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무사 이성계 - 운명을 바꾼 단 하루의 전쟁
서권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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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전생에 나라를 구하기라도 했나?" 같은 표현을 쓰곤 하지만 나라를 구하는 행운과 영광, 축복은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게 아닙니다. 또 이성계라는 무장에 대해서도 위화도 회군을 통해 이른바 역적절을 한 당사자로 쉽게 폄하하지만, 실제로 그는 해당 사건으로부터 12년 전 "나라를 구한" 극적인 공로를 쌓은 적이 있습니다. 바로 황산 대첩입니다.

황산은 현재의 전북 남원에 소재한 곳인데 계백 장군의 황산벌 전투하고는 한자가 다르며 (당연히) 소재한 장소도 다릅니다. 황산벌은 누를 황(黃)을 쓰며, 이때의 황산은 거칠 황(荒)을 씁니다.

일본은 이 무렵 그들 남북조 시대의 대대적 혼란을 겪는데 아마도 그 싸움의 패잔 세력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대군이 다만 정규군의 모습만 결한 채 한반도 남부에 산발적으로 왔습니다. 이 왜구가 수십 년 동안 모이고 모여 드디어 남원 황산에 진을 치게 됩니다. 산발적으로 넘어 왔던 왜구의 폐해도 극심했는데, 이제 아주 큰 세력까지 이뤄 결집했으니 앞으로는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를 판이었습니다. 사실 이 정도의 규모와 해악이라면 이미 "왜구"라 부를 단계를 넘어섰고, 우습고 안타깝지만 고려는 나라의 존망을 걱정해야 할 수준이었습니다. 나라가 내외의 도적떼에 의해 망하곤 하는 일은 역사에서 의외로 흔합니다.

황산 대첩은 그보다 훨씬 앞선 시절 예컨대 북방의 큰 위기에서 비롯한 귀주 대첩, 살수 대첩 등에 비해 결코 못할 바가 없던 엄청난 전과였습니다.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 더 시시한 상대가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만약 이때 준동했던 왜구를 한몫에 처치하지 못했다면 고려가 당장 망할 수도 있었을 뿐더러 이후 한국인 순수 혈통의 왕조나 사회 질서가 과연 이어지기나 했을지 의문이 들 판이었습니다.

귀주 대첩, 살수 대첩 등은 우리보다 수적으로 우월한 정규군을 상대로 이룩한 전과였으나, 황산 대첩은 형식상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또 앞 두 전과와는 달리 어떤 기발한 전술이 동원되었다기보다(물론 그렇기도 하지만) 이성계 개인의 어떤 무공, 개인기, 초인적인 투지, 완력에 의해 이뤄진 면도 크다는 게 특이합니다.

이성계 같은 사람은 만약 고려처럼 철저히 문치주의적 틀에 의해 운용되는 공간이 아닌 다른 성격의 조건에서 활동했다면 전혀 다른 결과를 낳았을 어떤 정복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유형입니다. 예를 들어 주원장이나 누르하치 같은 이보다 더 큰 스케일로 뭔가를 이뤘을 만한... 여튼 이 정도의 초인적 역량을 갖고서도 후세에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자신의 나라로 기존의 체제를 탈취한 장군 정도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건 참 안된 일입니다.

소설은 엄청난 리얼리즘이 지배합니다. 특히 이 작에서는 그의 "늙은 나이"가 내내 당사자의 의식을 짓누르는 악조건으로 작용하는 게 특이합니다. 하긴 당시 무장에게 젊은 나이란, 요즘 프로 스포츠 선수에게 부과되는 어떤 악조건 이상이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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