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경계선 - 사람이 존재하는 한 반드시 그어지는
아포 지음, 김새봄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보면 특정 위도를 따라 기나긴 일직선으로 이어집니다. 인위적 경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어떤 무엇이 인위적이라는 사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해체해 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품게 합니다. 이는 마치, 민족, 인종이 달라도 두 남녀 사이에 언제든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있음과도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든 느낌은, 경계선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존재가 결코 아니며, 애초에 지상에 없던 경계선을 구태여 만든 인간의 마음 안에 우리가 쉽게 극복 못할 어떤 무엇이 단단히 응어리져 있지 않나 하는 일종의 근원적인 절망감이었습니다.

阿撥이라고 한자로 쓰는 이름(우리식 발음으로는 아발)의 저자는 대만 출신의, 아직은 젊은 인류학자입니다. 전 처음에 중국 대륙에서 나고 자란 분인 줄 알았습니다. 공산 중국은 표면상으로 중국 경계 안에 터잡고 사는 다양한 민족들에 각각의 생존권과 자존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실상은 잔혹한 탄압과 일률적 동화 정책에 가깝습니다. 이런 당국의 이념과 스탠스에 동조하는 저자가 "슬픈 경계"를 논한다면 독자 입장에서 진정 슬픈 독후감이 빚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만 그렇지 않았고, 그래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대만에서 나고자란 이의 시선과 입장이라는 게 의의로 큰 보편성을 담보할 수 있구나, 나아가 대만과 우리 나라의 젊은 세대가 생각 밖으로 많은 공통의 지평을 가졌구나 하는 깨달음이었습니다.

베트남은 저 개인적으로 몇 주 전 책프 독후감에서도 말한 것처럼 중국과의 항쟁 역사가 그 주된 정체성을 차지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 책 저자는 분명 "중국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가지면서도, 동시에 대만인으로서의 무심함(이 "무심함"은 아마 대륙 출신이라면 도저히 유지하기 힘들 겁니다)과 중립성도 그 영혼에 분명 배어 있었습니다. 베트남은 본디 중국과 짧지만은 않은 경계를 공유하지만, 대만과는 바다를 사이에 둘 뿐입니다. 비단 베트남뿐 아니라 대만은 섬나라이기에 주변국 모두와 바다를 경계삼죠.

베트남은 분명 베트남으로서의 독자성을 갖고 있습니다만, 사실 외국인 눈에는 남중국과 그들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 분간이 힘듭니다(아마 우리 한국도, 밖에서 보기엔 북중국과 큰 구분이 안 될 겁니다). 베트남 주류 민족은 그 먼 근원을 중국에 두기까지 합니다. 이런 베트남에 심지어 "화교"까지 많이 사는 게 현실입니다. 그러나 배트남 국민인 이상 그들은 중국에 근원적 경계심을품고 삽니다. 중국과 베트남은 같은 사회주의 이념을 공유하지만, p27에 나오듯 국가 차원에서 유리한 계약을 거부할 만큼 "어두운 그림자와 같은 존재"로서의 중국을 경원시합니다.

한국의 문 대통령도 몇 달 전 캄보디아를 방문하고 앙코르와트 유적 앞에서 "이렇게 큰 나라가 갑자기 사라질 수도 있었던가"라고 발언했다고 합니다. 수도 프놈펜도 그렇고 캄보디아 곳곳에는 과거한때 찬연한 문화를 발전시킨 흔적이 뚜렷합니다. 그런데 캄보디아 인들의 마음 속에는 "폴포트, 또 그가 거느린 크메르 루즈"에 대한 공포감이 가득합니다. "아주 무서운 사람". 뭐 두 말이 필요 없죠. 이 폴포트를 겨냥하여 이웃 베트남이 쳐들어오기도 했고 베트남 역시 캄보디아 인들에게는 가공할 만한 앙숙입니다. 베트남인들도 "나는 캄보디아 인들을 증오해(p61)."라 말할 만큼 감정의 골이 깊습니다.

p81에는 리처드 뮤어의 말이 나옵니다. "국경은 영토의 접촉면이다. 이에는 수직이 있을 뿐, 수평이 존재하지 않는다. 모호한 평면의 공간이 아니라, 철저하고 확실한 단절이다." 저자는 식민주의자들이 일별하고 파악하기 쉽게, 마치 백화점의 진열 공간처럼 재편집해 둔 것이 바로 근대 국가의 지도라고 합니다. 저자는 묻습니다. "이 땅이, 식민주의자에 의해 모습을 갖추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잘못도 무척 큽니다만, 그 이전 중국은 어떨까요? 수평이 없고 수직만 존재하는 경계에서, 인간은 누가 누구보다 우위에 서야 한다는 힘의 논리를 위에서 아래로 강요할 뿐입니다. "사실 내 눈에는 모든 동남아시아인들이 비슷해 보였다(라오스, 베트남, 캄보디아를 가리지 않고)." 그러나 실제는 말도 풍습도 다르며, 이것들이 서로 차이 나는 그 이상으로 그들은 서로를 경계(警戒)하며 진한 경계(境界)를 짓습니다.

인도네시아도 수많은 부족들이 인위적 경계 안에 부대끼며 사는 광대한 나라입니다. 논과 보르부드르 사원이 우리 곁에 있는 한, 이슬람이 외부에서 침입한 이래 영원히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우리다(p89)." 저자도 말하듯 인류학에서 어찌 보면 영원한 한계가 되는 게 "연구자와 타자 사이의 간극"입니다. "스스로가 짜낸 의미의 그물망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기에, 일단 연구자는 나 자신(연구자가 비서구인일 때)의 관점과 서구인의 관점(주류) 중 하나를 선택하고 첫 출발을 잡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관점을 당연히 정립하고 첫 발을 떼어도 죄의식을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데 이런 어려움까지 있으니... 저자는 이 다양한 부족의 모자이크가 이루는 인도네시아라는 나라에서 새삼 그 한계를 절감합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 운동 영웅이었던 수카르노 치하에서 한때 열광적인 유일 체제를 만들었지만, 그가 용공 노선을 취하고부터 커다란 불안에 시달리다 결국 수하르토 장군의 쿠데타를 겪고 군사 독재 시스템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때 수하르토 장군은 의도적으로 반 화교 노선을 취했으며, 무려 삼십 년이 지나 민주화 바람이 부는 와중에 역설적이게도 이 나라는 또 한 번 화교 대학살을 겪었습니다. 자구의 한 구석에서는 중국인이 비(非) 중국인을 향해 잔혹한 탄압을 가하는 현실을 보면 참으로 개탄할 만한 사태였습니다. "경계에 대한 맹목적 신봉"은 이처럼이나 위험하고 무섭습니다.

오키나와는 류큐라고도 불렸으며(역사적으로 둘의 범위가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이 책에도 어떤 아주머니가 충셩[중승이라는 지명의 중국식 발음], 오키나와, 류큐를 목적지로 각각 표기한 여행을 다녀온 후, "어쩜 그렇게 서로 똑같대?"라며 놀라는 유머러스한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조선, 왜, 중국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자존을 유지했습니다만 근대 들어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습니다. 이를 다룬 사연도 여러 소설 속에서 자주 등장하는데 그 안타까운 사연의 정한이란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일제의 패망 후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지금까지 주둔합니다만, 놀랍게도 이들은 미군 당국에 의해 모멸감을 새로이 겪고 심각한 차별과 착취 정책을 경험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 주장이 주장일 뿐이라 생각했고, 특정 정치 진영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여겼는데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죽했으면 미군이 물러가고 즉시 일본에 재편입되게 하려는 운동이 다 벌어졌겠습니까. 이 일로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아시아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받기까지 했으니 참으로 웃지 못할 일입니다. 어떻게 된 게, 우리 아시아에는 경계를 둘러싸고 벌어진 비극을 품지 않은 나라가 없다는 게 이 책을 읽으며 느낀 놀라움이었습니다.

한국이 또 이 학자의 여정에서 빠질 수 없습니다. 대만인답게 한국을 보는 시선과 감정은 복잡미묘합니다만, 인류학자가 꼭 아니라 해도 개인으로서 저자 아포의 스탠스는 담백하고 중립적이며 교육적이고 유익하기까지 해서 고마웠습니다. 역시 한국인들은 누가 봐도 근면하고 역동적이며, 무엇보다 세계를 휩쓰는 한류 열풍의 배경이자 근원입니다. 한국에서 저자가 만난 친구 신아영은 독특한 열정을 지닌 여성인데, 그녀는 대만인들이 쓰는 번자체를 낯설어합니다! 우리 조상들은 수천 년 동안 한자를 써 왔는데 이는 당연히 (현대에 들어와서야 번자체로 불리는) 정자를 뜻합니다. 그러던 겨레가 불과 수십 년만에 한자를 모두 잊고 대륙에서 쓰는 (다소 격 떨어지게까지 보이는) 간체자를 원칙으로 삼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보르네오라는 섬은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가 경계를 사이에 두고 공유하는 지역입니다. 말레이시아 역시 화교의 영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크며, 이슬람 술탄들이 돌아가며 국가 수반을 차지하는 데서도 볼 수 있듯 종교의 영향이 아래 이웃 인도네시아만큼이나 큰 나라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 역시 이주 중국인들이 그 형성에 많은 족적을 남겼으니 경계의 무상함이 이보다 클 수 없습니다. "종족 사이 마음에 진 응어리를 풀려면 정말이지 갈 길이 앞으로 한참 먼 것 같아." (p257) 여행을 함께한 친구뿐아니라, 그 기록을 간접적으로 구경하는 독자의 소회도 이와 별 다를 바 없습니다.

앞에서 어떤 근원적 절망을 느꼈다고 했지만, 국적과 혈통을 떠나 이처럼 열린 마음으로 나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이웃을 포용할 수 있는 저자 같은 젊은 세대의 비전을 접하면서 새로운 희망이 싹튼 것도 또한 사실입니다. 몇 달 전 이용수 할머니가 "젊은 세대는 서로 소통하고 교류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역시 참 옳은 말씀이다 싶었습니다. 경계는 결국 어리석은 환상일 뿐이며, 그러잖아도 많은 슬픔이 침노하는 우리네 마음에 뭐하러 이런 인위적이고 쓸데없는 근심거리를 또 하나 들일까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선이 아니라 공간이 이웃과 이웃 사이에 무심히 노닐게 하는 게 앞으로의 과제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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