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민화로 떠나는 신화여행 인문여행 시리즈 2
하진희 지음 / 인문산책 / 201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 반(半)신들, 영웅들의 계보를 머리 속에 잘 정리하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인도인들이 섬기는 힌두의 신들은 무려 "수백 억 명(이 책 p8)"이나 되기 때문에, 이 정도면 해당 충실히 믿는 이들에게라고 해도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지 싶은데요. 소설 한 편 읽을 때에도 등장인물이 너무 많으면 아무리 재미난 이야기라 해도 따라가기 힘든 것과 같습니다. 어쩌면 이런 이유 때문에, 평균적인 한국인들이 힌두 신화를 매우 낯설어하지 않나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유로 멀리하기에는 힌두 신화가 너무도 재미납니다.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인도, 중국 등에서 전래된 불교를 믿어 왔는데 그 역사가 거의 천 오백년이나 되며 이와 관계된 문화 유산도 많습니다. 불교 설화도 파고 들면 재미난 게 많은데, 불교를 멀리서 잉태했던 인도의 전 신화 체계를 (그 대략이나마) 섭렵하면 얼마나 흥미롭겠습니까. 근래 한국에서는 라틴어 공부 바람이 부는 중인데, 라틴어 어원, 문법을 깊이 공부하면 그 먼 친척뻘인 산스크리트와 만나는 대목이 많습니다. 그런데 산스크리트 문헌 공부는 또 이 힌두 신화와 뗄래야 뗄 수가 없습니다. 당장 불의 신 "아그니" 같은 것만 해도 그 이름의 복잡한 변화(denomination)를 외워야 하는데, 아그니가 누구인지를 알면 그 암기의 고역이 조금은, 아니 상당 부분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330여쪽의 예쁜 동화책, 민담집처럼 보입니다. 어린이들이 읽어도 쉽게, 재미나게 술술 읽힙니다(어떤 아이에게 시켜 봤는데 아주 좋아하더군요 ㅎㅎ). 그런데 어른들, 특히 산스크리트어, 인도 문화 전반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공부하고 싶은 완전 초짜들이 읽어도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어려운 내용은 처음 들어갈 때는 쉬운 포맷으로 시작해야 장벽이 낮아집니다. 힌두 신화의 주인공 격 몇몇 캐릭터만 확실히 잘 알아도 그게 뼈대가 되어 다른 연관 신들이 머리 속에 잘 정리됩니다.

저자 하 박사님은 "인도에서는 특히 부녀자들이 익히는 필수 교양 중 하나가 인도 신화이며, 손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베틀로 천에 수를 놓거나 하는 방식으로 이를 표현"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나라도 조선 후기부터 서민층의 각성을 통해 고급 예술의 컨벤션에 얽매이거나 기 죽지 않고 자유로운 붓끝을 놀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책에 수록된 여러 작품들은 보기에 유쾌하고, 공감을 끌어내고, "뭘까?' 하는 호기심으로 시선을 잡아챕니다. 사실 이 책의 텍스트를 구태여 쪼아붙이지 않더라도, 책에 실린 그림 구경만으로도 시간이 훌쩍 지나갑니다. 그림에 설명이 없어도 재미있는 각각의 그림들인데, 전공자의 정확하고 흥미로운 설명까지 달려서 더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더군요.

"신들은 하나이지만 다른 이름들로 불린다." 그 심오한 뜻이야 우리가 미처 깨달을 수 없겠지만, 창조, 보호, 파괴를 각각 담당하는 세 신이 힌두 신화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은 잘 명심헤야 할 것 같습니다. 어느 신화에서건 "빛"이 창조의 수단이요 시작점이라는 건 공통이라서 재미있습니다. 제임스 캐머론의 영화 덕분에 더 유명해진 "아바타"라는 단어(그 이전에 게임의 역할도 컸지만)도 이 신화, 이 오리지널리티 속에서 그 생생한 의미를 새로 우리에게 밝힙니다.

그리스 신화 등과는 닮은 점도 간혹 보이지만 다른 점이 당연히 압도적으로 많고, 그 전에 비교 대상도 아니다 싶을 만큼 내용이 많고 풍부합니다. 신의 숫자만 수백 억이라는데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태양신은 많은 신화 체계에서 주신(主神) 포지션이지만 그리스 신화에서는 헬리오스, 아폴른 등이 따로 맡고, 여기 힌두 신화에서도 "수리야"가 별개로 있습니다. "삶의 풍요로움을 가져다 주는 신"이라는데, 가장 당연한 듯 그 혜택을 접하면서도 우리가 그 고마움을 곧잘 잊곤 하는 존재입니다. 천체의 비중 면에서는 상대가 안 되지만, 해의 신이 있으면 항상 달의 신도 있기 마련이고 그것이 찬드라입니다. 이들에 관한 그림만 해도 여섯 폭이 책에 실렸는데,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그림 같기도 하고 피카소의 작품마냥 달관의 생략이 느껴지기도 하며 마치 신문 만평처럼 풍자와 해학이 묻어나기도 합니다.

문화권에 무관하게 사람의 도리, 예절, 의리, 윤리는 어느 신화 체계에서나 강조되는 덕목입니다. 사람이 받은 게 있으면 베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원수를 갚을 때에는 엉뚱한(무고한) 사람에게 화풀이를 해서 안 되지만, 은혜를 갚을 상황에서는 (은인 혹은 그 관계인에게 갚는 게 불가능하다면) 누구에게나 베풀어도 무방합니다. 어차피 처음에 베푼 이가, 이자까지 쳐서 되받을 생각으로 그리한 게 아니기 때문이죠. 어미새는 새끼를 구해 준 은혜를 갚고 청년이 꿈에도 그리던 처녀와 결혼하게 도와 줍니다. 동물도 그 사는 이치가 이러하거늘 사람이야 오죽하겠습니까. 인종적으로 지리적으로 다소 먼 거리지만, 이런 훈훈한 정서(그리고 이를 표현한 그림의 개성)만큼은 우리 문화와 확실히 닮은 듯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