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마지막 서점
매들린 마틴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서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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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명이건, 그 문명의 전수(傳受), 혹은 정수(精髓)는 책에 달려 있고 담겨 있습니다. 이슬람의 침략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침노해 들어왔을 때 헬레니즘 문화의 소중한 유산도 포함한 도서관의 장서는 모조리 불에 탔습니다. 지금 이 소설은 인류 문명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한 시기, 나치의 공군과 미사일이 그 반대 진영의 수도를 맹폭하려 들었을 때를 시간적 배경으로 삼았습니다. 런던의 소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으며, 그 중에는 한 서점의 점원과 고객도 있습니다. 물론 나치가 이 작은 서점의 존재를 알고 그곳만을 노리는 건 아니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는 여리고 약한 문명의 핵심이 날선 야수의 이빨과 발톱에 찢기기 직전의 모습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지켜보는 느낌도 듭니다. 


"그리고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죠(p55, p99, p204)." p99에서 잠시 거론되는 고전 <오만과 편견>(또 <에마>라든가)은 원래 메인 테마가 사랑이지만, p55(또 저 뒤 p441)에 이름이 나오는 <몬테 크리스토 백작> 역시 사랑 이야기였던 줄은 잠시 생각해 보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전후방이 따로 있었던 과거의 전쟁과는 달리 바다를 사이에 둔 먼 대륙에서 얼마든지 폭격기과 미사일이 날아올 수 있는 현대에는, 하필 이런 때에 인연을 만나 좋은 감정을 갓 싹틔워가는 연인들에게 더욱 잔혹한 시간입니다. 


이제 막 서점 일을, 그것도 뜻하지 않게 덜썩 맡게 된 어린 그레이스에게는 고객 접대나 책과 친해지는 일이나 모든 게 어렵습니다. 어떤 부인이 존 딕슨 카의 새 미스테리 소설을 찾을 때 그녀는 그 저자와 책 제목이 어떤 분류, 부류에 속하는지 감도 오지 않지만 용케 티를 내지 않고 상황을 지혜롭게 해결하려 애씁니다. 이것은 젊음의 특권입니다. 서툴러도 무지해도 특유의 열정과 애정으로 적잖이 복잡한 미로를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p50에서 체크무늬 원피스를 입은 부인이 <크루키드 힌지>에 이어 <기드온 폴즈> 시리즈를 언급했을 때는 아마 뭔가를 착각했거나, 혹은 일종의 위트를 표현한 것 같습니다. 딕슨 카가 만들어낸 덩치 크고 해박한 명탐정 기드온 펠의 철자는 Gideon Fell인데, 저 만화 연작 제목에서의 Falls는 하필이면 fell(이걸 동사로 해석한다면)의 3인칭 현재 활용형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에반스! 그 낫씨 놈들이 지금 프랑스에 있다네!(p197)" 원래 나치 독일은 프랑스에 비해 전력이 강하다고 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1차 대전처럼만 프랑스가 애써 막아줬어도 독일은 서부에서 진로가 막혔겠으며 다른 방향으로도 침략의 발길을 내딛기가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 것을, 이 소설에 나오는 대로 불과 몇 주 만에 프랑스가 덜컥 함락되어 전세계가 위기에 놓이고 말았으니... "체임벌린은 아직도 사임하지 않았나?" 유화정책(appeasement)로 히틀러를 달랠 수 있었다고 믿은 단견의 체임벌린은 이처럼 국민들의 불신과 실망을 사고 있었습니다. 나라의 백척간두 운명을 그저 하늘이 보우하시길 기대어야 하는 처절한 심경을 프릿차드, 에반스 씨 등 장노년 캐릭터가 잘 대변합니다.


이 당시만 해도 서점 자체가 출판 시장 흥행에 미치는 효과가 대단했던 듯합니다. 소설 중에도 나오지만 배열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책의 흥행 여부가 달라지며, 또 손님들의 기호나 트렌드를 정확히 파악하는 직원이나 지배인이 있으면 같은 아이템을 갖고서도 다른 서점보다 훨씬 높은 매상을 올릴 수도 있었습니다(이 점은 지금도 같습니다만). 애착을 가졌던 <비둘기 파이>가 실패를 맛본 반면, <히틀러가 원하는 것>은 시국을 반영하여 엄청나게 팔려 나갔다고 하니 런던 시민들의 필사적인 마음, 불안감, 절망감이 그대로 엿보이는 듯도 합니다. 


등화관제. 참으로 무섭습니다. 불빛이 조금이라도 새어 나오면 독일 공군의 폭격기는 바로 그곳을 향해 공격을 퍼붓고, 그곳이 그저 전쟁에 무관한 민간인들, 부녀자들이 사는 곳이라 해도 예외가 없습니다. 칠흑처럼 어둡게 밤을 보내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절망적인 현실입니까. 어제까지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던 드리스콜 부인 등을 갑자기 싸늘한 시신으로 만나는 그레이스의 마음이 얼마나 슬프고 무서웠겠습니까. 전쟁의 참혹함, 무자비함, 비정함이 이 대목에 생생한 묘사로 등장합니다. 죽는 게 이유가 있어서 죽는 게 아니라, 그저 전쟁의 마수가 아무나 무작위로 희생양을 골라잡아 저세상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힘(p289)"에 젊은 여성인 그레이스가 무슨 힘이 있어 맞서겠습니까.


시대배경으로부터 한참 전이긴 하지만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서 에번스 씨는 캐릭터 에브니저 스크루지를 이 소설 중의 네스빗 부인에게 비깁니다(p378). 어린 시절을 빈한하게 보낸 상처가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들었으니 이해를 하자는 에번스 씨의 통찰은 과연 어린 그레이스의 배려가 미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터치합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보냈다고 성인으로서의 그런 행동이 용납되는 걸까요? 또 그 반대로, 유복하게 자란 탓에 남을 이해 못하는 인격 미숙자들은 어떻게 또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그레이스가 착하니까 저런 어설픈 설명도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간다고 저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웨더포드 아주머니는 네스빗 부인을 아예 "짐승 같은 여편네(p384)"라고 평가합니다.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돕는 정성과 진심이야말로 공동체가 생존을 도모하는 첩경입니다. 이 소설 속에서 여튼 악조건 하에서도 선의와 희망을 갖고 좋은 일에 매진하며 일치단결 속에 국난을 극복하는 우리네 평범한 이웃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환난을 이겨 내는 정신적 자산을 제공도 해 주는, 첫째 가는 친구는 누가 뭐라 해도 책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어요.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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