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스트 (초판본 리커버 고급 벨벳 양장본) 코너스톤 초판본 리커버
알베르 카뮈 지음, 이주영 옮김, 변광배 감수 / 코너스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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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비드19 때문에 지난 2년 동안 많은 이들이 고생했으며 아직도 완전 종식이 되지 않아 확진자, 사망자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고전 <페스트>는 오랑이라는 가상의 도시, 그것도 북아프리카가 아닌 프랑스 본토 남부 해안의 한 지점을 배경으로 삼아 당시만 해도 치명적 질병이었을 페스트로 인한 봉쇄와 고통, 갈등과 극복의 과정을 다룹니다. 페스트는 (가상의, 혹은 일반적인) 권위주의 체제가 내린 계엄령의 은유라는 해석도 있었고 지금 이 책 변광배 교수님 해제에 의하면 파시즘, 나치즘 등의 억압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또 이 소설에서 시민들이 질병과 투쟁하며 이를 극복하는 과정은 "부조리"에 대해 "반항"하는 시민들의 의지와 행동, 혹은 의무를 상징하며 이것이야말로 알베르 카뮈 문학의 본령이라는 지적이 역시 책 말미의 해제에 나옵니다. 


"그러나 리샤르는 자신에게는 그만한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다(p44)." 마치 영화 <죠스>에서 마틴 브로디 서장이 해변을 폐쇄해야 하느냐 아니면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현존하는 위험을 묵살하느냐의 갈등을 하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이 소설은 체제의 모순에 대해 시민의 양심으로 저항하는 당위를 거대한 은유로 표현했다는 해석이 지배적이지만, 이처럼 마치 재난영화를 보는 듯한 스릴과 서스펜스도 독자가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페스트는 치명률도 높지만 증상이 끔찍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이 소설에서 독자들의 공포감을 자아내는 건 그 구체적인 초기, 말기 증상들입니다. 전문가들이 내어놓는 진단도 생생합니다. "사흘 만에 비장의 크기를 네 배로 부풀리고 장간막의 임파선을 오렌지처럼 물컹하게 만든다면...(p67)" 이 장면에서 리외는 사태의 심각한 면(부정적인 면)에 더 주목해야 한다는 쪽이고, 리샤르는 그 반대입니다. "질문이 틀렸습니다. 어휘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 문제입니다." 즉 페스트다 아니다 판정을 내리는 단계는 이미 지났고, 이제 어느 정도 문제가 심각한지 전염병 만연이 어느 정도 임박했는지가 문제라는 겁니다. 


"전염병이 저절로 멈추지 않는 한, 당국이 생각한 조치들로는 다스릴 수 없을 것이다(p81)." "해도 너무해요! 높은 사람들 말입니다." 고위층과 행정 당국의 무능, 무책임, 무신경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건 언제나 기층 민중입니다. 평소 고압적이고 오만한 그들의 태도를 묵묵히 참아 온 건, 바로 이런 공동체 전체의 재난이라도 닥칠 시 그들이 최소한의 권능을 발휘해 줄 것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막상 일이 터지고 보니, 특권층의 판단과 행동은 그저 갈팡질팡이며 아무런 대비책을 마련해 둔 것 같지 않습니다. 


한국도 동란 중에 이산가족이 대폭 늘어났고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생존을 도모하는 모습이 눈물겹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그저 잠시의 이별이겠구나(p91)" 했던 이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만나지도 못하고 ... 말그대로 생이별을 하고 말았다"는 묘사가 나옵니다. 페스트의 만연은 말그대로 전쟁과 같습니다. 일상, 평온, 희망을 모조리 파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를 갈라 놓습니다. "사람들은... 유배 생활이 삶을 통째로 위협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p132)." 


처음부터 사태의 진행에 대해 비관적이었고 결과적으로 맞는 관측을 한 리외는 "머지않아 이 도시에는 미친 사람만 남을 겁니다(p133)."라며 다시 한 번 비관적인 예언을 합니다. "모든 예언마다 공통점이 있었으니 결국에는 사람들을 안심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페스트만은 그렇지 않았다(p289)" p251에는 "리외가 매일 주는 건 구원이 아니라 정보뿐이었으며 그것은 인간의 직업이라고 할 수 없었다"는 문장이 있는데 이건 저널리스트이기도 했던 카뮈 자신에 대한 셀프디스로도 읽힙니다. p392에는 아예 "이 연대기의 서술자가 리외 자신이라는 걸 고백"하는 대목도 있습니다. 


무신론자였던 카뮈가 창작한 세계 안에서 성직자가 어떤 역할을 맡는지 살펴 보는 건 언제나 재미있습니다. p133에서도 설교(강론?)하는 신부가 잠시 나왔고, p167에서 등장인물들은 파늘루 신부에 대해 토론합니다. "신을 믿지 않는다면서 왜 그리 헌신적입니까?" 타루의 질문입니다. 그는 핵심을 단단히 잘못 짚고 있으며, 헌신과 신앙 사이에 서로 본질적인 연관은 없습니다. 오히려 신이 없다면 사람의 일을 스스로 살펴야 하므로 맡은 바에 몇 배의 헌신이 투입되어야 합니다. 신의 일을 대신하는 셈이겠으니 말입니다. 더군다나 의사의 소명이 아닙니까. 


"파늘루 신부가 (그의) 설교보다 더 나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니 기쁩니다.(p199)" 설교만 번지르르하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수준을 면했다는 게 아니고, 설교도 좋지만 그의 행동은 더 좋다는 뜻입니다. 무신론과 종교가 공동의 재난을 극복하기 위해 잠시 동맹을 맺는 셈입니다. 뒤에 자리한 잔다르크의 동상과 투구가 햇볕에 빛나는 장면도 의미심장합니다. 설교에 대해서는 p287 이하에 아주 자세한 장면이 있습니다. 


게오르규 신부의 장편 <25시>를 보면 아무리 끔찍한 비극이 심화되어도 이것이 종식될 기미가 안 보이며 오히려 밤이 더 깊어지는 절망의 시간이 펼쳐집니다. p212에 보면 타루가 항베르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일이 안 풀립니까?" "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서요." "두 분 모두, 페스트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특징이라는 점을 이해 못 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연대를 통해 그 돌파구를 찾습니다. "이 도시를 떠날 방법을 찾을 때까지 함께 일하게 해 주시겠습니까?"(p217)


"뒤틀린 알몸의 시신들이 거의 나란히 붙어 구덩이 밑바닥에 떨어지고(p231)... 페스트로 경제 생활이 전부 마비되어 대량의 실업자가 생겨났다(p232).... 그 시기부터는 사람들에게 공포보다는 빈곤함이 더 절실한 문제임이 명확해졌다." 카뮈는 북아프리카 식민지에서, 이런 페스트 팬데믹까지는 아니라도 여러 비상사태를 겪어 본 덕인지 평온이 깨어지고 위기에 대처하는, 혹은 시달리는(stricken) 도시 거주자들의 모습을 다큐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한편으로 그는 "옛날 이야기에 나오는 것처럼 용기를 키워주는 영웅이나... 대단한 구경거리를 소개할 것이 하나도 없어서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또 특유의 냉소를 띄웁니다. 카뮈의 소설은 헐리웃 흥행물이 아님을 우리 독자들도 분명히 깨닫게 하는 대목입니다. 영웅과 미덕은 애초에 없고, 잔인한 부조리에 맞서는 원초적인 반항의 본능이 영웅을 대신하고 이게 바로 카뮈의 세계입니다. "이후의 밤은 투쟁의 밤이 아니라 침묵의 밤이었다(p375)." 본성인 반항에도 한계가 있는 법입니다. 


어려움을 특히 심하게 겪는 건 언제나 아이들입니다. p280 이하에는 혈청 실험이라든가 정규 패턴의 감염으로 빈사지경에 놓인 아이들의 고통이 적나라하게 묘사됩니다. "하느님, 이 어린아이를 구해 주소서." 전해지지 않을 것이 뻔한 소망도 이런 절체절명의 시각에는 어느 무신론자의 입에서도 나올 것이 당연합니다. "페스트균은 절대로 죽지 않고 살아남아...(p402)" 본성이 부조리한 인간 사회에 재앙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며 인간의 반항과 몸부림 역시 마찬가지로 결코 죽지 않는다는 점을 연대기의 마지막은 씁쓸히 증언합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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