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콤한 복수 주식회사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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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면서 남한테 원한 살 만한 일을 하지 말아야겠다, 뭐 이런 생각이 이 소설을 읽고 특히 들게 됩니다. 여기서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인물은 크게는 두 사람인데(물론 훨씬 더 많은 사람들과 그에 얽힌 사연이 나오지만), 하나는 마사이 족인 올레 음바티안이며 다른 하나는 위도상으로 지구 반대편에 산다고 할 빅토르입니다. 올레 음바티안은 책의 설명에 의하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하는데 독자인 저는 이 부분 설명에 그리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이 정도면 과연 금수저인가?' 대개 금수저는 신분 사칭 족보 조작을 할 필요가 없는데 이 음바티안은 그 음바티안이라는 이름부터가 사칭입니다. 다만 (훌륭하고 올바른) 출신을 배신하고 타인의 이름을 도용함으로써 스스로 나쁜 길을 들어섰다고 작가가 규정하는 뜻으로 받아들였네요. 


남한테 원한도 많이 사고 신분도 사 들였으며 금수저 물고 태어난 출신이 확실하게 아닌 경우는 빅토르입니다. 처음에 못된 잔머리를 굴리며 그 나름 못되게 열심히(?), 악착같이 사는 설명이 나와서 계속 이처럼 청년 모습으로 나오겠다 싶었는데 그건 아니고 신분 세탁에 청년시절부터 무려 20년 동안 공을 들인 후 비로소 어엿한(?) 악당의 꼴을 갖추게 됩니다. 올레 음바티안도 마찬가지인데 이 사람에 얽힌 사정은 무려 3대의 그것이 압축 소개되어 우리가 소설에서 본격적으로 보게 되는 건 그 아들과 손자의 이야기입니다. 빅토르도 자립한 게 마흔이 다 되어서이니 그 아들, 불쌍한 사생아 아들이 저 멀리 아프리카에 유기되어 한을 품고 성장하여 본격 복수를 도모하는 건 그 아비 빅토르가 이미 중년이 된 후입니다. 


올레 음바티안의 후손들은 행동과 사고 방식이 코믹하긴 해도 그리 악한 사람인 줄은 잘 모르겠는데(물론 착한 건 분명히 아닙니다), 빅토르는 정말로 인간성이 비틀린 타입입니다. 소년 시절에는 네오나치 사상에 빠져 지내는데 폭군 같은 아비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암시도 나오지만 사실 좀 모호하긴 합니다. 그냥 본인이 저지른 악행 때문에 몇 차례 심하게 구타를 당했다는 정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이 역시 학대이긴 합니다만). 여튼 이 역시 안 그래도 비틀려진 채 태어난 애가 완전히 엇나가기엔 충분한 동기입니다. 이런 애를 구태여 네오나치로 설정한 작가의 선택에서 어느 정도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는 듯도 합니다. 


네오나치인 것도 문제이지만 빅토르의 신분 상승 방법은 대단히 그 질이 나쁩니다. 이성적으로 끌리지도 않는 어느 불행한(예쁘지도 않고 그렇다고 총명하지도 못한) 딸을 둔 부호에게 환심을 사서 20년 동안 매니저로 일한 후 딸과 결혼하여 그 부친이 죽은 후 재산을 가로채고 부인과는 이혼해 버리는.... 행실도 좋지 못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흑인인 줄 알 수 없는) 어느 매춘부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두고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 아이를 유기하기까지 합니다. 웃기는 건 흑인 아이라서 아프리카까지 데리고간 후 갖다버린다는 점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유럽에서 소수에 속하는 인종, 민족 들은 그들의 고향으로 돌려보내야 한다는 네오나치의 정강정책에 크게 영향 받는 그의 내면 과정이 우스꽝스럽게 설명됩니다. 트럼프도 하긴 이 비슷한 말을 한 적 있습니다.


여튼 빅토르가 케냐에 갖다버린 케빈은, 저 올레 음바티안에게 느닷 발견되어(안 그랬으면 정글의 사자떼한테 룸서비스로 제공되었으리라고 합니다) 마사이족의 온갖 좋은 교육은 다 받고 멋진 성인으로 자라납니다. 음바티안은 신(엔카이)이 그에게 이 멋진 "아들"을 점지해 준 것이라 여기고 케빈은 고마운 양아버지의 이 착각을 측은히 여기지만, 사실 밖에서 보는 우리 독자들은 정말로 이것이 어떤 신의 섭리가 아닐까 생각도 하게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약 스포 있으므로 주의하세요)

소설 속에서 끝없이 희화화되지만 사실 빅토르는 꽤 머리가 좋은 사람입니다. 이 소설에서 냉철하게 계산할 걸 다 하고 남의 생각도 미리 읽고 합리적으로(...) 미래 사건 진행, 경우의 수를 다 따지는 사람은 빅토르뿐입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이 수간(...), 미술품 위조, 마약 소지 혐의로 구금되었을 때, 결국은 사건의 진상을 알아채고 케빈과 옌뉘, 음바티안, 또 생각도 못하게 끼어든 광고맨(이자 복수유한회사의 CEO) 후고 등이 자신의 OOO에 OOO할 것을 정확히 예측하고 미리 덫을 치죠. 빅토르의 계산대로 우리 착한 주인공들은 정확히 함정에 말려들고 증거도 불리한 게 다 잡힙니다. 후고는 광고에는 천재적이었지만 기타 사업을 영위할 때 필요한 전략적 두뇌나 조심성, 현실 감각 등은 현저히 부족한 분 같았습니다. 저 먼 오지에서 자신 부족만의 사고 방식으로 평생을 산 음바티안과 별 차이도 없어 보입니다. 착한 사람들은 이처럼 뭔가 나사 하나가 빠진 채 상황에 떠밀려가고, 반면 천하의 악당인 빅토르는 냉정히 말해 지독히 운이 없었을 뿐 그의 입장에서는 최상의 합리적인 수(手)를 하나 하나 두어 가니 이걸 어쩌겠습니까. 


저는 문제의 그 그림 정체가 과연 무엇일지가 궁금했습니다. 옌뉘는 다른 건 몰라도 미술품 감정만큼은 하늘이 낸 감각과 안목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그녀가 첫눈에 보고 "이르마 스턴의 진품"이라 단정했다면 이건 뭔가 사연이 있긴 하다는 뜻이죠. 그런데, 케빈은 이 그림이 자신의 양아버지 음바티안이 제작한 것이므로 그런 레전드 화가가 그린 진품일 리 없다고 확언합니다. 이게 독자를 처음에는 헷갈리게 하는 부분입니다. 이 의문은 후반부에 "더 확실한 경위를 통해" 깔끔하게 해소가 됩니다. 


p193을 보면 "진품 인증"이라는 말을 옌뉘가 꺼냅니다. 그녀는 아버지의 가업을 진정성과 전문성 다 갖추어 이을 뻔한 인재이므로(이를 못 알아본 그 부친의 잘못이죠..) 이런 전문 용어를 알고 있죠. 영어로 provenance라고 하는 그것일까요? 이에 지레 겁을 먹거나 실망한 후고는 기발하게도 "짝퉁을 진품으로 보이게 하는 게 불가능하니, 그 반대로, 진품(인지 모르지만)을 최대한 짝퉁처럼 보이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악당을 벌하기 위해 그 나름 의협심으로 크루가 모여 기발한 응징책을 짜내는 장면은 마치 2016년 OCN에서 방영된 한국 드라마 <38사기동대> 등 케이퍼물을 생각나게도 합니다. 


진인사대천명, 혹은 모사재천성사재인이라고, 일은 사람이 최대한 머리를 굴려 꾸미지만 그 성패 여부는 오로지 하늘만이 안다... 이 소설을 두고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앞서도 말했지만 저는 후고 등이 꾸민 일은 정말로 허점이 많았던 반면, 빅토르는 그렇게나 제 나름 치밀한 계산 하에 움직였고, 도중에 (자기 입장에서는) 일이 꼬여도 최대한 잘 수습하며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생각이 됩니다. 결국 일이 그렇게 된 건 뭔가 하늘의 섭리가 개입하여 악인이 응징된 것이라고밖에 보이질 않습니다(^^). 악한 계획이나마 저처럼 치밀하게 진행시킬 줄 아는 캐릭터에겐 왠지 끌릴 법도 한데 독자는 정말로 이 빅토르에게는 한톨의 공감이나 수긍을 할 수 없습니다. 너무나도 치사하고 저열한 악한이기 때문이죠. 


이 소설을 읽고 저는 이르마 스턴이라는 실존(물론 음바티안 가문과 만난 건 전적으로 허구입니다) 인물과 그 작품 세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p48에서 키르히너가 1938년 자살하는 동기를 제공한 "아돌프"라는 인물은 물론 히틀러를 가리키고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흥미롭게도 히틀러라는 단어는 잘 안 나오죠. 추상화는 우리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동원한 여러 해석의 여지를 제공하고, 이 소설에 소개된 거장들은 몇 가지의 선, 색만으로도 그런 효과를 내기에 천재라 불리는 것입니다. 이런 고급의 미적 영감과 각성의 효과를 모른 채 그저 예전식의 구상(具像)만 강조하는, 둔하고 편협한 예술관이 조롱받는 건 너무도 당연합니다. 


후고는 자칫하면 빅토르 식의 삶을 살 뻔한 사람입니다. 물론 부모님의 두터운 보호를 받은 환경이었으나, 사회에 첫발을 내디딜 당시 그 역시 불안정하고 아무런 보장이 없던 인생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알아보고 키워 준 로빈 회장에 대해 큰 고마움을 품지 않았던 듯합니다. 예술품에 대해 감식안이 제로에 가깝고 제 꾀에 제가 넘어가는 품으로는 빅토르와 쌍둥이처럼 닮았습니다. 후고를 구원해 준 건 케빈, 옌뉘, 음바티안 등의 선의였고, 안 그랬으면 그는 빅토르처럼 아무의 우정이나 공감을 받지 못한 채 OOO했을지도 모릅니다. 영화 <엑스맨>의 한 대사가 떠오르네요. "아무리 그래봐야 넌 혼자지만 우리는 이처럼 옆에 친구가 있다." 무모하고 어설픈 계획도 친구들과 함께라면 의외의 요행까지 한편이 되어 준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게 복수이든 혹은 헛소동이든 간에 말입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으로부터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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