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경제 생태계 만들기 - 채이배가 말하는 한국 경제 위기의 유일한 해법
채이배 지음, 주준형 인터뷰어 / 헤이북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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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노력하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사회가 무한 경쟁으로만 성원들을 몰아가는 것도 문제지만, 살인적인 경쟁을 거치고도 정작 엉뚱한 이들에게 성과가 배분되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나친 경쟁을 강요하고도 결과가 정의롭지 못하기에 많은 국민들이 불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앞장 서서 문제를 제기하고, 민중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시스템이 바뀔 필요가 있습니다.

채이배 전 의원은 재벌기업 내부의 오랜 폐단을 자세히 비판합니다. 예컨대 기업에는 시스템 통합(SI) 업무라는 게 있는데, 그룹의 각각 계열사(물론 모두 독립된 법인이죠) 내부에서 처리되어야 할 이 업무를 모두 뽑아내어 별개 회사로 또 설립하고, 이 회사에다 SI를 몰아주기라도 한다, 그리고 그 회사가 총수 일가의 사유물이 되게 한다, 이러면 아주 쳬계적이고도 망라적으로 "오너 가문에 일감 몰아주기"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젊은 경영인들이 의욕적으로 SI만 전문으로 삼는 스타트업을 만들 수도 있을 텐데, 이런 문어발의 첨병 때문에 이들은 아예 자신들의 장기가 될 수 있는 분야에 발도 못 들여놓게 되죠. 명백한 불의(不義)입니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채 전 의원은 IBM(물론 우리가 잘 아는, 전에는 컴퓨터 제조 회사로만 유명했던 그곳입니다), 오라클, SAP(요즘 빅데이터 관련으로 일반인들도 잘 알게 된) 같은 SI 전문 기업이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며, 심지어 재별 계열사가 물류 섹터도 과점하는 통에 중견기업의 씨가 마른다고 합니다. 듣고 보니 과연 그런 듯합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저를 포함) 잘 모를 이가 많지만, 후자에 대해서는 고개를 끄덕일 만합니다.

물류 섹터를 재벌이 독점하는 폐해로 저는 H 택배, C 택배 같은 곳을 떠올렸지만 사실 이런 곳은 자영업자를 관리하는 센터 비슷한 체제이기에 상대적으로 그리 심각한 건 아니죠. 채 의원이 드는 예는 현대글로비스로서, 현대차(화주)와 일반 차주를 연결, 주선하는 데 (많은 투자 없이도) 분명 기존의 유리한 위치만 활용하여 업계의 강자로 부상할 수 있었습니다. 땅짚고 헤엄치기에 다름 아닙니다. SI 센터도 가상의 위험이 아니라 SK C&C가 이미 그 큰 그룹 내의 전산 용역을 독점하는 중입니다. 이래서야 공정경쟁이 될 리가 없고, 청년 창업 같은 게 꽃필 수가 없습니다.

재벌들이 일감 몰아주기를 하는 이유는 상속세의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입니다. 저런 일감 몰아주기의 가장 근원적 문제는, 야심찬 젊은 업체들을 결국 재벌가의 하청사로 계열화한다는 것입니다. 창의력 발휘의 대가가 딱히 이유 없이 대기업 오너 가문으로 그 상당 부분이 빨려 들어간다면 이는 전근대적, 봉건적 사회에서 착취당하는 농노나 별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와중에서 젊은 개혁 성향 국회의원으로서 꾸준히 문제 제기를 해 온 채 전 의원은, 그런 노력을 통해 정의선, 정경선 같은 현대가(家) 후계자들이 보다 전향적으로 스탠스를 전환하기도 했다고 스스로 뿌듯하게 말하는군요.

1998년 외환 위기 이후 도산법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p74), 이는 이른바 기촉법 등 당시로서는 새로운 입법이 순기능을 발휘한 바 큽니다. 그러나 이는 여전히 관치 주도(혹은 책의 표현을 빌리면 "가장 보수적인 기관인 은행" 위주)의 시스템이며 채 의원 같은 젊은 개혁 성향 의원들이 주장했던 건, 이런 법제가 보다 민간 주도가 되어 작동해야 한다는 쪽이었습니다. 여기서 민간이라 함은 아마 그가 몸담았던 참여연대 등의 단체를 가리키는 것 같다고 지레짐작했으나, 책을 꼼꼼히 읽어 보니 그렇지도 않더군요. 이게 좀 놀라웠습니다(솔직히 좀 부끄럽기도 했고요).

회사가 파산지경에 도달했을 때 가진 잔여재산 다 팔고 그나마 채권자들을 최대한 만족시키는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인) 청산이 우선이냐, 아니면 노동자들에게 일단 밀린 임금을 지불(이들 노동자들도 분명 채권자이며, 다만 정부, 특히 노동부에서는 임금 채권의 만족 순위를 낮추지 말자는 취지입니다)해야 하느냐. 후자의 근거는, 임금을 지불 받은 근로자들은 의욕을 찾고 열심히 근로에 복귀하여 노동을 계속하겠으며, 이는 기업의 생산을 재개하여 진정한 의미의 "회생"을 촉진할 것이라는 전망에 있습니다. 남은 채권자들도 낡은 집기나 건물, 혹은 부지를 팔아 얻는 몇 푼 안 되는 변제를 받느니 이 편이 낫지 않겠냐는 뜻이겠죠. 설득력이 대단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실론으로 회의를 품는 이들도 있겠습니다. 성과, 가치 창출의 원천이 노동이냐, 아니면 다른 요소의 기여가 더 크냐에 대한 오랜 의견 대립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입니다.

채 전 의원은 모험 자본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신산업을 육성하고, (제대로 된) 구조조정을 통한 일자리를 지키고, 나아가 제조업을 몰락시키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p79). 회생 절차에서 이런 모험 자본에 우선 순위를 주면(심지어 임금 채권보다도), 앞선 청산 절차에서 모든 일자리가 완전 없어질 위기를 일단 막은 기여에 대한 보상 아니겠냐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과거에 정부가 그저 모태 펀드에 대해 지원한다거나(개별 기업을 찾으려는 노력을 않고), 은행 팔 비틀어서 돈을 대는 식의 "격화소양"식 처방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 성과물이 바로 20대 국회에서 멋지게 통과된 "채무자회생법"이란 거고요. 글쎄 사람마다 진보다 보수다 하여 입장이 갈릴 수는 있겠지만, 이런 개혁은 노선이나 세계관의 차이 불문하고 모두가 긍정할 수 있는 해법 아닐까요? 더군다나 이런 방안은 기본적으로 민간 자본(이윤 추구가 최우선인)에 주도권을 준다는 점에서 효율성을 해하지 않고(오히려 제고하고) 시장 친화적이기까지 합니다. 관이 개입하지 않고 민간 기업의 문제(또한 노동 문제)를 민간 안에서 찾아 해결하는 셈이지 않습니까.

대기업과 (한국인 대부분이 일하는) 중소기업의 상생을 위해서는 어떤 인센티브가 있는 제도적인 틀 마련이 중요하며, 이게 꼭 경제적인 것일 필요도 없다고 합니다. 경영 자율성 존중만으로도 기업은 크게 만족할 것이라고 하네요. 이는 문재인 정부가 주창하는 스튜어드십코드와도 색깔이 다른 입장 같아 보입니다. 한국이 이제 질적인 성장 궤도에 진입할 필요가 있다는 그의 주장을 여러 면에서 곱씹게 되는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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