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의 학교 세계기독교고전 58
앤드류 머레이 지음, 김원주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1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순종의 학교". 제목을 들어 보면 예전 KBS에서 방영하던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생각나기도 합니다. "사랑의 학교 우리 학교. ♫새하얀 알프스가 보이는 곳...." 아니 데 아미치스의 원작은 이탈리아 배경인데 거기서 알프스가 왜 보이나? 같은 생각도 어렸을 때 했지만(이탈리아 하면 로마나 나폴리, 시칠리아 부터 대뜸 떠올림), 1) 키살피나, 트란살피나 라는 말이 있듯 알프스 산맥은 본디 이탈리아와 非이탈리아를 가르는 지리적 문화적 경계 중 하나였으며 2) <쿠오레>의 배경(즉 엔리코, 데로시 등이 다니던 학교)은 더군다나 토리노 소재이기까지 하니 저 가사에는 아무 하자, 오류도 없는 셈입니다. 학교는 요즘 폭력의 온상으로도 대두하여 사회에 우려를 안기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린이들이 옹기종기 앉아 자애로운 선생님께 지혜와 지식을 전수 받는 모습이 우선 떠오르는, 일단은 정감 어린 이미지입니다. 그렇지 않을까요?

"순종". 중세 기독교 신학에서(뭐 지금도 가톨릭은 그렇습니다만) 대죄, 큰 죄의 하나로 꼽던 게 "오만"이었습니다. 우리 동아시아에서는 이런 전형에 꼽힐 만한(그걸 죄로 보든 아니든 간에) 사례가 좀 드뭅니다.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 칠현 중 하나인 완적, 혹은 명나라 때 이탁오(이지), 혹은 이문열이 그렇게 까는 삼국시대(정확히는 후한 말기)의 예형 등이 이에 해당할까요? 아니면 주체에게 입을 찢겨 죽은 방효유? 비슷하기는 해도 정확히 해당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반대로, 마지막 사람은 완강하게 신앙을 고집하다 "순교"한 기독교 성인들과도 맥락이 통합니다. 대체로 동아시아에서 "지적 오만"을 내세운 이들은, 구태여 찾자면 윤휴, 박세당 처럼 독자 학설을 내세우다 이른바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예가 있겠으나, 이마저도 기독교적 "오만"의 경우에 포섭하기엔 다소 난감한 대목이 있습니다.

여튼 "오만"은 "순종"의 반대어입니다. "순종"의 미덕을 내세우는 건, "오만"의 악덕에 빠지지 말라는 가르침과 정확히 통합니다. 이 배경에는 중세 스콜라 철학이 아리스토텔레스 체계에 깊이 기반하며, 오로지 이성과 논리로 신의 오의를 재단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가 깔려 있긴 했습니다. 물론 책 저자, 19세기 프로테스탄트의 경건하고 저명한 대표 신학자이신 앤드류 머리(머레이. 이하 이 책의 표기를 따릅니다)의 입장은 그와는 꽤나 다른 성향이지만 말입니다.

체스터튼이 창조한 캐릭터 브라운 신부가 나오는 한 단편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대도" 플랑보가 브라운 신부에게 "어떻게 내가 가짜 신부인지 알았소?"라고 묻자, 브라운 신부는 대뜸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신은 이성을 비난했지. 그건 아주 천박한 신학이오." 그러니 사이비, 가짜는 목소리를 높여 열을 올려도 다 무지를 감추려는 위장일 뿐, 진리는 결코 어느 극단에 존재하지 않음을 (추리 소설인데도!) 작가는 작품 속에서 깨우치려는 의도이겠습니다.

"순종"은 굴종이나 비굴과는 또 다릅니다. 사실 지적으로 오만하기나 하면 그나마 괜찮은데, 그렇지도 못하고 기질만 건방진 사람은 서열의 갑을 관계 앞에 아주 약합니다. 순종은 그래서 내적인 확신이 자리잡힌 사람이, 진리 앞에, 절대선 앞에 당당하게 그 권위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내가 떳떳하면 이유가 있는 굽힘에 머뭇거림이 없습니다. 열등감 많은 사람은 거짓 굴종에는 능하지만, 진짜 몸을 낮춰야 할 상황에서는 오히려 주저하기가 일쑤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순종은 절대적 완전의 개념과 곧잘 연결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종종 오해되기도 합니다. 저자는 특히, "성경의 모든 계명과 질서를 모으고, 순종하는 사람은 이 모든 명령이 보장하는 은혜를 생각하며, 마침내 그는 순종함으로써 은혜를 한 몸에 받는다"는 (잘못된)생각을 강하게 비판합니다. 저자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가진 각각 다른 재능과 능력을 고려하시며, 어떤 조건의 충족보다는 그저 매 순간 매 시간의 순종, 더 정확하게는 어린이의 마음으로 티없이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를 중시하십니다"라고 말합니다(p77). 이 설명에는, 순종과 신앙에는 어떤 현세의 구복, 기복을 바라는 불순한 마음이 끼어들어서는 안 되며, 그야말로 어린이가 부모님을 따르듯이 계산 없는 동기가 유일해야 한다는 뜻이겠습니다. 그러니 순종은 "선함, 착함"과도 동의어입니다. 은혜가 있기에 조건부로 순종한다면 이는 예수께서 성전에서 판상을 들어엎으신(화끈하시죠!) 그 돈놀이꾼들과 다릉 바 없으며, 이미 비굴한 노예이며 사기꾼에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런 자는 지옥에나 떨어져야 합니다.

"순종은 바로 소망을 품음"입니다.(p90) 소망을 품기에, 세상에 대해 긍정적 시선을 유지할 수 있기에 그는 순종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종은 "낙관, 긍정"의 마음가짐과 통합니다. 이런 낙관을 품을 수 있는 사람이라야 제 이웃을 사랑(예수의 새 언약)할 수 있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도 지행 합일의 가르침을 내내 강조했습니다. 아무리 정교한 지식이 머리 속에 내장되어 있어도, 행동으로 영혼으로 이 가르침이 옮겨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대다수의 어리석은 자들은 그나마 서푼짜리 지식도 없고, 어디서 거칠기 짝이 없는 폭주 도그마 몇 마디를 머리에 심고 "네 다리는 좋으며 두 다리는 나쁘다!" 한구절로 홍위병처럼 날뛸 뿐입니다. 혹은 아주 어설픈 개똥철학으로 삶을 달관한 양 유치한 허세를 부리기도 합니다. 저자가 가르치는 순종은, 첫째 지식에 맹종하지 말 것, 둘째 착한 마음으로 참된 진리 앞에 언제나 겸손해지고 그를 배우려 열망할 것, 이 두 가지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은 순종의 미덕을 가르치는 "학교"이며, 우리는 순하고 착한 진리의 학생들인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