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적 혁신 - 부의 추월이 일어나는
제이 새밋 지음, 이지연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파괴적 혁신은 클레이튼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교수가 정리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경영학 개념입니다만, 실제 비즈니스계에서 이를 실천에 옮긴 사례는 역사도 오래되고 그 가짓수도 일일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래서 파괴적 혁신의 필요성이나 마력은, 이를 실제 현장에서 자신의 사업체 운영을 통해 성과를 거두어 본 사람이 설파를 해도 해야 우리 대중, 독자들에게 설득력이 생긴다고 해야 맞겠습니다. 

이 책 저자 제이 새밋은 분명 그런 자격 있는 저자들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서문과 본문 중에서 여태 자신이 어떤 비즈니스 이력을 걸어 왔는지, 어느 상황에서 처절한 좌절을 맛 보고 어떤 국면에서 통쾌한 성공을 거뒀는지, 상당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술합니다. 자계서가 대개 그렇듯 저자 자신이 마음으로부터 존경하고 금과옥조로 여기는 타인들의 사례와 교훈, 명언을 이 책에서도 자주 인용하지만, 저자 자신도 치열한 생을 살아 왔기에 할 말이 많으며, 그 말들이 다른 인용례보다 오히려 독자에게 훨씬 큰 재미를 줍니다.

그래서 저자에게 붙은 별명은 "세상에서 가장 쿨한 직업을 가진 사내"입니다. 사실 그가 걸어 온 이력이 다채롭기에 구체적으로 뭐가 그의 직업인지 딱 짚어서 말할 수 없지만(대체로는 "사업가"라고 할 수는 있겠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과연 고정된 직업이 뭔지 쉽게 규정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넉넉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긴 합니다. 이 책 주제인 "파괴적 혁신"이, 그런 고정된 범주에서 탈피하라는 주문이기도 하고 말입니다.

레이저디스크를 기억하시는 이들이 많을지 모르겠습니다. 1997년만 해도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대부 3> 등 몇몇 상품을 실제로 판매했었습니다. 저자가 이 책에서 술회하는 대로, 기기에 넣고 돌리다 테이프가 감겨서 망가지는 일 없고, 화질은 비교도 안 되게 선명하고, 원하는 구간으로 즉시 이동 가능한 등 종전의 VHS 포맷 등을 크게 앞서는 장점이 많았습니다. 허나 이 책의 저자는 "레이저디스크는 파괴적 혁신이 아니라, 그저 좀 잘 된 혁신에 불과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저자는 이 상품을 처음 보았을 때 당연히 시장을 휩쓸리라고 예상한 많은 대중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스스로 책 중에서 고백하는 바이기도 하고요). 그랬던 그가, 상품의 실패를 사후에 다 지켜 보고서야 속 편한 비판을 하는 건 값싼 결과론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진짜 의도를 이해해야 합니다. 저자의 경우 1990년대 중후반 CD-ROM 사업으로 큰 돈을 벌어 자신의 신나는 개인 커리어의 처음을 열어젖힌 사람입니다. 그가 파악하기로 LD가 망한 진짜 이유는, VHS 포맷과 달리 사용자가 녹화, 기록할 수 있는 기능이 결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소비자는 제공되는 컨텐츠를 수동적으로 소화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방송을 자기만의 공간에 소장도 하고 싶어하며, 종전의 상품이 이 욕구를 만족시켰는데 새롭다는 매체가 오히려 더 제약된 기능만을 가진다면, 자연 실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런 진단은 실제로 CD-ROM 사업으로 재미를 본 분이 하는 말이기에 설득력이 있는 거죠.

"파괴적 혁신"은 그래서 "다소의 향상"이 아니라, 종전의 체험과 만족을 송두리째 탈바꿈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저자가 또 주목하는 파괴적 혁신의 대표적 성공례는 축음기입니다. 토머스 에디슨도 자신이 가장 아끼는 발명으로 꼽은 이 "파괴적 혁신 상품"은, 이 책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엔리코 카루소나 베시 스미스 등 세계적인 예술가의 퍼포먼스를 그저 소수 계층이나 특정 지역 거주자의 전유물로부터, 모두의 안방에서 체험할 수 있는 기적의 환상을 창조한 혁신으로 꼽혀 마땅합니다.

서투르고 미흡한 성과만 거두던 시절이 분명 있었으나 이후 손 대는 사업마다 큰 재미를 보았던 저자 같은 이가, 자신의 성공 비결이라며 내세우는 건 뭘까요? "종전의 고정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시대의 트렌드를 객관적으로 잘 살펴 이거다 싶을 때 바로 치고들어가라."입니다. 이런 건 요즘 같은 세상에 어느 섹터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다 명심할 만한 지침입니다. 예를 들면 주식도 마찬가지입니다. 망하는 사람, 호구처럼 사기 당하는 사람은, 꼭 보면 주견이 없습니다. 제 딴에는 강자에게 편승하고 대세를 탄다며 착각하는데, 몇 박자 늦거나 일이 꼭 끝난 후에 열심히 허우적대니 그게 문제입니다. 아니, 승자를 정확히 예측해서 그에 부화뇌동하는 것 자체야 누가 뭐랄 수도 없습니다. 세상이 본래 그런 거죠. 진짜 중요한 건 타이밍인데 꼭 뒷북이나 치면서 혼자 약은 듯 허세를 떠니 그게 우습다는 겁니다. 저자의 지적은 그래서 특히 이런 변화무쌍한 세상 풍조에서 울림이 깊게 들립니다.

마이클 크라이튼은 장편 <쥬라기 공원>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명체는 반드시 자신의 길을 찾아낸다." 참 무서운 얘기인데 이 말이 속속들이 맞다면 아마 인공지능은 실패하고 말 겁니다. 또 현생 인류의 지혜로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진화론의 신비 역시 단초가 여기서 찾아지는 거겠고 말이죠. "기득권을 가진 공룡들이 서로 싸우는 동안 고객의 니즈는 무시되었다."

한국에도 소리바다 같은 사이트, PC 프로그램(P2P 클라이언트)이 있었습니다만 그 무렵 저자는 EMI에 몸 담고 있었는데, 제가 이 책 읽으면서 저자가 참 약은 분이라고 느낀 게, 아무리 모험 사업을 하면서도 결코 허허벌판에 자기 혼자 떨어져서 위험 부담 큰 스탠스는 피한다는 겁니다. 이 역시 처세 스타일로는 훌륭한 것이고, 이분의 특징이라면 그 와중에서도 현실을 굉장히 냉정히 직시하고, 패배자의 넋두리나 변명거리만 잔뜩 챙겨 두는 마인드는 아주 경멸하고 든다는 거죠. 그는 EMI 근무 당시(정확하게는 정규직 고용이 아니라, 일시 파트너십으로 협력 업체형 참여였던 듯합니다. 여튼 자율권 보장되고 유리한 계약 조건이었겠죠), 냅스터 측의 저작권 침해 사실을 일일이 캐 내고 첨예하게 대립했습니다. 역사의 한 장에 몸을 담았던 셈이죠.

EMI 참여 전 냅스터 측에서 저자에게 찾아와서는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는 게 놀라웠습니다. 그러니 당시만 해도 이 저자가 냅스터 측의 우군이 될 수도 있었다는 뜻입니다. 헌데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구체적인 사업 모델을 갖지도 못했으면서, 그저 유저 수만 많이 확보하면 자연 기반이 잡히겠거니 낙관하더라는 겁니다. 그들이 보이는 자신감은 저자 눈에는 근거 없는 허세로 느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사람의 자질과 그릇을 판단하는 데 소름끼칠 만큼 저자는 정확한 안목이 있었던 거죠. 결과는 우리가 다 아는 대로입니다. 이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있었는데 당시 MBC 백분토론에서 벅스 대표하고 저작권 관계자들이 거의 멱살잡이 직전까지 가는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벅스는 NHN 소속이며 지분 관계 변화에서 큰 우여곡절이 있긴 했으나 여튼 법인으로서는 지명도와 사업 본체를 유지한 채 잘나간다고 봐야 합니다. 역시 사업 모델이 있고 없고의 차이입니다.

"똑똑한 사업가는 자주, 빨리, 실패해야 한다는 사실을 안다." 이는 이미 와튼 비즈니스 스쿨에서도 일찌감치 강조해 온 명제 중 하나이며, 이 책에서 시도때도없이 저자가 되풀이하는 사실상 주제문입니다. 실패한 자는 땅에 엎드려 계속 쓰디쓴 패배의 먼지만 씹으면서 일어날 줄 모르거나, 남탓을 하지 말라면서 실제로는 본인 자신이 남탓만을 일삼는 무지와 자가당착에 빠져 있죠. 반면 저자처럼 훌륭한 사업가는 자신이 부리는 피용인의 자질을 한눈에 알아보고, 어떻게 하면 정해진 월급으로 이 사람에게서 최대한의 포텐을 뽑아낼지를 연구합니다. 졸렬한 사장은 그저 명목 월급 지출을 아낄 뿐, 비용의 참된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을 바꾸는 혁신가들은 사소한 현상 속에서도 이윤의 동기를 찾아내고, 이를 보다 넓은 정보의 채널에 공유함으로써(이 과정에서, 유해하고 사악한 독재 정치도 없어진다고 하는군요) 세상과 더 광범위한 소통을 시도하고 합일합니다. 진정한 파괴적 혁신의 원동력은 바로 이런,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인드를 끊임없이 가다듬고 자신을 확장하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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