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하필 교도관이야? - 편견을 교정하는 어느 직장인 이야기
장선숙 지음 / 예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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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하필 교도관이야 ]  여자 교도관이 책을 냈다.. 교도소 관련 이야기라 처음 부터 선입관이 있겠지만, 그곳 또한 사람들이 생활 하는 곳 이고 , 경중에 따라 사안이 달라지는 곳이기도 한다. 교정 시설이라고도 불리우며, 구치소, 교도소라고도 한다. 여자 교도관으로서 또래의 수형 생활을 같이 동거 동락 하듯이 지켜 내면서 일부 기쁨과 슬픔도 교차 한다고 적는다.


일반인들이 느끼는 수형 생활이란 어떤 것일까.. 대리 체럼 해볼수도 없는 어쪄면 페쇄적인 공간에서 혹은 어떤자는 중죄를 지어서 어느 날이 될지 모르는 사형수의 시간을 초조 하게 기다리고 있다.


교도관도 사실 교정직 공무원에서 부터 출발 하지만, 일반 행정직이나 다른 공무원들과는 달리 근무 장소가 제한적이다 보니 어찌할 수 없이 거의 출퇴근만 자유로울 뿐 , 근무지 자체가 수형자들 속에 섞여 생활 하며 그들을 감시 하고 혹은 질책 하며 보듬어 주기도 하면서 , 새사람을 만들기위한 전초전을 치른다.


교도관의 직무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 우선적으로 다시 이곳으로 돌아 오지 못하게 재발 방지 차원에서 여러가지의 인성 교육과 체럼, 프로그램, 인문학적 교류, 그리고 뛰어난 강사진의 섭외로 한 시간이라도 더 수형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도움이 될 만한 일들을 몸수 찾아서 한다.


시대가 변하여, 예전 보릿고개 시절 처럼, 꽁 보립밥에 콩밥으로면 하루 한 두끼를 연명 하는 것이 아니라 흰 쌀밥에 3찬 - 4찬이 배식 되는 요즈음은 군대 생활 과도 같이 상당히 배식 수준이 향상 되었다..


가족, 그리고 정, 이웃, 이러한 부분이 원할 하지 못하면 사회로 부터 겪리 당할 고충이 크다. 어려서 부터 부모의 품에 안겨 보지 못한 비뚤어진 인성 혹은 자라면서 학대와 온갖 고초를 격어 수형 생활이 오히려 편하다고 하는 자 .


밖에서의 마약 습관을 벗어 나기 어려워 , 자진 하여 교도소에 수감 되어 , 약의 찌든 때를 벗 겨 보고자 힘쓰는 사람 ..

삼라만상의 모든 군상이 한곳에 있다... 염라 대왕이 있다면 우선 분류 일 순위가 악행을 행한자들의 지옥불이 이곳일까 .


하지만, 천성적으로 사람이 죄를 짓고 태어나지 않는 이상 후천적인 잘목된 친구들의 교류나 환경으로 인해 혹은 무지 해서 빠진 보이스 피싱, 시기, 강도 기타 , 더욱 심한 범죄 행위 에도 한편의 기다람과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있다라면 이곳에서 근무 하는 교정직 공무원들이 그들 일듯 하다. 


마다 하지 않는 심한 중압감과 , 스트레스는 일반적인 정도를 넘나 들수도 있어서 누구인들 천성적으로 이곳 교정직을 근무 하기를원치는 않을 수도 있으나, 변화 하는 시대롸 사회상 처엄, 우리들의 일글어진 얼굴과 영웅들을 바로 잡아줄 수 있는 최후의 보루 버팀목임을 자처 할 수 있는 그들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안전 하게 돌아 간다.


평안함의 이면에는 이러한 감추기 싫어 하고 본 모습을 피하려는 인간 본성이 있다.. 불편해 하는 이웃과 서로 소통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도 어느 정도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다면 , 누군가는 용서의 마음으로 다시 태어날수도 있다..


어려운 생각, 직접 당사자가 아닌 이상 용서라는 것 조차 사치 스런 일인 줄 알지만 못내 감추어든 비수처럼 자신을 감내 하는것  사회적인 온갖 멸시를 감내하며  살아내는 것 , 물론 감당 하여야 하는 처벌을 받을 자는 당연히 그 값을 지불 하여야만 나갈 수 있는 곳 , , 교도관들의 정성어린 도움으로 그 시간이 단축된 자들은 또한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일까,

잔여 나머지 시간들이 더는 부자유 스럽고 낭비 되는 시간들이 아니었음을 같은 세상이지만 다른 세상 처럼 살아 가는 또다른 이들에게 힘을 드린다.. 책력거99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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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억 빚을 진 내가 살아가는 이유 - 희망으로 시련을 딛고 기적을 만든 감동 에세이
박종혁 지음 / 위닝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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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억 빚을 진 내가 살아 가는 이유] 책 제목이 좀 자극적이다.. 3천 , 3억도 아닌 30억대 채무를 지고도 살아 갈 수 잇는 사람은 어떤사람일까.. 신문 지상에 간혹 오르내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는 않지만 몇 억 정도의 채무를 못 갚아서 절절 매다가 파산 신청을 하거나 결국 극단적인 선택으로 생을 마감 하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 늘상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기도 하지만, 일반 월급쟁이로서는 월 수백만원 벌어서 고스란히 빚을 갚는데에 투여 하여도 100여년이 넘게 걸릴 것만 같은 아득한 시간들 ..


저자는 , 20대 시작 하게된 자동차 딜러 생활로 초기 작은 자본을 투자 하여 이익을 맛보게 되었고 점차 그 규모를 늘려 나가다 보니 주변 지인들 혹은 차입이 가능한 여러곳에 돈을 빌어서 좀더 규모의 투자와 , 자동차 딜러 사업의 확장을 꽤 하였으나 모든것이 순조로울 때는 이자률과 그밖의 원금 상환은 무리가 없었으나 , 한 두 바퀴 돌아 가던 것이 삐걱 되면서 , 일은 꼬이기 시작 한다. 원금 회수는 커녕 , 고리로 빌렸던 이자는 결국 지수 상승으로 돌이킬 수 없는 채무 불이행에게 까지 이르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현실에 굴복 하기 보다는 문제점을 정확이 기본에서 다시금 점검 하고, 쉽사리 빠져 나가는 돈 하나 하나에 신경를 쓰고 관리 하면서 주변 지인들 혹은 대출로 끌었던 돈들을 하나 줄 갚아 나가면서 신롸를 형성 하였다.


사회적으로 돈이 있을 때는 사람들이 모이나 그렇지 못하면 왠만한 관계를 제외 하고는 멀러지는 것이 세상의 원리이다.

친하게 지냇던 사람들과도 서먹해지고 , 특히나 가족간의 지지를아끼지 않았던 부모님의 주택 까지 팔아 가면서도 방어 하였으나 역부족, 다시금 딜러의 생활을 시작 하면서 제2의 도약을 키워가는 주인공은 이책을 쓰는 오늘 까지도 현장에서 열심히 발품과 전국을 누비며, 판매, 세일즈를 한다.


인생에 한번쯤 대박을 꿈꾸어 보지 않았던 사람은 없었을 터이다.. 하지만 , 자신의 힘만 믿고 , 너무 과신한 나머지 사업이나 가게를 그르치게 해본적 있는 사람들이 성공한 반열에 오른 사람보다 더 많을 듯 하다.. 시련을 딛고서 다시금 원점에서 시작 하여야 하는 삶, 예전 보다 못한 차 , 주택, 일하는 환경에서 , 이전의 영화를 누렸던 시절을 가끔 생각해 보면

인생은 일장 춘몰이라는 생각도 들겠지만 ,  죽지 않고도 살아 버텨 줄 수 있는 누군가의 희망을 안고 혹은 자기 자신의

절대 절명의 극한 상황에서 하나 하나 실타래를 풀어 가듯이 무엇가를 대응 하고 이겨 나가는 힘을 키운 다면, 그리고

절대로 포기 하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 나가는 우직함이 있다면 세상에 아무리 어려운 세파를 맞는다 하여다 다시금 극복할 수 잇는 원천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 , 이순간 절망에 빠져 지푸라기 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든다면, 저자는 과감히 자신에게 전화하라고 책 지면을 빌어 자신의 휴대폰 번호도 공개 하였다.. 자신의 세대 혹은 더 어린 세대거나 어른 일지라고 고난의 아품은 아픔이다.

아무도 보듬어 줄 수 없는 사회 혹은 구성원 가족 이라면 스스로 일어서 갈 수 밖에 없다... 오늘도 이른 새벽 그리고 늦게 까지 나먼지 잔여 채무를 갚기 위해 뛰고 있는 주인공을 위해 힘찬 박수를 보낸다... 책력거99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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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토지수용보상금 지키기 - 세금 덜 내는 수용보상금 사수 비법
이장원.이성호 지음 / 삼일인포마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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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토지수용 보상금 지키기] 공익 수용 되는 토지에 있어서 세금감면 할 수 있는 절차와 방법, 그리고 실제 수용되는 사업절차는 어떠한지 그리고 해당 되는 공익 수용 보상금에 대한 명세서 항목은 어떨게 해헉 하여야 하는지 또한 이를 매각시

혹은 수용 보상금에 대한 양도 소득세제에 대한 기본 이해도 이글 주제어로 한 챕터에서 자세히 다루어 주어서 일반인들이

막역 하게 생각하는 실무적인 공익 수용 토지에 관한 올바른 이해와 세금 절차 까지도 큰 무리 없이 설명이 되엇다.


또한 중점적으로 보고 있는 수용 보상금에 대한 양도 소득세 기본은 게산 방법과 취득 사액 그리고 취득 가액 산벙 방법및 가산세가 나오는 경우와 추가 양도에 대한 합산 과세, 마지막으로 현지 한국이 아닌 외국에 거주 하는 영주권자나 이주민들에 대한 양도 소득세 체크 포인트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7장 챕터로 구성된 내용은 . 기본적인 세액 감면 4가지 즉 공익 수용 감면, 개발 제한 구역 감면 , 대포 보상 과세 특레 , 토지 수용등의 대체 취득에 대한 감면 을 다루 엇고,,, 수용 부동산이 농지이거나 임야, 대지인 경우에 따라서도 다르게 절세나 대토가 가능 한 방법으로 안내를 하고 있으며,  수용 부동산 주택 이나 건물인 경우에도 취근 9.13 대책 이후로 부쩍 1주택 이외의 경우 투기 세력으로 보고 LTV 및 기타 대출 제한 및 양도 소득세 중과로 이 부분이 더욱 민감하게 재산권 보호 및 수용시 1세대 1주택 비과세 요건에 충족 될 수 있는지도 확인 하여 볼 사항이다.


기타 , 사업용 토지와 비사업용도 토지의 경우 처리 방법, 미등기시 사산 수용시 대책, 공부상  상업용도이지만 현황이 주거인 경우에도 어떤 식으로 세금이 매겨지고 비과세 요건 또한 다르게 적용 될 수 있는 사례가 있어 주의를 요하기도 한다.


마지막 챕터를 통하여 여러가지 사레들 , 실제, 규제나 벌금 제한이 역했던 시절 행해졌던 이중 계약이나 다운 업 계약서

그리고 사전 증여,및 수용 보상금으로 자녀 부동산 취득의 경우 양도세 혹은 증여세 문제등도 사례를 들어 다뤄본 점이 일반인들의 이해를 높이는데 주효 한듯 하다.


세금신고란 것이 잘못 신고 되면 정정 하기도 어렵거니와 해명과 소명을 거쳐서 다시 조정 되는 관계로 여간 해서는 간과 하지 않고 전문 세무사와 이러한 부분을 짚어 보고 상의해 나가는 것이 수수료 좀 아낄 요량으로 스스로 과감하게 해나가는 것 보다는 낫 다라는 생각 이다.


내년 부터 본격 시작 되는 도시 계획 시설 및 공원 일몰제등에 따라 수많은 도시지역의 공익 사업에 따른 토지 보상 문제가 점차 대두 되고 가시화 될 듯 하고, 이미 발표된 3기 신도시의 토지 보상 부분도 단계적인 이행를 하고 있어서 주변 지역으로의 대토등을 토한 감면이 벌써 진행 되고 있는 듯 학다.


한번이 책자의 모든 내용이 한눈에 들어 올 수는 없지만 현실 상황에 맞닥 뜨리는 하나 하나 요건을 짚어 보고 이중 챕터에 맞는 상황을 찾아 펼쳐 본다면, 100% 답이 될 순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기본 지식을 무장한 상태에서 국세청과 혹은 지방 관청과 세무에 관해서 응답을 하고 소명을 거쳐 제대로된 자신의 소유 부동산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 할 수 있을 것이다.. 다가오는 2020년 7월이 그리 멀지 않은 계절이다 벌써 많은 지자체 토지 소유주나 이를 매수 하려고 대기 중인 수요 중에는 최선과 차선 그리고 상대적인 가격 매입에 있어서도 신중히 접근 하고 있다.. 일몰제에 따른 도시 계획 시설의 원천 회복에 따른 토지 수용 보상 혹은 원형지 개발에 대한 요구및 압력 또한 높아지리라는 것이 토지를 바라보는 전문가나 컨설턴트의 입장이 아닌가 생각한다.. 책력거99 .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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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 臣下
류기성 지음 / 바른북스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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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 류자광에 대한 이야기 이다  간략 개요를 살펴 보기 위해 그의 일대기 위키 백과 참조를 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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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광(柳子光, 1439년 ~ 1512년 6월)은 조선의 초기의 무신, 군인, 교육자, 유학자, 작가이다. 본관은 영광(靈光), 자(字)는 우후(于後)이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의 토벌에 참여하여 공신이 되었다. 이후 이시애의 난, 남이의 옥 등으로 익대공신에 책록되었고 1506년에는 중종반정에 참여하여 정국공신이 되었다. 서얼(庶孼) 출신으로서 무사가 되었다가 이시애의 난의 진압 때 세운 공로로 세조의 총애를 얻어 1468년(세조 13년) 병조정랑으로 온양별시문과(溫陽別試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은 병조판서, 판한성부사, 황해도경상도관찰사 등을 지냈다.

그 뒤 의정부 좌찬성 등을 거쳐 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 겸 영경연사, 충훈부 당상에 이르렀으며, 무령군(武靈君)에 봉작되었다가 무령부원군(武靈府院君)으로 진봉되었다. 남이를 시기하여 그 남자의 시를 문제 삼아 사형까지 이르게 하였다. 학자 김종직과 벌인 감정싸움이 발단이 되어 이극돈 등의 무오사화에 동조했으며, 이후 사림파 공격에 가담했다. 특히 임사홍 등과 함께 연산군갑자사화를 도왔다. 사림파 집권 이후 역적으로 단죄되었으나 1910년 이후 그를 옹호하는 견해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의술, 음악, 지리에도 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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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속의 류자광  무령부원군으로도 불리는 그는 , 그간 세간의 많이 회자 되면서 충신과 간신을 오고 가는 신세 엿으나 , 제대로된 왕조실록의 해석과 자료로 , 다시금 충직한 신하라는 입지에서 살펴본 글이다..


조선초 ㅡ 토 이시에의 난에 공적을 세워 공신이 된후 이후 1506년 중종 반정의 정국 공신, 1468년 세조때 병조 정항으로 무신이면서 문신으로 장원급제 하여 세조의 총애를 얻은 신하 , 그리고 병조판서, 부사 관찰사 , 의정부 좌찬성을 거쳐 웅훈부 당상까지 오른 무령군 ,,, 그러나 당시 조선조 시대의 파벌과 신분제에 대한 고착화는 왕과 신하인 그도 넘지 못할 벽을 쳐 놓았고 번번이 실력으로 나아감에도 불구 하고 많은 당상관, 좌우의정, 그박의 신하들에게 견제의 대상과 질시의 대상이 된 류 자광 ,,, 서얼 출신이라는 굴레에서 평생 벗어나지를 못한 그엿지만 당대의 실력만큼은 출중 하고 왕조시대의 신하라는 직책에 걸 맞게 오로지 공과 사를 구분 하여 왕에 대한 충직함을 지켜 나간 그이다.


그리하여, 두어번에 걸친 사화와 연산을  웅립 하면서도 충언을 아끼지 않은 그였지만 마지막에 나라의 백성을 구한다는 마음으로 연산군의 갑자사화에 무언의 지지를 보내 나라를 구해 낸다.


오늘날로 보자면 매우 불합리하고 1인통치 시대의 사회상으로 이해 하기 어려운 구석도 있지만 만 백성을 위하여 왕이 존재 하고 왕권과 신권이 대립 하는 상황에서 왕권을 지켜 내기 위해 오로지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여야만 하였던 무령군 ,, 그래서 세자나 기타 다른 왕세손에대해서도 특별이 이사람을 다시 써 달라는 선왕의 필지가 늘 있어 왔지 않을까.

무려 5대에 걸친 왕위를 보필 하고 지근 거리에서 지켜내는 신하는 보기 드문 일이나 당시의 신권이 왕권을 견제 하는 상황 특히나 3정승과 3 대간들의 견제와 정치는 현제 시점에서도 그들만의 치세로 보인다..


조선의 개국이후 왕의 세습과 그 이후 중국의 변화 명에서 청으로이 이행기 이전을 조망한 것이라 임진왜란 일어나기 약 100여년전의 일이지만 이미 왜구들의 해안선 침범 사례는 꽤나 많이 조선왕조 실록에도 언급이 되어 있엇던 듯 하여 새롭고,, 특히나 중국의 만리장성 축조를 신년하레사를 보내면서 보고 와서 조선에서도 그러한 방비책을 세워야 하는 보국의 견지에서 그리고 북방 여진족의 침입을 미리 방비하는 축조성을 쌓는 것에 상당한 혜안을 가지고 있엇다고 볼 수 있다... 이후 다른 신하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지마는 , 이러한 준비가 이후 일어난 역사적인 사테에 대하여 어느 정도의 대비책이 되었음은 나라의 존망과 당시 왕조를 키우거나 지켜 나가는데에는 매우 중대한 일이 었음이다..


다시 책으로 돌어오면 , 늘 그러하듯이 , 다른 반대파의 모함을 받거나, 심지어는 서얼 출신이 당상관 이상의 벼슬을 하였다라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류를 달아 유배형을 보내버리고야 마는 신권의 성장,,, 당연히 왕으로서는 그럴수록 주변에 자신의 생각을 충분이 지지하고 보듬어줄 충신이 필요한 법이다.


사람을 잘 쓰는법, 조선조 왕의 많이 바뀌었지만 근본적인 사람을 쓰는 왕의 자세에 대해서는 바뀐 바가 없으니 그것의 결과는 류자광이라는 신하가 혹은 무령군이 그렇게도 오랜 기간 연속 하여 왕위를 보필 할 수 잇다라는 것에 있다.


사간과 사간헌들의 기록이 혹여나 자신들의 생각이 섞여 들어갈 수는 엇어도 , 4-5대 왕과 왕손을 지켜낸 신하로는 그밖에도 내시관 김처선이 있을까....  어느 이름없는 묘비명에 당시 나라의 쳬게에 걸 맞게 올바른 정치를 하고 간 한 신하의 영전에 축원을  보내다.  책력거99 .


Value up tip ; 류자광

생애 후반[편집]

무오사화와 갑자사화[편집]

복수할 기회를 노린 류자광은 1498년(연산군 4년)음력 7월 성종실록을 편찬(編纂)할 때 김일손이 사초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실은 사실이 알려지자 상소를 올려 세조가 한 왕위 찬탈(簒奪)을 비유(譬喩)한 문장이라고 보고하여 무오사화를 일으켜 수많은 사림 인사를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김종직의 문하생들이 끌려와 의금부형조에서 고문당할 때 류자광은 김종직의 문집을 입수하여 사본을 내놓으면서 이 중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찾아내 여러 추관(推官)에게 보여주었다.

이것은 세조를 가리켜 지은 문장인데 김일손(金馹孫)의 악한 것은 모두 김종직이 가르쳐서 만든 것이다.

라고 말하였으며, 원본은 연산군에게 바쳤다. 연산군에게 바치는 김종직의 문집에서 류자광은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스스로 주석(註釋)해 문구마다 해석하여 연산군으로 하여금 알기 쉽게 하고 이어 "김종직세조에게 부름받았는데도 감히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세조를 비방(誹謗)하고 헐뜯었으니 이는 마땅히 대역부도(大逆不道)로서 논죄하고 그 남자가 지은 글은 후세에 전파(傳播)되어서는 아니 되니 아울러 모두 불살라 없애야 될 것입니다."라며, 김종직의 저서와 작품의 압수와 관련자 처벌을 건의하였다.

무오사화 이후 사림파를 처벌할 증거 자료를 입수하여 연산군에게 바친 공로로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1498년 11월 함경도에 붙은 연산군을 비방(誹謗)한 벽서를 조사하고자 파견(派遣)되었다.

그 해 말 산릉 제조[山陵提調]에 임명되었으나 부당하다고 양사(兩司)에서 비판받았고 1499년(연산군 5년) 1월 생전복과 굴조개를 연산군에게 사사로이 헌납했다가 지평 권세형 · 정언 윤은보에게 탄핵받았으나 연산군은 이를 듣지 않았고 윤은보는 3개월간 계속해서 상소를 올려 사사로이 진상물을 바친 류자광을 탄핵했다. 1504년(연산군 10년) 사옹원 제조가 되었다.

유지광은 자신이 여종의 아들이라 미천한 종이나 악공(樂工)과 화원(畵員) 등의 고통을 덜어주려 노력하였고 왕에게 도공(陶工)들을 아끼라고 건의하기도 했다. 1504년 10월, 사옹원 제조(提調)로 있을 때 류자광은 수라청의 나인들이 수라상(水剌床)을 힘들게 옮기는 것을 보고 동정하여 그해 10월 1일 왕에게 '음식을 올리는 큰 소반이 매우 무거워 들기 어려우니 두 소반에 나누어 차려 드리기 편하게 할 것'을 건의하며 하인들을 아끼라고 청하였다.

"신하로서 인군 앞에서 공경하고 조심(操心)한다면 어찌 들기 어려우랴? 류자광이 말할 것이 아니요, 승지도 아뢸 것이 아니다. 류자광을 국문(鞠問)하라."

이때 연산군의 노여움을 받아 국문당하였으나 남이의 옥사를 다스리고 이시애의 난의 진압에 훈공을 세웠으며, 여진족(女眞族)과 왜구(倭寇)를 토벌한 공로가 인정되어 불문율에 붙여졌다.

1501년 서거정(徐居正)이 자신의 저서에서 류자광이 한명회를 비판한 일을 잘못이라고 기술하자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대왕대비의 옹호(擁護)를 예로 들어가며 서거정의 저서를 비난(非難)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류자광의 서거정 비판이 문제시되어 그 해 11월 사헌부사간원에서 줄기차게 탄핵당했다. 1503년 사옹원 제조를 거쳐, 그해 9월 왕에게 고을의 수령들이 진상한다는 이유로 항상 강무장(講武場)에서 사냥하는 것과 사사로이 사냥하는 것을 금하게 할 것을 건의하여 왕이 받아들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평소 그와 절친했던 임사홍과 관련되어 사림에게 비난(非難)받게 되었다.

김종직에 대한 보복 과정[편집]

김종직이 생전 류자광이 쓴 글과 현판들을 떼어내 불살라버렸을 때 류자광은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류자광은 오히려 김종직이 사망하자 제문을 지어 애통해하면서, 김종직중국의 옛 문장가인 한유(韓愈)에 비교하기까지 했다. 이를 두고 당시 사람들은 당시 김종직에 대한 성종의 신임이 두터웠고 또 그 제자들이 득세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류자광이 그런 감정을 가볍게 드러내지 않고 그들과 교분을 트려는 속셈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김일손의 사초 문제가 외부로 알려지면서 문제가 비화되자, 류자광은 성종이 걸어놓게 한 김종직의 당기를 떼어 불살랐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걸려 있는 김종직이 지은 현판을 모조리 없애게 했다. 그리고 류자광은 김종직을 역적으로 몰았다.

류자광은 김종직을 가리켜 "간사한 신하가 몰래 모반할 마음을 품고 옛 일을 거짓으로 문자에 표현했으며, 흉악한 사람들이 당을 지어 세조의 덕을 거짓으로 날조해서 꾸며 나무라니 난역 부도한 죄악이 극도에 달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류자광은 간사한 신하 김종직은 나쁜 마음을 몰래 품고 그 무리들을 모아 음흉한 계획을 시행하려 한 지가 오래 되었다고 했다. 류자광은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면서도, 그가 세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출사한 것을 계속 걸고 넘어졌다.

그밖에도 류자광은 김종직이 성종의 명으로 지은 환취정 기문을 인멸하려 했다.

중종반정에 가담[편집]

1501년 겸 오위도총관(兼五衛都摠管) 등을 지냈다.

서기 1504년 연산군 재위 10년에는 이극돈의 형제인 이극균과 사귀었다는 것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아 임사홍(任士洪)과 함께 직첩을 몰수당하고 경기도에 충군(充軍)되었으나 곧바로 취소되었다. 그 뒤 무오사화갑자사화의 원흉이라는 공론 때문에 대간들에게 여러 차례 탄핵되어 한때 파직되었으나 판부사로 복직되었다.

1505년 1월 석결명(石決明)을 왕에게 사사로이 바친 일로 언관들에게 탄핵받자 연산군은 간관들의 거듭된 탄핵에 못 이겨 당시 탄핵한 언관들을 조사하게 하였고 4월 의금부에서 류자광이 굴과 전복(全鰒)을 진상한 것을 비난한 언관들을 조사하여 앞장선 안윤덕(安潤德)은 율(律)이 장(杖) 80에, 김계행(金係幸)· 윤은보(尹殷輔)· 이곤(李坤) 등은 장 70을 논정하여 보고했다. 연산군1506년 1월 1일부로 류자광을 복직시킨다.

1506년 박원종에게서 거사(중종반정) 가담 제의가 들어왔다. 류자광은 성희안 · 박원종 등과 함께 중종 반정에 동참하여 자신이 섬긴 연산군을 폐위하고 중종을 추대(推戴)하였다. 중종 즉위 직후 정국공신 1등에 무령부원군에 봉해졌으며 9월 26일 겸영경연사(兼領經筵事)로 제수되었으나 10월 10일 왕명으로 영경연사에서 체직(遞職)되었다. 중종 반정의 주동자는 박원종유순정, 성희안으로 반정 이후 실권은 이들에게 넘어갔으나 류자광은 부원군이었고 반정공신들도 류자광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이듬해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가 충훈부(忠勳府) 당상이 되었다.

유배 생활과 죽음[편집]

그러나 1507년(중종 1년) 1월 왕실에서 사찰을 건립하려 하자 영가부원군 김수동, 고양부원군 신준, 능천부원군 구수영, 해평부원군 정미수, 연창부원군 김감, 영의정 유순, 좌의정 박원종· 우의정 유순정(柳順汀)· 고양 부원군(高陽府院君) 신준(申浚)· 창산 부원군(昌山府院君) 성희안(成希顔)· 공조 판서 권균(權鈞)· 예조 판서 송일(宋軼)· 좌찬성 박안성(朴安性)· 우찬성 노공필(盧公弼), 판의금부사 민효증· 진천군(晉川君) 강혼(姜渾)· 호조 판서 이계남(李季男)· 형조 판서 이집(李諿)· 이조 판서 장순손, 병조 판서 신윤무, 지의금부사 김응기, 지중추부사 윤금손, 좌참찬 박건, 우참찬(右參贊) 이손(李蓀), 대제학 한사문 · 도총관 박열, 판윤(判尹) 전임(田霖)·이조 참판 유응룡(柳應龍)· 호조 참판 박영문(朴永文)· 예조 참판 김전(金詮)· 형조 참판 신용개(申用漑)· 병조 참판 허집(許輯)· 공조 참판 유빈(柳濱), 대사헌(大司憲) 이계맹(李繼盲),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이자건 · 좌윤(左尹) 안윤덕(安潤德)· 우윤(右尹) 하한문(河漢文), 인천군 채수, 서원군 한순, 참찬관 성세순, 특진관 한형윤, 겸지춘추관사 성세명,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임유겸 · 풍양군(豐陽君) 김무(金碔) · 대사간 안윤손, 대사성(大司成) 이점, 이조 참의(參議) 조계상(曺繼商)· 예조 참의 김안국, 병조 참의 박의영(朴義榮) · 공조 참의 유숭조· 형조 참의 최인(崔潾)· 병조 참지 이세정(李世貞), 부제학 정광필, 도승지 홍숙, 승지 이예견, 좌승지(左承旨) 손중돈, 우승지 안당, 좌부승지 남곤, 우부승지 이과, 동부승지(同副承旨) 심정, 장례원판결사 이자견, 성균관사성 조원기, 사간원사간 김당, 홍문관전한 성몽정, 사헌부집의 이유청, 홍문관응교 김세필, 사헌부장령 이희맹, 홍문관부응교 김극핍, 사헌부지평 윤희인, 홍문관교리 이행, 이조정랑 이사균, 예조정랑 신상, 홍문관수찬 한효원, 형조좌랑 김양진, 성균관전적 유여림, 성균관직강 이자, 홍문관부수찬 홍언필, 규장각대교 윤인경, 봉교 이희증, 김영, 정충량 예문관검열 권벌, 진사 임유겸, 생원 정옥형 등과 합동으로 사찰 건립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월 3일 검소(儉素)와 수신(修身)에 관한 상소를 올렸다.

"들으니, 이 달 초1일에 명하시어, 신을 문채(文彩) 나게 꾸미는 데 단자(段子)를 쓰지 말고 면주(綿紬)로 대신하게 하였다 합니다. 전하의 이 마음은 실로 종사(宗社) 신민 억만 년 한없는 복입니다. 자고(自古)로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 처음에는 검약(儉約)한 덕으로 힘쓰지 않은 적이 없었지만, 태평세월이 오래되고 천하에 일이 없게 되면 풍습이 자연히 교만(驕慢)과 사치(奢侈)를 숭상하고 물욕이 서로 마음을 가리게 되어 마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집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여 그만 망하게 되는데 우리 전하께서는 생각하심이 검박한 덕에서 출발하였고 령(令)하심은 미물에까지 미치십니다. 미물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시는데 전하께서 만일 이 마음을 잘 지켜 잃지 않으신다면, 어찌 마음을 바로하지 못하고 몸을 닦지 못하며 집과 나라를 다스리지 못할 것을 근심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시고 실천하시어, 검박한 덕을 힘쓰시고 백년대계를 생각하소서"

1월 4일 대광보국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대간(臺諫)이 류자광의 대광 임명을 반대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1507년 2월 김종직(金宗直)의 여당(餘黨)이 비밀리(秘密裏)에 중상(中傷)하려 하니 안심하고 서울에 있을 수 없다며 낙향하겠다고 상소를 올렸다. 한편 유자광을 싫어하던 김세필(金世弼)은 그가 간사하다면서 박원종(朴元宗)에게 여러번 거듭 알렸다.

그해 2월부터 4월 사이에 대간(臺諫)과 사헌부, 홍문관의 계속된 탄핵으로 관동의 흥양에 유배되었고 양사(兩司)는 류자광을 극형에 처하라고 왕에게 건의하였으나 왕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후 손자 유승건(柳承乾)· 유승곤(柳承坤)까지 함께 유배되었다. 이후 류자광은 양사(兩司)에서 계속 탄핵받았고 배소(配所)가 해평으로 다시 이배(移配)됐다가 변군으로 재이배(再移配)되었다가 장님이 된 후 곤궁하게 살다가 1512년 6월 배소에서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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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신해철! - 그에 대한 소박한 앤솔러지
지승호 지음 / 목선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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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해철] 그가 돌아 온다면,,, 사람들은 다시 열광 하고 마왕 신해철을 새벽 비디오 자키 , 고스트 스테이션에서 청취자들의 고민과 동거 동락 하며 살아 왔던 20여년간을 반추 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88년 대학 가요제에 처음 대뷔 하여 , 그룹으로는 90년대를 휘어 잡았지만 아이돌 세대와, 서태지와 아이들에게 약간을 밀린 위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 하고 정치인 혹은 소설가 못지 않은 입담으로  2002년 대선에도 돌풍을 불러 일으켯고, 그가 하는 행위와 언어또한 많은 사람들의 입에 회자 되며 호불로가 갈리기도 한다..


지승호 라는 작가의 변을 통해 전달된 그의 못다한 이야기와 다른 사람들의 인터뷰어로 묶여져 출간된 이들은 어찌보면 그가 살아 왓던 내밀한 흔적의 표식이고 가족이고 , 그 주변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의 추모기가 도래 할때면 그다지도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웃음 지으며, 생애 기뼛던 날이 그대의 노래와 위로를 들을 수 있엇노라고 당당히 애기 하게 만드는 사람,  그이다..


이제는 자류로운 영혼으로 떠나버린 사람이지만 ,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는 녹아져 있고 노래 가사는 시인의 음률이 되어서 유튜브를 통하면 언제든지 들어 볼 수 있다.


단절 , 사람의 죽음이 안타깝고 아쉽고 못내 절망 스러운 것은 , 그 시간이 이후 그 사람의 다른 이야기와 목소리를 라이브로 들어 볼 수 없다라는 점이다.. 팬들과의 단절도 그렇게 생겨 나고 , 생전에 이것저것 논란과 이슈도 많았던 그였지만

한가지 반듯한 길은 음악에 대한 열적이고 그것도 한국의 인디 음악 , 그룹 사운드에 대한 열정이다.


20000년대  MP 3 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불법복제가 판을 흔들었고 이는 지금도 현제형이지만 문화의 선진국이 되기를 바랬던 그의 간절한 마음만큼 우리는 진보 되었을까... 


자유, 자율란 것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있을때야라면 가능한 자율 , 힘이 있는 자유 이지만, 없어도 자유롭게 누릴 수 있는 정신적 맘적 자류는 존재 하는가 ,, 그가 혹은 그의 팬들이 지속적인 영혼의 울림을 따라 가는한 그가 원했던 자유로운 영역은 어쩌면 저 세상 너머에 존재 하는 지도 모르겠다..


음악을 반추 하던, 뮤지션을 반추 하던, 나의 살아 가는 공간에서 그러한 사람이 하나 사라졌다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 이해 관계를 떠나서 생각이 나고 그리워 한다..


희망, 자신에게 희망을 가지고 믿는자만이 누군가에게도  희망을 주어 볼수도 있도 믿음을 쥐어 줘 볼 수도 있다.

확인 하지 않는 미래에 희망을 부여 하는가  .  현실 세계에 부당함과 절벽이 잇더라도 부단히 노력 하여 그 천장을 유리를 깨어 보려 했던 사람으로도 기억 하는자.. 


신해철은 어쩌면 향후 보통 명사가 될지도 모르겠다.. 서태지와 이이들 처럼 ,,, 책력거99 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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