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표의 정치혁명
장기표 지음 / 행복에너지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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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표 선생님은 한국 민주화 운동의 거목 중 한 분입니다. 아마도 현재 활동하시는 분 중에는 가장 연로하신 분에 속하며, 또 아마 가장 오랜 동안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인사로 꼽혀야 할 듯합니다.

장기표 선생께서 서울 법대 재학생이었던 시절 평화시장 재단사였던 전태일의 분신이 있었죠. 이때 장기표 선생, 그리고 훗날 <전태일 열전>을 집필한 고 조영래 변호사 등은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가 시대의 비극 그 현장 앞에서 오열했습니다.

생전에 조영래 변호사는 한겨레신문(창간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 기고하여 "장기표는 무슨 죄가 그리 많은가"라는 칼럼을 쓴 적 있습니다. 민주화 조치를 단행한 후 종래의 재야 인사들이 대거 석방, 사면 복권 된 후에도 유독 장기표 선생만큼은 이런저런 법적 규제를 통해 활동에 많은 제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영래 변호사는 장 선생보다 2년 연하인데도 두 분은 간담상조하는 벗으로 오래 교유하신 듯합니다.

저 무렵부터 장기표 선생은 차세대 야권 지도자, 대통령감으로 꼽혔죠. 실제로 2000년 그가 민주국민당에 가담했을 때 YS는 "느그들 중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돼"라며 격려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그와 뜻을 같이했던 인사들은 박찬종, 김광일, 이기택 등 쟁쟁한 야권 원로들이었죠. 고 김광일 변호사도 서울 법대 출신인데 장 선생보다 6년 연상입니다. 마치 호랑이 같은 인상에, 말과 행동, 인격 등 모든 면에서 적들에게 한 치 흠을 잡히지 않는 지사이자 투사형인 거물이었죠.

장 선생은 이후로도 계속 독자 노선을 겪으며 정통 진보 세력의 한 맥을 정치세력화하려 애 썼으나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절 그의 엄청난 네임밸류에는 미치지 못하는 결과만 낳았습니다. 아마도 대중은 (그의 실제 행적에 비해) 그를 널리 인지하지 못한 결과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장기표 선생은 근년에 들어 현대 사회의 급격한 변화상에 대한 자신 나름의 깊은 통찰을 담은 저술, 강연 활동을 통해 우리 대중을 만나는 중입니다. 그 중 하나가 이 책이며, 이 책이 저술된 경위는 책 서문에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최근에 저도 많은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쓴 출판사 행복에너지 권선복 대표님의 권유, 그리고 에디터인 한영미 작가님의 도움이 있었다고 선생은 스스로 밝힙니다.

이 책에서 그가 밝히는 신념과 비전 중 하나는 민주시장주의입니다. 20세기 들어 모든 왕정, 전체주의가 타파되고 오로지 살아남아 보편적 지지를 받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 아닌 어떤 체제도 이제는 인류의 심판과 타매를 받아 퇴장했으며, 혹 아직 퇴장하지 않은 레짐이 있다면 아마도 곧 그리될 운명이겠습니다. 그러니 어떤 지표와 이상이 민주주의 카테고리 밖에서 이뤄진다면, 이를 추구하는 자는 인류의 공적(公敵)으로 영원한 저주의 낙인이 찍혀 마땅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이 만한 풍요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통해 달성했습니다. 시장경제는 물론 많은 결함이 있으나 일단 전체가 먹을 파이를 이 정도씩이나 키워 줄 수 있는 다른 대안이 현재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 선생은 "민주시장주의"를 아젠다의 첫머리에 두는 것입니다.

또한 장 선생은 보수세력 일각의 종미(從美) 경향에 대해서도 매서운 일침을 놓습니다. 미국은 물론 선진국이며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이 여전히 많지만, 그 사회에도 아주 몹쓸 병폐가 있으며 개탄스럽게도 우리는 어쩜 이런 가장 못된 점부터 거꾸로 배우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지 못하고 걸핏하면 대국의 영향력 행사를 자청하는 나쁜 습성이 있는데 사실 말이야바른말이지 YS도 야당 총재 시절 NYT와의 인터뷰에서 그런 적이 있었죠. 아무튼 이게 우리의 고질적인 사대주의 습벽이며 장 선생이 책에서 이를 매섭고 준렬하게 질타하는 것입니다. 예전 원나라 때도 입성(立省)의 논의가 있었으며 명나라 때 조선의 조정이 굴신했던 역사야 두 말 하면 입이 아플 뿐입니다.

장기표 선생은 누구보다 뜨거운 마음으로 민족의 재통일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입니다. 그는 중국 역시 내심으로는 한국 중심의 통일을 그리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 주장하는데, 1) 어차피 체제가 근본적 결함을 안고 있는 북한은 자기 영토 보전도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실패한 국가이며 2) 자주적이고 강력한 자체 의지를 지닌 통일 한국은 종전처럼 마냥 미국에 의존하지 않을 것이고 3) 이런 통일 한국이라야 주한미군을 한반도에서 결국은 내보낼 수 있을 것인데 이는 중국에 눈엣가시인 현안을 근본에서 해결할 수 있으므로 그들 역시 환영하는 바가 될 것이라는 논리입니다. 그러면서 한국을 오히려 친중으로 포섭하기 위해 중국은 지금보다 한국에게 유화적인 태도로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이를 요약하면 장 선생의 명명으로 "신문명정치"입니다. 종래 한국에서 이뤄진 온갖 부패하고 퇴행적인 구태가 일소되고, 당당하게 민족 통일을 이뤄 자주적인 국가를 이루고, 국력의 일대 도약을 달성하여 미국과 중국 등과 어깨를 나란히하는 강국을 건설한 후 세계 평화까지 도모하는, 인류 역사의 새 지평을 열어젖히는 감격의 도정을 닦아 나가자는 게 그의 주장입니다. 얼마나 원대하며 벅찬 비전의 표명입니까.

장기표 선생을 현실 정당 정치 지도자로서 제대로 동반하지 못하고 "영원한 재야인사"로만 모시게 된 건 우리들의 불운입니다. 물론 저 호칭에는 추억과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 담긴 표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장 선생님을 앞으로도 오래오래, 책을 통해 강연을 통해(서나마) 뵐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책을 내 주신 행복에너지에도 독자로서 감사 드립니다.

*출판사에서 제공된 도서를 받고 주관적으로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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