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순종 세계기독교고전 59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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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은 기독교인의 가장 아름답고 성스러운 덕목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목사님은 유독 이 "순종'이란 덕목을 놓고 여러 주옥 같은 말씀을 하시는데, 저자인 당신께서 철저히 행동에 옮긴 미덕이기에 그의 글을 읽는 교인들이 더욱 신실한 마음으로 교화되는 게 아닐지 저는 생각합니다.

같은 저자께서 쓰신 다른 저작 <순종의 학교>가 있습니다. 온유하고 덕망 높으신 선생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녀들에게 조용히 가르치는 덕목이 바로 "순종"이며, 이 거친 세파에서 온갖 불합리를 겪으면서도 "섭리에는 더 깊고 오묘한 어떤 계획이 있으려니" 하며 그를 따르는 우리들이 바로 학생이고, 생생한 교훈을 삶 속에서 배우게 하는 세상은 바로 "순종의 학교"가 아니겠습니까. 혹은, 성도들이 모인 교회 역시 순종의 학교라 불려 백번 타당하고요.


앤드류 머레이의 청신하고 울림 가르침 중 단연 새겨들을 만한 부분이, 이를테면 이런 구절들입니다. "양들이 순종하려고 애 쓴 후에 양순해지던가요? 또, 늑대가 사나워지려고 잔뜩 용을 쓴 후에 비로소 포악해지던가요? 아닙니다. 순하건 포악하건, 이는 모두 그들의 천성일 뿐입니다."

여기까지 들으면 대번에 우리는 마음에 동요가 일어납니다. 어떤 분은 "그럼 나는, 과연 양인가, 이리인가?" 양을 자처하자니 그간 숱한 고비에서 불순종했던 거칠고 모진 행실이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늑대인가? 물론 나는 이웃에게 불성실하게, 냉정하게, 잔인하게 대한 적이 많겠습니다만, 그렇다고 악한 처신 하나로 일관한 것도 아닙니다. 여튼 완전한 늑대가 아니라서 안도하기도 하지만, 지금 "완전한 순종"을 가르치고 계신데 양을 온전히 닮지도 못한 게 또 분명하니, 우리 마음은 여전히 불편합니다.

"왜 우리는 굳이 수고를 들여야 양처럼 순종할 수 있나요? 하나님의 자녀되기에 많이 부족해서입니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우선 우리는 누가 뭐래도 자랑스런 주님의 자녀들입니다. 한편,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는 그간 완전한 순종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천성으로 양처럼 순종하기엔 또 늑대를 상당히 닮았습니다. 이제 양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건 알았습니다만, 그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머레이 목사님은 말합니다. "성령이 임하셔야 합니다."

이게 결국은 모든 답을 대신하고, 그 자체가 해답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약의 율법 일체의 번거로움을 폐하고 이렇게 이르셨습니다.

"너희에게 새 계명, 언약을 줄 테니, 서로 사랑하라. 이것이 유일한 계명이다."

얼마나 간명한 가르침입니까? 또, 사랑은 진정 모든 증오와 갈등과 번민과 탐욕을 일시에 잠재우는 특효약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사랑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역시 우리는 온전한 양이 아니므로, 수고가 그 길을 걷는 데에 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 안타까운 건, 우리가 아무리 혼자 수고를 들여도 그 길이 쉬이 찾아지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이 책 역시 거듭남(중생. 重生)의 오묘한 이치를 거듭 강조합니다. 머레이 목사께서 펴드시는 성경 대목은 바로 로마서 7장입니다. "하려고 하는 뜻이 내 속에 잇으나, 하려고 해 보면 할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어떻습니까? 마음은 구름 같습니다. 의지는 충만합니다. 그러나 신의 일개 피조물인 내가 너무도 미미한 존재이기에, 매번 우리는 땅에 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께 기대어야 하는 겁니다. "아버지, 제가 이처럼이나 힘 없고 미미하니 저를 살려 주소서. 당신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나이다." 바로 이런 깨달음으로 인해, 장 칼뱅은 구원 역시 인간의 행위가 개재되는 게 아니라, 절대적으로 신의 은총에 의해 가능하다고 단언하고, 교리로서 이를 정립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물론 우리는 육신의 삶, 세상의 삶을 떨쳐 내고 주님 안에서의 정결한 생을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양(羊)이 아니기에, 그저 가만 앉아서는 경건한 삶이 불가능합니다. 허나 노력만 한다고 다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또 문제입니다. 바로 이때 성령의 은혜가 모든 것을 마무리짓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기도에 내려주시는 주님의 응답입니다. 내가 양의 천성에 가까워지려 수없이 울부짖고 어버이께 기댄 끝에, 예정된 구원을 주께서 비로소 내려 주는 겁니다. 구원은 다른 게 아니라, 우리 마음이 양처럼 어린이처럼 깨끗해지는 겁니다.

"착해지기만 하면 다인가요? 돈도 벌고 똑똑해지고 남들 보란 듯 살아야죠."

바로 그게 틀린 사고방식입니다. 물론 잘산다고, 많이 배웠다고 죄악이 되는 건 아닙니다(그나마 대부분은 잘살지도 못하고 배운 바도 거의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주제에 딴청이나 피우고 허세나 떨면서 정작 중요한 언약과 계명은 내팽개치는 게 이들 간악한 무리의 공통점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미 간단하면서도 본질되는 길을 이미 가르쳐 주셨는데 우리는 이를 모른 체 한다는 게 우습다는 겁니다.

"왜 우리는 서로 사랑하지 못합니까? 왜 완전한 순종이 힘듭니까?"

이는 질문과 답이 서로 꼬리를 물고 있습니다. 벌써 순종이 어렵고 힘들다는 투정 속에, 불순종의 죄가 슬슬 꼬리를 드는 겁니다. 한편, "그렇다. 순종이 답이다. 순종하면 성령께서 어느새 임하시고, 믿음과 사랑도 덩달아 내 안에 풍성해진다."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벌써 길이 보이는 겁니다. 머레이 목사님 말씀은, 어리석은 우리들이 제 길을 찾지 못하는 게 안타까워서, 지름길 하나를 넌지시 알려 주는 겁니다. "안 보이면, 힘들면, 일단 순종부터 시작하는 게 어떤가?"

과연 명답입니다. 구약의 욥이, 그 부지런하고 유능한 분(욥 자신)의 신상에 온갖 재앙과 불운이 닥칠 때, 어떻게 했습니까? 물론 그는 이런 일을 당할 이유가 조금도 없는 현인, 선인이었기에 처음에는 원망도 했습니다. 사실 저는 속으로 욥이 이런 원망도 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만, 구약은 그럴 경우 못난 우리들이 너무도 절망(도저히 우리는 욥 같은 성인의 경지를 못 따라하겠으므로)할까 싶어 이를 적절히 배려하지 않았나 싶을 정도입니다. 여튼 그래서, 욥은 어떻게 했나요? 철저히 순종했습니다. 욥은 잃었던 걸 모조리 찾고 더 번영했을 뿐 아니라, 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가 되었고, 무엇보다, 이게 중요합니다만, 악마를 철저히 부숴 버린 승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철저히 순종해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렇게 하셔야 할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우리 죄를 씻으려면, 대신 씻어 주시려면 그렇게 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그때 대속해 주지 않으셨으면 벌써 이천 년 전에 다 죽었을 겁니다. 그 크신 사랑 덕분에 아직도 생을 이어가고, 그 와중에도 또 죄를 짓고 방자하게 굽니다. 이제 다시 순종 없이는 예수님의 희생이 무위로 돌아갈 판입니다.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순종이란 이처럼이나 중요합니다. 어리석고 한심한 우리는, 예수님이 그처럼 쉬운 말로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말을 말로 꼬고 비틀고 청개구리 짓을 합니다. 사랑이 어려우면 어떻게 할까요? 앤드류 머레이는 다시 쉬운 말로 바꿔 주는 겁니다. "주님께 순종하라." 과연 탁월합니다. 곤경에 부닥치면 어떻게 합니까? "순종합니다." 어떻게 순종할 수 있습니까? "성령이 임해서입니다."

순종을 어떻게 시작할까 고민하지 마십시오. 정말 마음이 있다면 일단 순종부터 하고 보는 겁니다. 이 작은 순간에도 성령은 이미 임하시어 우리를 돕습니다. 순종은 알고 보면 숨 쉬는 것만큼이나 쉽습니다. 그러나 환자에게는 숨 쉬는 게 가장 어렵고, 우리가 순종 못 하는 이유는 바로 영혼에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요 병은 우리가 못된 마음을 품는 사이에 사탄이 몰래 씨를 뿌리고 간 겁니다. 어째 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은 저 구석에 버려 두고, 사탄이 던져 준 달콤하고 해로운 사탕만 입 안에 고이고이 굴리면서 자발적으로 건강을 해칩니다.

우리는 보호를 받습니까? 양은 목자의 보호를 받습니다. 선한 마음은 그 자체가 무한한 축복이나, 늑대의 이빨에 그 자체로 대항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늑대가 찢는 건 고작해야 양의 살갗이며 그 마음까지 침노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순교자들은 모진 형벌을 받아가며 죽음을 감내할 수 있었습니다. 죽는 건 고작 육신이나, 사는 건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입니다. 앤드류 머레이는 베드로서를 인용하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둘째는 믿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


이런 보호는 오로지 온유하신 주님에 대한 무조건적 순종에서 비롯합니다. 주님은 심지어 우리의 반항과 일탈까지도 우리의 자유에 일임합니다. 이처럼 그의 사랑이 무조건적이기에, 우리도 그에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겁니다.


순종, 오로지 순종입니다. 시늉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 책 제목을 다시 보십시오.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완전한 순종" 순종에는 티끌만한 사심도 계산도 위선도 끼어들어서는 안 됩니다. 믿음 역시 주님께 온전히 순종한다는 착한 마음이, 내 영혼을 완전히 감싸고 돈 후에야 제 자리를 잡습니다. 머레이 목사님은 다시 갈라디아 서를 인용합니다. "육신에 따라 살지 말고, 오로지 성령에 의지해 살라." 그러나 어리석은 우리들은 성령의 임재하심을 눈 먼 듯 알지 못합니다. 어떻게 하면 성령을 의지할 수 있습니까? 바로 순종입니다. 무조건으로 복음과 말씀과 주님께 순종하십시오. 그러면 절로 성령이 우리 미천한 피조물들의 갈 길을 알려 주십니다. "완전한 순종", 이 위대한 신학자는 믿음의 본체를 이처럼이나 알기 쉽고 실천에 바로 옮길 수 있는 덕목으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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