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이야기 창비세계문학 53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석영중 옮김 / 창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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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책프 13기 33주차에 박형규 교수 번역본 <체호프 단편선>을 리뷰한 적 있습니다. 아직 그 독후감이 책좋사에 남아 있습니다만 네이버 카페 플랫폼 개편 때문에 책의 서지사항이 지워져서 보이질 않네요. 제 기억이 맞다면 학원사 刊 한권의책 시리즈 중에 포함된 책이고, 전 아직도 문장의 아름다움이나 번역의 정확성 면에서 그 책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개인적인 평가입니다. 


2016. 8. 21에 남긴 그 독후감에는 묘하게도 <지루한 이야기>에 대한 소감이 빠져 있는데 4년 정도가 지난 지금 다른 역본을 읽고 나서 이 독후감 속에 이런저런 느낌을 털어 놓을 수 있어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지루한 이야기>는 어쩌면 제목 그대로, 체호프의 다른 단편이 보여 주는 교과서적 깔끔한 형식미와 미학적 충격과는 전혀 관계 없어 보이는, 그렇다고 체호프 자신의 자전적 회고로도 보이지 않는, 어느 노교수를 1인칭 작중 화자로 삼아 펼쳐지는 "지루한 이야기"입니다.


노교수는 젊어서 명철한 지성을 자랑하던, 인품도 빠질 데 없는 명사였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심사가 꼬여가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이 대목은 호주의 소설가 콜린 매컬로의 <로마의 1인자> 1부에서 가이우스 마리우스가 뇌에 이상이 생긴 후 성격이 괴팍히 변해 가는 과정과도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두 거인 모두 한때는 자신에게 타인에게나 공명정대하기 이를 데 없는 잣대를 유지할 줄 알던, 수양의 정점에 달한 사람들이었기에 더욱 안타까울 뿐이죠.


"선생님께서는 요즘 무섭게 늙으셨습니다."


무섭게라는 부사가, 늙은 모습이 무섭다는 뜻인지, 아니면 노화의 속도가 급작스럽다는 뜻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둘 다일 수도 있겠죠. 교수는 특히, 자신의 마음에 차지 않는 후배, 사위 등을 신랄하게 비꼬고 조롱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지 못하는데, 그의 슈퍼에고는 이런 1차원적 반응에 대해 준엄한 꾸짖음을 내립니다. 중편에 가까운 긴 분량 속에서, 우리들 일상인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예외적인 캐릭터의 잔잔한 내면 속 전쟁을 다룬 이 소설은 현대의 관점에서도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기에 더욱 흥미롭습니다.


<검은 옷의 수도사>는 아마도 니콜라이 고골의 영향을 짙게 받았음직한 신비적 분위기가 두드러지며,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은 한국에서 안 읽은 독자가 거의 없을 법한 명단편입니다. 석영중 교수의 이 새로운 번역으로 즐기는 맛이 또 별미였다고나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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