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本 한국사 근대편 - 100년 불굴의 역사
시대역사연구소 지음 / 시대인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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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우리 시대에 개혁군주로 널리 평가받고 존중받는 위인이자 군주이며 개인적 능력이 확실히 출중했던 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독자로서 한 가지 의문인 건, 왜 이처럼 출중한 능력을 지닌 분이 사거, 퇴위한 후 그토록 국세가 급속히 기울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하긴 청조의 건륭제도 기이할 만큼, 재위시 최강이었던 시스템이 후계자 손에 넘어가고 나서 영 시원찮게 작동했던 유례가 있으니...


순조 재위 초기에 이미 공노비 해방이 이뤄졌습니다. 완전한 신분 해방은 갑오경장 이후에 단행됩니다만, 이미 공적 섹터에서 모범을 보이기 위해 근 90년 앞서 이런 조치를 단행한 건 여튼 긍정적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요? 책에서는 물론 분석적으로 접근하여, 이런 조치는 세수 증가를 위한 불가피한 고육책으로 파악한다는 입장입니다. 납세 의무를 진 양인이 워낙 없다 보니 관이 보유한 자원이라도 민간에 내 보내서 세원을 마련한다거나, 혹은 먹이고 입히는 인건비라도 절약해겠다는 동기야 작용했겠지만 말입니다.


과거에는 진주 민란이란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이는 민중의 노력과 자발적 각성을 무시하는, 좋지 못한 시야가 드러난 표현으로 봐야 하겠습니다. 진주농민항쟁은 사실 이 지역 진주에서 고려 중기 무신집권기에도 토호와 혹리의 착취에 항의하는 여러 정의로운 움직임이 있었는데, 근 천 년의 간격을 두긴 합니다만 그 연장선상에서 봐야 마땅합니다. 


"프랑스 신부 1인당 조선인 1000명을 죽이겠다." 결과적으로 엄포에 그쳤으나 저 문언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지는 건 부인 못 하겠네요. 여튼 그들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물론 성공적인 개화 노력으로 모범적인 근대화를 이뤘다면 더 좋았겠지만 외적, 그것도 더 우수한 장비로 무장하고 들어온 서양 제국주의 세력과 교전하여 승리를 거둔 건 대단합니다. 프랑스뿐 아니라 저들 제국주의자들이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지인 세력의 저항에 일일이 다 대응한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과거에는 "신사 유람단"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조사시찰단"으로 이름이 바뀌었습니다. "신사들이 자기 돈 지출하며 일본의 발달된 현황을 (놀아가며) 살펴 본다"는 뜻일 구 명칭은, 사실 당시만 해도 유림들의 반발이 워낙 거셌던 탓에 그런 위장 형식을 취했을 뿐이었습니다. 물론 현재는 과거의 정부 정책에 대해 애써 그런 면피를 할 필요가 없으므로 본질을 그대로 주목하면 그만이죠. 이 부분도 저는, 우리 조상들이 그래도 어려운 여건 하에 많은 애를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래 한국의 지식인들은 세계 어디 내놓아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큼 똑똑했지 않았습니까. 다만 원로들이 좀 더 너른 국량으로 젊은 세대를 대했더라면 그런 소모적인 대립에 쓰일 에너지가 바르게 지양되었을 텐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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