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에 눈이 내리면 러시아 현대문학 시리즈 2
디나 루비나 지음, 강규은 옮김 / 이야기가있는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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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따지고 들기 시작하면 벌써 포스트모던이라 불릴 자격을 잃습니다. 포스트모던에 대한 "담론"이 한창 인기를 끌던 것도 1990년대였으며, 이후로는 왠지 "포스트모더니즘"을 거론하기도 촌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사는 지금은 온통 포스트모던한 행태, 작품, 분위기, 말투로 가득하며, 아닌 것을 찾기가 더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1990년대에만 해도 아직 뭔가 의미를 찾는 게 돋보이던 시절이었는데, 그 시절 열심히 대상보다 훨씬 어려운 방법론을 동원하며 포스트모던을 논하던 이들은 참으로 수고가 많았습니다. 문학과 인문의 해체를 열심히 설파하던 그들의 예측만큼 이후에 철저히 현실화한 것도 아마 유례가 드물 테니 말입니다.

유대계 러시아인으로서 이후 이스라엘로 근거지를 옮긴, 성장기와 주된 활동은 주로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보낸 작가 디나 루비나처럼 독특한 개성과 이력을 지닌 분도 드물 듯합니다. 정녕 포스트모던은 이처럼 혼란스럽기까지 한 정체성을 지닌 분이라야 그 사조를 대변할 자격이 생기는 걸까요? 작가는 1953년생이니 1990년대를 탈의미, 시대의 종언 따위를 입에 올리며 마음껏 청춘을 즐긴 그 세대에 견주어도 거의 부모님 세대뻘입니다.

사실 저는 포스트모던이다, 혹은 다른 어느 유파, 사조에 넣고 이 작품집을 감상하기보다, 시대나 사회와 전혀 융화 안 되는 듯 통통 튀는 개성, 그러면서도 정면으로 대세나 체제를 거스르는 데에는 많이 주저하는, 위대하지도 않고 천재적이지도 못한 채 자신에 대해 끝없이 회의하는 목소리를 내내 경청하며, 즐거운 마음으로 읽어내려갔습니다. 하루키에 대면 그나마 일정한 스타일이 갖춰져 있고(보다 체홉에 접근한다고나 할지), 대중을 향한 배려라면 또 조금 소홀하고... 여튼 다 읽고 나면 어떤 뚜렷한 그림은 그려집니다. 서사가 뚜렷이 안 잡히는 모호한 단편은, 1990년대 한국의 이상문학상 수상집 같은 데에서도 많이들 보던 것입니다.

<두 개의 성>은 이 작품집의 한국어판에만 수록되었다고 하며, 비교적 줄거리가 선명히 독자에게 접수되는 편입니다(그래서 아마 TV로 극화될 수 있었는지도). "나"와 그녀 사이에 격한 갈등, 반목의 대화가 오가는 등 연극 한 편의 넉넉한 원작으로 기능도 할 듯합니다. 결말도 다소 충격적인데, 이런 돈강(頓降)의 마무리는 일찍부터 러시아의 거장들이 즐겨 구사하던 이지적이면서도 감성의 허점을 정확히 찌르고 들어가던 수법이죠.

<초록 대문 너머의 집>은, 아마도 엄마에게 홀로 길러지는 듯한 어린 소녀가, 말 그대로 초록 대문 너머의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하는 여선생의 립스틱을 훔치는 버릇 때문에 빚어진 작은 소동에 대한 1인칭 주인공 시점의 단편입니다. 소녀는 "초록 대문 너머의 집"에서 본 수수께끼의 남자에게 포도를 건네주는데, 왠지 남자의 궁핍한 듯한 몰골로 보아 자신이 그런 행위를 할 필요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꽤 컸다고 판단을 했나 봅니다. 소녀는 계속 스스로에게 불편과 불만, 좌절감을 느끼는데, 유독 약지로 건반을 잘 누르지 못하는 데서 이런 부정적 감정이 계속 솟아나게 됩니다.

소녀를 "현행범으로 잡은(선생 자신의 표현)" 피아노 선생은 "네 속은 어쩜 이런, 나쁜 것들로만 가득 차 있니!"라며 꾸짖지만, 소녀는 기이한 자기 방어 기제, 혹은 현실 왜곡을 통해 곤경을 모면하고 죄의식을 떨어내려 듭니다. "그 남자는 선생님의 남편인가 보다." 자신이 명확히 알고 있는 사실은 선생에게 되물으면서 논점을 흐리려 하고, 헷갈리는 사실은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속으로만 합리화합니다. 나중에 그 어머니는, "내게 없는 게 립스틱이었으니 신기해서 네가 훔치려 들었나 보다. 이 사실을 아빠에게 말 할까?"라고 딸에게 물어 봅니다. 더 자라서도 이 경험은 소녀의 마음에 계속 응어리로 남는데, "도둑" 이야기만 어디서 나오면 "나도 저랬었는데" 하며 당시의 굴욕과 타락한 느낌을 재생합니다. "초록 너머 대문의 집"은 처음으로 도덕관의 혼란과 죄의식을 소녀에게 깨우쳐 준 "레슨"의 공간이었습니다.

<모든 게 같은 꿈이로구나!>에서는, 앞(<괴짜 알투호프>)에서 나온 보리스 고두노프가 또 언급되는데, 물론 푸시킨의 작품 속 캐릭터로서입니다. 이 단편집에서 유독 푸시킨이 자주 인용되는 건 물론 러시아 문학에서 그가 차지하는 불멸의 거장으로서의 위상이 있긴 하나, 생전에 영원한 국외자, 이방인이었던 그와 작가 루비나 여사 자신 사이에 어떤 큰 동질감도 느껴져서였을 겁니다. 극중에 연극 무대가 배경의 일부로 쓰이고, 오가는 대사 역시 첨예한 의지의 대립을 표현하는 연극투가 많이 사용되는군요.

<괴짜 알뚜호프>에는 말 그대로 알뚜호프라는 천재성 기인을 대학 시절에 사모라도 했다는 듯 작가 자신의 자전적(으로 보이게 한) 회고가 담겼습니다. 발상도 기발하고 언어감각도 탁월한데다, 무엇보다 느낌과 생각을 표정과 동작 속에 순발력 있게 표현하는 재능이 대단합니다. 생긴 건 지독하게 못생겼으나 1인칭 화자 디나(작가 이름 그대롭니다)는 완전히 그에게 매료되었습니다. 그처럼 못생긴 사람도 본 적 없고, 그처럼 매력적인 남자도 다시 못 만날 듯합니다. 설령 모국어라 해도 아이들은 자모의 정확한 조음이 힘든데, 알뚜호프가 친하게 지내는 유르카란 아이는 Р (р) 발음을 잘 냅니다.

11월 시위에 대한 언급도 있고, 특정 학생 조직에 속한 듯 상부의 지휘도 받는 걸 보면 분명 이 단편은 어떤 정치적 격변기를 배경으로 삼습니다. 재미있는 건 두 인물이 끊임없이 떠올리는 데카브리스트 운동, 개화와 유럽 지향의 상징 상트 페테르스부르크, 혁명 후 바뀐 이름인 "레닌그라드" 등의 이름이 맥락에 따라 계속 교차 언급된다는 점입니다. "그렇다. 나는 알투호프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이 알투호프가 과연 실존 인물인지, 어떤 초시대적 개성을 의인화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적어도 엠마뉘엘 카레르가 리모노프를 바라본 태도와는 서로 극과 극이라고나 해야겠습니다.

단편 <토요일마다>에는, 자신의 이름이 타냐였으면 좋겠다고, 아주 예쁘지는 않아도 남들만큼만 무난했으면 바랄 게 없겠다고 여기는 예바, 예프카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는 우울해집니다. "저건 누가 봐도 키키모라(러시아 민담 속의 도깨비)의 얼굴이야!" 여튼 예바가 기특한 건, 아빠가 가정을 버렸고 엄마와도 불화하며, 청승맞게 할머니가 고작 길러 줄 뿐인, 여러 모로 불운한 자신의 처지를, 악착같은 남탓이나 뻔뻔스러운 거짓말, 허황된 변명, 비틀린 내면의 격렬한 발악인 폭력 따위로 얼버무리거나 도피하려 들지 않고, 이처럼 현실에 대한 냉철한 수긍으로 대응하는 저런 정직함입니다.

"전 재판관이 아니에요. 아빠. 그리고, 아이와 2년이나 떨어져서 살 수 있는 여자를 비난하는 건 아무 소용도 없다는 정도는 잘 알고 있죠. "

암만 못생기고 가난해도 이 정도씩이나 현실과 자신의 내면에 솔직할 수 있는 여자라면, 아쿤딘이나 류리크, 지마 같은 멋쟁이들과 충분히 근사한 연을 맺을 수 있을 겁니다. 남들에게 판단(비판) 받을 구석이 가장 많은 비뚤어진 품성을 가진 오랑우탄이라야, 얼척 없는 구실을 들이대며 정신병에 가까운 현실왜곡과 중상 모략을 일삼게 마련이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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