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 개정판
김우중 지음 / 북스코프(아카넷)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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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누구의 입에서 나왔건 간에 이 말은 참 타당한 언명입니다만, 한때는 말 그대로 세계 경영을 외치며 감히 한국인이 발 디딜 엄두를 못 내었던 시장을 개척하기도 했던 분이 주창했기에, 이 문구를 제목으로 단 책이 그토록 큰 호응을 얻었던 거죠. 그 책이 나온지 근 30년이 지났습니다만, 지금 출판사도 바뀌고 깨끗한 양장으로 새 옷을 입은 이 책을 다시 보아도, 여전히 텍스트에서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샐러리맨의 신화를 일군 분의 증언이고 회고이니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대우의 가족들은 비행기를 타고 외국 드나들기를 일상처럼 한다."(p76) 꼭 이 책 중이 아니라도 역시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사실 지금도 구(舊) 대우 소속 계열사(그룹 해체 후 여러 군데로 인수되었습니다만) 출신 직원들은 "대우맨"이었음을 자랑스럽게 회고합니다. 대기업 네임 밸류를 우습게 여기는 이들은 그럴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거기 속해 본 적 없기에 (오히려 경력 부족을 자백하는) 유치한 허세를 떠는 겁니다. 남 비난하기는 쉽고 남 탐욕을 단죄하기도 쉬우나, 정작 남들 하는 대로 뭔가 적극적인 성취를 일궈 보라면 아무도 자신 있게 손 들고 못 나섭니다.

김우중 회장은 정말 해외 출장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분이죠. 당시 아직 국적항공사가 대한항공밖에 없던 시절 한진그룹에 몰아준 돈만 해도 얼마이겠습니까ㅎㅎ. 너무나 피곤해서 어떤 때는 비행기 복도에서 누운 채 잠을 자기도 했다는군요. 당연 규정 위반이라 스튜어디스가 주의를 주기도 했는데, 그래도 갑질 소동이 일어났다든가 하는 후일담을 들어본 적 없습니다. 아주 예전 일이므로, 행여 열정과 번아웃을 가장해서 따라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예전 일이므로, 심지어는 직원 회의를 하다 통금 시간을 넘겨 근처 여관에 집단 투숙하여 일정을 이은 적도 있다고 하네요. 이 당시 대기업 회장들은, 당시 나라가 다들 못살 시절이어서 그런지는 모르나 대개 매너가 소탈했습니다. 자영업자(요식업자, 숙박업자)들도 신분 차를 의식 않고 무람없이 대했습니다. 후계자들의 갑질이 횡행하는 요즘 같으면 사람의 급이 다르기라도 한지 감히 쳐다보게도 못하게 하겠지만 말입니다.

"일을 하면 활력이 솟는다." 참 불가사의한 소리인데 일도 그저 남 보란 시늉하듯이 하거나, (안타깝지만) 의무감, 성실성, 강박 관념 때문에 하는 이들은 건강이 쉬이 나빠집니다. 반면 이처럼 자기 일을 하면서 두뇌에 엔돌핀이 도는 분들은 건강이 참 좋더군요. 일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는 게 아니라, 오히려 성취감으로 영양, 에너지원을 공급 받는 겁니다. 김 회장이 공개하는 또하나의 비결은,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어찌 보면 편식 않는 분이 건강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건강이 좋아야 편식을 안 하게도 되는 듯합니다. 김 회장이 빼놓지 않는 이야기는, "밥을 잘 먹는 사람이 친구도 잘 사귄다"입니다.

김 회장이 그 전성기에 쾌속으로 사업을 확장할 수 있었던 건, 이처럼 놀라운 친화력 덕분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흔히 리비아 카다피 국가 원수라고 하면 동아그룹 최 회장만을 떠올리는데, 김 회장도 그 친분이 매우 두터웠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직 베트남 등지에서 재기를 모색하는 것도(많이 힘들다는 전언입니다만), 역시 다른 사람이 좀처럼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매력이 있기 때문이죠. 대북 사업 하면 고 정주영 현대 창업자만 연상하지만, 한때 삼성 이건희 총수는 "대북 사업에서 우리는 대우만 못하다"고 털어놓은 적도 있습니다. 이런 재능이 있었기에 그가 "세계 경영"을 한때 운위할 수 있었죠.

"기독교에서 청지기 의식이라는 게 있다. 사람이 죽어서 재물을 싸들고 저승에 갈 것도 아니고, 예수도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기보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게 어렵다고 했다." 확실히, 대우 김 회장은 예컨대 지금도 간행되는 아카넷의 "대우 학술 총서" 사업이라든가, 각종 문화 재단 출범 같은 걸 다른 기업에 앞서 벌인 경영자입니다.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겠으나, 여튼 그런 제스처도 다른 대기업보다 더 앞선 시점에 시작했다는 자체가 어디겠습니까.

"도덕적으로 용납 못 할 일이 아니고서야 젊은이는 무엇이라도 해 봐야 한다." 그런 도전 정신이 있었기에, 젊은 나이에 김 회장은 남들이 고등고시나 안락한 전문직 자격 취득에 골몰할 때 배포 좋게 사업에 뛰어들 생각을 먹었던 거죠. 그는 교육 명문가 출신이었고 그의 형제들은 모두 학벌과 평판 좋고 존경 받는 직업을 지닌 이들입니다. 그의 친형 되는 분은 김대중 정부에서 장관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유독 그만 험한 사업판에 뛰어들어 고생을 자초한 겁니다.

"무슨 일이든 재주 있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겨야 한다. 나는 돈 버는 재주가 있으나 쓰는 데에는 맹추이다." 이 말은, 문화 후원 사업을 할 때 자신은 적임자에게 전권 위임을 했을 뿐 일일이 간여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말은 쉬운 듯 보이나 사실 CEO들은 괜한 아집 때문에 자신이 직접 만기친람형으로 나서거나, 쓸데없는 선입견으로 사람을 제자리에 쓰질 않습니다. 조직이 망하고 사업이 꼬이는 이유는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신상필벌이란 말이 있죠, 엄하게 할 때는 엄하게 하되, 잘하는 일에 대해선 상을 후하게 주라는 뜻입니다. 김 회장은 책 곳곳에서 이 말을 강조합니다. 자신은 대우맨들에게 반드시 업적을 평가하고, 후한 포상을 통해 모범적인 전례를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대우맨들이 지금도 회장의 재평가가 필요하다며 열심히 뛰는지도 모르고, 타 그룹에 비해 배신자가 적게 나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독자들도 우선 자신의 진정한 장점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내어, 혼신의 힘을 다해 일로매진 하는 그 자세가 중요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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