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소리 웅진지식하우스 일문학선집 시리즈 6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신인섭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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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시절 일본 거장들의 고전을 읽으면 왠지 큰 폭의 공감대가 생기곤 합니다. 우스꽝스럽고 헛웃음까지 나오는 서사나 설정 속에,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보던 익숙한 풍속도가 생생히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긴, 미처 챙겨 읽지 못했다뿐이지 저 무렵 창작된 한국 작가(이 중에는 타계하신 분들도 많죠)들의 문학 세계 역시, 그윽하거나 씁쓸하거나 애잔한 동아시아의 희노애락이 고스란히 잘 묘사된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하나가 다른 누구의 영향을 받았다거나 한 게 아니라, 사람 사는 이야기를 풀어놓다 보면 그처럼이나 짙은 공명이 이미 내면에서부터 이뤄졌던 이유가 그만큼이나 컸던 게죠.

신고 오카타 노인은 아직 정신이 맑고 거동도 과히 불편치 않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그 주변에서 거론하기엔 그저 실례다 이 정도가 아니라 객관적으로 과도한 처사입니다. "죽음"은 그의 주변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화제가 아니라(사실, 누구라도, 어떤 동기에서건, 남의 죽음에 대해 그리 큰 관심 없습니다), 그의 내면이 먼저 불안히 떠올리는 고민거리입니다.

사는 곳은 벽지에 가깝지만 신고 노인은 궁벽한 촌구석에서 농사나 짓다 늙은 인생이 아니라, 젊어서는 도회지에서 직장 생활도 오래 거쳤고 인맥도 적당히 넓습니다. 늙었다고 해서 젊은이들이 보기에 판에 박힌 인식, 거동, 반응만 지니게 되는 게 아니라,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여정과 경로를 거쳐 자신의 영혼 빛깔을 형성했는지가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주변의 지인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불귀의 객이 되기도 하고, 그 중에는 뜻하지 않게 이른 시점에서 인생을 등진 이들도 나옵니다. 역시, 한국의 패턴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중장년 인생들이 가장 큰 충격을 받는 대목은, 어제까지 멀쩡하던 여느 지인의 가족으로부터 갑작스러운 부음을 받아드는 순간입니다. 신고 노인은 이런 이들의 추억과 잔영이 갑자기 제 꿈에 나타나 온갖 상념에 시달리기도 하고, 미처 풀지 못했던 자기 인생의 숙제에 새삼 침잠하는 계기를 삼기도 합니다. 정신은 여전히 맑고 늙은이답게 마음씀도 부지런하거나 이타적인 편이지만, "숙제"에 끌리는 게 어째 자발적인 과정이 아니라 누군가로부터 쿡쿡 눈치나 받은 양 개운치 않은 시작이었다는 게.... 영어로는 inkling,.혹은 hunch라고 부르는 불길한 예감 같은 것 말입니다. 게다가, 그 숙제의 결론은 어째 하나같이 상서롭지가 못합니다. 답이 나오면 개운하고 깔끔해야 할 텐데도요.

정지용의 <향수>에 보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물론 이 작품이 그 정도로 오래 전에 창작되거나 배경이 등장하는 건 전혀 아니지만, 여튼 신고 노인에게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늙은 아내"의 심상을 지닌 그런 배우자가 있습니다. 할머니 성함은 야스코인데, 젊어서 코를 심하게 골던 습관이 결혼하고 나서 고쳐졌다가(이게 신기하죠. 사람의 생리나 행동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묘한 심리적 동인이 작용을 한다는 게....), 오십이 넘어 다시 재발했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신고 노인은 아내의 코를 흔들어 "교정"해 주는데, 이 대목에선 읽으면서 조금 아슬아슬해지는 마음이었습니다. 물론 부부만큼 서로를 잘 아는 사이도 없지만, 자칫 잘못하다가 건강에 이상이라도 생기면 어쩌시려고 말이죠(코골이는 건강 이상의 전조이니 그 원인을 의사의 손으로 다스린다면 또 모를까) . 또 당사자 입장에선 그렇게 코를 골고 자야 그나마 뭔가 후련하지 않겠습니까. 남이 듣기 싫다고 이기적으로 고쳐 주는 건 좀...

아무튼 마나님이 코를 골고 말고는 부차적인 문제이고, 이 가정은 아닐 것 같아도 숨은 문제가 제법 있습니다. 흔히 보던 대로 고부 갈등 같은 건 오히려 심하지 않아 그나마 흐뭇합니다. 자고로 며느리 사랑은 시아버지라고, 신고 노인은 기쿠코에게 꽤 잘 대해 주는 편이며, 야스코 할머니도 그저 무던한 분이니 말입니다. 부부 문제는 누가 되었든 밖에서 함부로 낄 건 아닌데, 아들인 슈이치가 아내와 사이가 좋질 않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이 처에게 폭력을 마구 휘두른다거나 하는 정도는 아니고, 바람이 나면서 서서히 정이 떨어져 가는 수준입니다. 아들이 한심하기도 하고 며느리가 애처로운 건 부부가 함께 느끼는 감정인데다, 친정에서 귀염 많이 받고 자란 기쿠코가 싹싹하게 잘하는 터라(마음에 맺힌 게 많아서 이런 걸 잘 못하죠. 귀하게 커서가 아니라 말입니다) 세대 간 갈등은 아직 미미하거나, 아예 없는 쪽입니다.

생활 속의 이런저런 과제를 해결하려면 장도 보고 외부와 접촉을 해야 하는 형편도 우리 한국의 중소도시 거주 은퇴자들의 모습과 아주 닮았습니다. 남자는 간신히 문지방 넘을 기운만 남았어도 그 생각이라고, 젊어서 건실한 가장이었으며(?) 지금은 손주 여럿을 본 할아버지인 신고 씨이건만 이런 상황에서 (역시 장을 보러 온) 기생들에게 눈이 간다는 게 신기합니다(물론, 당사자에겐 전혀 신기하지 않고, 내가 아직 젊은 증거로 받아들인다는 게 남 보기에야 참 우습습니다).

"저런 게 요즘은 가마쿠라에도 늘어났지요."

별반 심각한 어투가 아닌데도 싸늘한 경멸감이 확 드러나는 짧은 한 마디인데, 놀란 건 우리 독자뿐 아니라 신고 노인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앞서 이 생선 가게 주인이 (여튼) 손님들에게 친절히 하던 품이라 더 그랬던 듯하고, 노인은 생각도 않게(?) 그들 역성까지 들어 준 후에야 자리를 물러납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사소한 사건, 사건이라 부를 것도 없는 시시한 일상이 희한하게 파동의 공명과 중첩을 일으켜, 등장 인물들에게나 밖에서 구경하는 우리 독자들에게, 놀랍거나 가슴이 싸하거나 소소하게 트집잡거나, 아니면 싸구려 훈수(주관적으로만 값진)를 두고 싶은 일들, 일들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원 이런 소재로도 장편 소설 구성이 가능하거나 싶을 정도로요.

소설 속에는 다분히 남성 중심적 시각이 자주 드러나 일부 현대 독자들에게는 불편하다 싶은 구석도 적지는 않을 것입니다. "등을 숨김없이 드러낸, 요즈음의 매춘부였다" 등등, 아무 원색적 묘사 없이도 왠지 뭔가가 자꾸 궁금해지는(역시 남성 독자 입장에서?) 서술이 꽤 많은데, 이게 알고보면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그만의 솜씨가 또 맞습니다. 아침 드라마처럼 개연성 없는 갈등의 얼척없는 폭발을 통해 팍국으로 치닫는 관계가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살피고 또 살피다 에둘러 건네는 한 마디, 표정, 거동 등이 사람 마음을 짠하게 만드는 대목이 참 많습니다.

제목인 "산소리"는 일종의 조짐, 전조입니다. 신고 씨 일생에 무슨 큰 일이라도 벌어질라치면 산이 희한한 소리를 낸다는 건데, 산은 물론 저만치에 크게 버티고 선, 우리 한국에서도 흔히 보는 동네 산 같은 것입니다. 초자연적 현상이라기보다 다분히 불안한 내면의 감정 전이, 대상 투사에 가까운데, 해학적인 건 노인 부부 말고도 아직 젊은 그들의 자녀들조차 요 내력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은근히 신경까지를 쓴다는 사실이죠. 이 작품의 단연 빼어난 점은, 사연 전체를 큰 기복 없이 잔잔히 이어지는 서사로 볼 수도 있고, 인생을 통째로 매개관념으로 갖다 쓴 큰 덩치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는 그 고유의 성취와 미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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