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인간 -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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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고 했을 때 "생각"이란 곧 의심을 뜻했다고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저 당연하게 여기지 말고, 왜 그럴까? 혹시 저 말이 틀린 건 아닐까? 하고 의심해 보는 가운데 각성도 일어나고 새로운 진리의 발견도 가능해집니다. 저자는 p11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 역시 무지의 자각 그 중요성을 일갈한 언명이라고 독자에게 가르칩니다. 책에서는 서양 철학자들의 다양한 업적을 회고하면서 이 가운데 "의심(회의주의)"이라는 키워드가 관통하는 현대성의 본질이 무엇인지 쉽고 친절하게 되짚습니다. 


"그리스어 doxa는 '믿음, 의견, 억견' 등으로 번역된다. 그 뿌리는 '보인다'라는 뜻을 가진 dokein이라는 동사이다.(p29)" 이처럼 고전을 공부할 때는 그리스어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필수인 듯합니다. 이 중 억견이라는 말은, 한자어의 "억"이 억지를 쓴다고 할 때의 그 抑입니다. 회의주의의 먼 근원은 모든 믿음은 억견일 수 있다는 태도인데, 무엇을 철석같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 사람들은 곧 억견을 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이 종교이든 정치이든 연예인에 대한 열광이든 간에 "절대적으로 맞는 것"은 있기 힘듭니다. 오류일 가능성이 다분한데도 마냥 유지하려 드는 믿음은 그게 곧 억견인 것입니다. 모든 믿음이 억견일 수 있다는 생각은 곧 세련된 회의주의 스탠스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특정 진영을 무작정 믿는 사람보다, 시쳇말로 "중립기어 박고 보는 사람"이 더 멋있어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지 싶습니다.


이에 대비되는 태도는 "독단주의자"입니다. 이들의 논변도 참 설득력 있는 게, 회의주의자들처럼 이건지 저건지 장담 못한다며 매번 팔짱만 끼고 있으면 어떤 행동도 안 이뤄진다는 거죠. 이런 행위불가의 상태를 "아프락시아"라고 부른다고 합니다(p29). 영어의 practice 같은 단어의 어원도 저 단어와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의심은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의심이란, 언젠가 완전한 앎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잠정적으로 거치는 단계이며 언젠가는 극복이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완전한 인식에 도달하기 어렵고 아마도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지간히 많이 아는 단계까지 이르렀어도 의심, 건설적인 회의는 아예 상비적인 태도, 방법론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윤리 시간에 열심히 배운 데카르트의 태도를 놓고 언제나 강조되는 포인트가 그의 회의는 방법론적 회의라는 점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방법론적 회의가 아니라, 회의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철학적 입장도 따로 있다는 소리입니다. "표상들의 불일치성, 그로 인한 자아의 혼란은 제거되어야 할 부정적인 것으로 다가왔다(p31)" 이게 방법론적 회의입니다. 우발적이고 과도기적인 상태 그 이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회의 그 자체에 큰 의의를 두었던 고대 회의주의자들의 생각은 달랐다고 저자는 지적합니다. 우리는 중등 교과서에서 소피스트들을 너무 부정적으로 보았고, 소크라테스나 이후 서양의 주류 철학자들이 이들 소피스트들을 철저히 배격하고 극복하는 일련의 행보가 근대성의 확립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회의주의는 불확실성이 점차 증가하고 복잡계를 직면하여 더욱 유연해져야 하는 우리의 사고, 도전받는 원칙의 시대에 오히려 새롭게 하나의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완전한 하나의 진리에 복종해야 오히려 마음의 평화가 생길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 진리는 현실에서 부단히, 온갖 예외에 맞부딪혀 체면과 위신을 전혀 지키질 못합니다. 그런 불완전한 걸 진리랍시고 받들고 있으니 마음에 평화가 생길 날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아카데미 회의주의이건 피론 학파건 간에, "판단유보, 파악 불가능성"을 공통으로 지향했으며(p34), "마음의 평안"에 대한 지향이 두 학파의 공통점이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독자인 저 개인적 생각으로, 야구 경기를 볼 때에도 처음 입문할 때는 응원팀을 하나 만들어야 흥미가 생기지만, 계속 보다 보면 아예 응원팀 없이 경기 자체를 즐기는 편이 훨씬 마음이 홀가분한 것과 이치가 통할 것도 같습니다. 이런 게 철학으로 치면 회의주의겠죠(이기는 편 우리편). 


"피론은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항상 '마음의 평안'을 강조했던 현자와 같은 인물이었다.(p113)" 책에 따르면 피론은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할 줄 아는 성품이었고, 이에 반해 그의 스승이었던 아낙사르코스는 성품이 거칠어 제자인 피론의 그런 장점을 언제나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에 참여했고, 도중에 인도의 나체 철학자들을 만났다고 책에 나옵니다. 원어는 gumnosophistai라고 역시 책에 나오는데, "나체"라는 gumno- 어근은 영어의 gymnastic이라든가 독일어의 학교 김나지움 등과 다 공통이죠. 아마도 나체 수행을 중시했던, 마하비라 바르다마나가 창시한 자이나 교 승려들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전은 오늘날에는 사어로 취급받는 언어로 쓰인 것도 있고, 고전 헬라어라고 하면 현대 그리스인들이 쓰는 언어와는 크게 다릅니다. 그래서 해석의 과정이 필요한데, 많은 해석 입장 중 "인식론적(주관적) 입장"은 사람에게 원래 사물의 본성을 파악하는 능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았다고 합니다(p127). 재미있는 건 이 책에도 나오는, 예컨대 dia tutto 같은 부분을 dia to로 바꾸어 해석하는, 즉 원문에 일종의 오기가 발생했다고 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E 젤러(에두아르트 첼러) 같은 학자입니다. 원문을 수정해가면서까지 더 잘 통하는 해석을 추구하는 입장은 철학 외에도 여러 분야에 있습니다. 


동양철학에서도 명가(名家) 같은 학파가 있어서 공손룡 같은 이가 발전을 시키기도 했습니다. 서양 철학에서 가장 빛나는 파트가 논리학, 논변술 같은 걸 이론적으로 아주 정밀하게 마련한 것입니다. p143에는 아이네시데모스의 열 가지 논증방식이 나오는데 이는 긍정의 논증과 부정의 논증이 동시에 성립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존재의 대상이건 사유의 대상이건 간에, 등치 또는 양립의 구조라는 건, 결국 모든 주제에 대한 판단이 "유보"되어야 함을 결국 암시합니다. 저자는 피론의 회의적 방법론을 최초로 체계화한 게 바로 이 아이네시데모스라고 합니다. 


이어 피론주의의 집대성자로 평가되는 섹스투스에 대한 설명이 나옵니다. 그에 의하면 이 회의주의에 대한 핵심 개념은 대립, 판단유보, 마음의 평안이라고 합니다. 대립과 판단유보 같은 기술적 개념이, 마음의 평안 같은 가치적, 도덕적 개념과 나란히 놓인다는 게 정말 흥미롭습니다. 섹스투스의 평가 중 또 흥미로운 건, 같은 회의주의 계보인 아카데미파의 아르케실라오스를 두고 "(회의주의와 대척에 서 있는) 독단주의자"로 규정한 것입니다. 이런 태도는 아카데미파를 플라톤 진영으로 거의 몰아넣는 것입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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