으며, 그저 호조건 속에서만 사는 사람이 아무 적립도 하지 않고 사는 것보다는 훨씬 가치 있습니다(그러니 이미 이런 사람한테는 호조건이 더 이상 호조건이 아니죠). 물론 호조건을 타고난 사람은 생계 걱정 않고 자신만의 관심사에 몰두하며 얼마든지 조건을 잘 살려 의미있고 자긍심을 높이는 성과를 쌓을 수 있으니 이 또한 좋은 것입니다. 


"우리의 반지성적 본성은 분명히 우리의 확신에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p76)." 어리석고 무지한 자일수록 자연과학이 증명하는 진리를 외면하는 경향이 있으며, 사회과학의 몇 가지 도그마 중에서도 극히 편협한 몇몇을 가려 무지몽매한 미신을 믿듯 절대화하기도 합니다. 애초에 그게 무엇이든 절대로 맞다며 확신할 수도 없고 이런 걸 타인에게 강요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의 견해를 마치 재해석이나 수정이 불가능한 것처럼 고집하는 건 대단히 잘못된 테도이다.(p81)"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을 보면 지혜와 공부가 부족하고 멍청한 인간일수록 무엇 하나를 절대 무오류의 진리인 양 숭배하며 고집하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예 개인 숭배(cult of personality)에 빠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우주는 단순한 그것(it)이 아니라 그대(thou)가 된다(p99)." 저자는 물론 반지성주의를 배격하지만 동시에 종교가 여전히 진리에 대한 통로를 열어 준다고 여겨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현대 독자 사이에 찬반이 갈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도킨스 같은 사람은... ㅎㅎ 그러나 도킨스 역시 두 세기 전의 이 윌리엄 제임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격렬하게 호오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적정 수준의 회의주의를 드러내면서도 너무 나간(?) 회의주의를 경계하는 저자의 스탠스에서 독자는 중용의 미덕을 캐치할 수도 있습니다. 저 위의 인용구는 마치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아리아 "투나잇"에서 "And here you are and what was just an address is a star"라는 유명한 가사가 떠오르기도 합니다. 


p79를 보면 ad(a)equatio intellectûs nostri cum rê라는 라틴어 구절이 나옵니다. 사실 프랑스어도 아니고 û라는 건 라틴어에 없으므로 intellectūs가 맞겠으며, 이것은 intellectus의 단수 2격(속격)입니다. nostri도 자신이 꾸미는 명사를 그대로 따라가므로 역시 단수 속격입니다. 인터넷에 보면 이걸 corformity of our minds to the fact라고 영어로 옮겼는데 intellectūs는 1) 단수 남성 속격 혹은 2) 복수 주격이 있으나 의미상 이걸 2) 복수 주격으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새기면 앞의 ad(a)equatio가 허공에 붕 떠버리는 셈이지요. 또 rê를 rê로 보면, 이것은 단수 탈격형태 뿐입니다. res가 intellectus와 단복 여부가 같아야 하므로 이런 이유에서도 intellectûs는 단수로 새겨야 하겠습니다. 사실 영어 번역 맥락에서 보아도 our minds가 아니라 our mind가 옳죠. 인류가 공유하는 정신이란 의미이므로(각각의 정신들이 아니라). 


"오 우주여 그대 자신을 보라 그대는 나빠지는 게 아니라 더 좋아지고 있다(p146)." 이 시구(詩句)는 저자 윌리엄 제임스 자신의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의무는 그것대로 끝내고 나머지는 더 고차원적인 권능에 맡기자는 저자의 제안은 확실히 우리의 삶을 더 경건하게 만드는 느낌을 줍니다. 마치 동양의 경구 진인사대천명이 생각나기도 하고 말입니다. 이 책에는 <삶은...> 외에도 <믿으려는 의지>, <결정론의 딜레마> 등 기독교적 인사이트가 가득 담긴 두 편의 글이 더 실려 있습니다. 이 세 권 모두 윌리엄 제임스의 평판과 문명 그 자체와 동일하게 여겨지는 걸작들이며 그 가치는 독자가 읽어 보고 바로 확인할 수 있죠.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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