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 - 박진숙 드라마 걸작선 1
박진숙 지음 / 청동거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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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라면 주부들도 더 이상 가사일에만 매몰되지 않고 문화센터라든가 수영장, 헬스클럽(당시 명칭), 심지어 단식원 등을 자주 드나들며 풍요로운 도시의 삶을 즐겨 갈 때이겠습니다. 혹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들처럼, 괜찮은(혹은 괜찮다고 생각한) 부업을 찾아 몰두하다 재미를 보거나, 혹은 낭패를 보기도 하는 식의, 전에 없던 시대상이 막 등장할 무렵 아니었겠나 추측됩니다. 


주인공 여성은 평범한 회사원을 남편으로, 말 안 듣는 초등학생을 아들로 둔 주부입니다. 젊었을 때는 이런저런 근사한 꿈을 꾸었겠으나 현재는 반복적인 일상에 찌들어 눈빛도 멍해지고 미모도 시들어 가는 중이며, 안타깝게도 그렇게 초라해지는 자신에 대해서조차 무감각한 판입니다. 이런 그녀에게 어느날 오랜 동안 연락이 끊겼던 친구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화려하게 인생을 즐기는 자신의 모습을 과시합니다. 차려입은 의상도 그렇고 몰고다니는 차도 그렇고 주인공의 처지와는 몹시 대조가 됩니다. 삶이 갑자기 공허해짐을 느낀 주인공은 친구의 권유를 받아 다단계 판매 조직에 몸을 들여 놓으며 판매대상은 책입니다. 요즘 같으면 정수기, 화장품 등이겠으나 저 당시에는 아동전집류가 이 판에서 핫했던 것 같습니다. 


왜 하필 저 여성이 주인공을 네트웍에 끌어들이려 했을까. 처음에는 주인공의 외모가 그럴싸했기에(최근에 안 꾸며서 망가지긴 했지만) 이런 잠재력을 잘 살리려는 의도 아니었겠나 싶지만 나중에 알고보니 신규회원 가입 수당, 가점 같은 게 따로 있었고 그저 승급을 위한 수단에 더 가까웠습니다. 여튼 등급 상승과 부수입 올리는 재미에 빠져 처음 몇 달은 정말 열성적으로 임합니다. 어차피 인맥 중심의 판로 개척이란 지속가능성에 한계가 빤했으며 다만 열정이라는 게 원래 없던 재능도 간혹 싹틔우게는 하는지 초장의 실적이 참 좋았습니다. 힘이 들어 잠시 집에서 쉴라지면 "실장님"에게서 바로 독촉전화가 옵니다.


"이러고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집으로 거는 전화에는 연락이 안 되어야 맞는 건데(당시에는 이동전화가 없었으니). 필드로 나가서 뛰십시오. 어서!"


"필드"라고 하면 당시에도 언뜻 연상되는 게 골프장이었나 봅니다. "실장님"은 주부들에게 자아실현을 하고 그에 알맞은 수입을 거둬 가라며 능수능란하게 부추기고 그녀들이 물건을 팔아야 할 시장, 타인들의 가정을 "필드"라 칭합니다. 여튼 이 표현은 멋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네트워크의 본질은 약탈적인 다단계 조직에 지나지 않지만 말입니다. 좁은 방구석에서 당신의 시간과 정력을 썩히지 말고 필드로 나가서 뛰어라! 말 자체는 여튼 맞는 말입니다. 


이 작품은 KBS에서 단막극으로 극화된 적 있으며 주인공 주부 역에 남윤정 씨, 그녀를 조직에 끌어들인 친구 역에 김성녀씨, "실장님" 역에 최선자씨가 나오는데 특히 <사랑과 전쟁>등에서 공포의 미친 시어머니로 자주 출연한 최선자씨의 연기가 일품입니다. 그 특유의 목소리만 들어도 바로 동기부여(?)가 되는 듯합니다. 물론 주인공과 친구의 운명은 독자나 시청자 모두 쉽게 알 수 있듯 소모품으로 쓰인 후 폐기되는 것이지만 그래도 마치 서양 모험물 <사막의 여왕>에서의 그 파멸적인 유혹만큼이나 거역,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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