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련 :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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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바로 이 순간을 낚아채십시오!"

우리는 보통 라틴어 격언 중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대사 덕분에 유명해진 Carpe Diem을 두고 "지금을 즐겨라"로 번역하지만, 사실 동사 carpo(carpere)에는 그보다 더 적극적인 뜻이 담겨 있습니다. 풀을 쥐어뜯듯, 혹은 꽃을 꺾듯(...) 좀 강렬한 동작을 본래는 언표하는 동사(verb)지요. 무심히 흘려 보내는 지금 이 순간의 소중한 느낌 등이, 사실은 돈, 명예, 쾌락보다 훨씬 중요한 보물이고 축복임을, 우리는 흔히 잊고 삽니다. 저자 배철현 교수님의 강력한 권고는 바로 그런 절실한 외침을 표현합니다.

누구나 무대에서 가장 부각되고 싶고, 중요한 역할을 맡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회는 모두에게 주어지지 않고, 안타깝지만 가장 빛나는 주연 하나를 위해 나머지는 봉사하는 조연, 단역에 머물러야 합니다. 무대는 각자가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때 큰 박수를 받고, 이때 느끼는 성취감은 주조연과 단역이 따로 없습니다. 예전에 이준구 서울대 교수님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누군가(아마 타 교수의 TA였던 듯)가 뻘뻘 땀을 흘리며 기자재를 나르자, "그래, 누군가는 해야 할 일 아니겠어?"라며 격려하시던 모습도 생각 납니다.

저자는 어린 시절 주일학교에서 성탄제 연극을 하며, 마음 속으로는 요셉 역(아마 남자아이가 맡을 역 중에는 가장 중요했겠죠?)을 하고 싶었기에, 고된 나귀 가면을 문득 벗어던지고 친구의 주연을 대신 차지하고 싶던 충동이 일던 당시를 떠올립니다.

"만약 그때 내가 느닷 일어서서 요셉 연기를 했더라면, 연극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어떤가요. 꼭 주일학교가 아니라도 무대에 서서 다른 친구들을 빛내 주는 역할을 땀흘려 해 내던 체험은 누구나 있을 겁니다. 운동회 때 고싸움이나 차전놀이 같은 것도 비슷한 기회 아니었겠습니까. 이때 자신에게 일단 주어진 역을 무시하고 벌떡 일어나서 주인공 노릇을 하겠다며 돌출 행동을 보인다..... 사람인 이상 갑작스러운 충동이나 주목 받고 싶은 욕구는 누구나 갖게 마련입니다. 허나 우리는 심지어 그 어린 나이에도, 타인에게 민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 경우 없이 주인공 행세를 하겠다고 설치면 얼마나 꼴사나울까 같은 (뜻밖에 대견스러운) 자제심 때문에, 돌출 행동으로 전체 무대를 망치는 사고는 저지르지 않습니다. 나뿐 아니라 다른 친구들이 그런 짓 하는 것도 자주 겪지 못 한 걸 보면, 이처럼 자기 역할에 충실하여 전체의 앙상블을 제고하려는 의무감도 사람에겐 하나의 천성인가 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꼭 보면, 나잇값 못 하고 자신이 무슨 탤런트나 영화 배우나 된 양, 혹은 사방의 각광을 받고 데뷔나 한 양 유명 작가의 환영에 사로잡힌 얼띤 광대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행여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고 느닷 캐스팅이라도 되어 신분 상승이 일거에 이뤄지기라도 할 것처럼, 도대체 현실 감각이 없고 분수를 모릅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온갖 막장 드라마가 근본을 잃고 뒤섞여 썩은 짬뽕의 난장판을 이루며, 마침내 남편과 자식에게도 버림 받은 채 가축보다 못한 늙으막을 보내며 궁핍에 찌든 일상에 침몰할 뿐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나답지 못한 것을 과감히 버리십시오!" 거짓된 아바타는 버려야 합니다. 머리통(그런 걸 머리라고 부를 수 있다면)으로부터 군내나는 남의 짬뽕사리를 솎아낸 후, 빈약하고 허술하나마 자신의 시냅스를 채워 넣여야 합니다.

Nunquam ponenda est pluralitas sine necessitate

이 말은 윌리엄 오캄이 그 출전으로서, 진리를 구명하거나 논증할 때 가능하면 가장 단순하고 명쾌한 방법이 최상이라는 뜻에서 표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란 더 업축된 표현으로도 이 원칙을 잘 알고 있죠. 경영학 중 마케팅론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할 때, "디자인은 그저 외관의 꾸밈이 아니라 그 기능성의 가장 압축적인 표현"이라고 합니다. 군더더기가 없고 간단 명료하되, 본연의 기능을 가장 잘 수행하는 모양새야말로 최상의 디자인이란 뜻입니다. 만약 앞의 예에서, 나귀가 행여 요셉 같은 주인공의 역할을 탐내지는 않았다 쳐도, 혹시 주연에의 미련 때문에 연기 중에 쓸데없는 추임새나 시늉을 넣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역시 연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 위험 요소로는 손색이 없습니다. 잉여의 동작이나 부품은, 그저 불필요한 게 아니라 위해(危害) 요소인 것입니다. 보헤미아의 종교개혁가 후스는 자신의 화형대에 장작을 지고 나르는 노파를 보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O sancta simplicitas!" (아, 저 성스러운 단순함이여!)

제 할 일을 말 없이 해 내는 나귀 같은 노파, 이 노파의 잔손길로 화형주에 묶인 후스는 곧 처참한 죽음을 맞을 운명이었으나, 이 성인은 그 와중에서도 진리의 일각을 나꿔챈 것입니다. 책 서문의 "지금 이 순간을 나꿔채십시오!"라는 말은 그래서 더욱 울림 깊게 들립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문법(그람마. γράμμα)은 단순히 단어를 배열하는 기술이 아니었습니다. 전략적으로 단어를 배치하여, 같은 배열 속에서도 이중삼중으로 의미가 해석되게 하여, 마침내 독자에게 가장 선명한 의미와 심상만을 남기는 고도의 지성적인 작업이었던 셈이죠. 저자는 말합니다. "그람마는 곧 최적의 배열이며, 그래야 글이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저자는 하버드대에서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인류 최초의 언어 중 하나인 수메르어를 가르치는 톨키드 야콥슨 교수의 강의를 기다리던 그 설레는 순간을 기억합니다. 이처럼, 최고의 스승은 역시 최고의 스승에게 배운 분이라야 그 적통(適統)의 맥을 잇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서 저자는 자신이 강의를 듣던 그 방, "룸-G"에서 책들마다 고유의 냄새를 풍기던 그 묘한 감회를 다시 떠올립니다. 책들은 저마다의 역할과 개성으로 그 오랜 세월의 더께를 자신의 몸에 입혀 왔습니다. 책들은 "자신 아닌 것"의 부호와 개성을 과감히 떨쳐 내고, 대신 "자신 다운 개성"만으로 내면을 채웠습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수련, 정진"의 효과입니다. 그 본체는 "나 아닌 다른 잡스러운 걸 제거하고, 온전한 나로 되돌아가는 노력"입니다.

저자는 앞에서 "체조 선수의 근육에는 불필요한 부분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그의 몸은 아름다우며, 동시에 그 몸이 빚어내는 동작 역시 아름답다"고 쓰셨습니다. 우리도 야구를 볼 때, 홈런을 예사로 쳐 내는 강타자의 스윙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는 걸 느낍니다.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필요 이상의 사치나 호사는 모두 잉여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컨대 백화점에서 과도한 소비를 하며 남보란 듯 무분별한 투전(投錢)을 일삼는 자는, 사실 내면이 빈 열등감을 만회 못 하여 일부러 쇼를 하는 중입니다. 그런 자에게는 그 어러석음의 대가로 반드시 하늘에서 천벌이 떨어져 소정의 시련을 치르게 할 것입니다.

시련이란 무엇입니까? 저자의 말에 따르면 불필요한 군살과 잉여 근육을 몸에서 제거하여, 혹독한 훈련 끝에 마침내 흉한 살이 모두 커팅되고 연기에 필요한 근육만 남은 그 운동선수의 아름다운 상태를 만드는 게 바로 시련이라고 합니다. 그는 고된 훈련을 견디다, 어느새 자신이 겪는 시련을 보다 초연한 자세에서 관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패자로서 주저앉느냐 아니면 다른 존재로 거듭나느냐의 갈림길입니다. 이를 두고 고대 그리스인들은 "페이라조(πειράζω)"라고 불렀는데, 저 어미(語尾)에 붙은 -ω나, 라틴어 carpo의 -o나 모두 1인칭 직설법 현재를 뜻합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들은 수련의 장으로 들어옵니다. 군더더기를 제하고, 허상과 허풍과 거짓을 솎아내고, 오롯이 우리 자신으로 돌아올 수 있을 때, 비로소 진정한 안식과 마음의 평화가 찾아옵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근육은 부단히 수련해야 하며, 훈련 없는 근육은 마침내 무감각에 이른다. 환각은 자신을 훈련하지 않은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 그는 점차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 '헛것'을 추구하는 환각에빠진다." 얼마나 무서운 결과입니까. 인생이 싸구려 막장극과 근본 없는 판타지의 혼합으로 추락하지 않으려면, 저런 망상을 버리고 부단한 수련(修鍊)에 집중해야, 우리네 생이 수련(睡蓮)처럼 아름답게 거듭날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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