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재단
시마모토 리오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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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에 이어 사마모토 리오의 소설을 또 읽게 된 것은 저에게 찾아온 행운이자 그녀의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됩니다

「여름의 재단」은 2015년 6월에 발표한 단편으로, 제153회 아쿠타카와상 후보에 올랐던 작품이고 이후 3편의 이야기를 추가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이력을 가진 연작 단편집이자 연작소설이며 장편소설이기도 합니다


눈에 확 띄는 표지 디자인이 강렬하게 다가오는데요 사전 지식 없이 책 제목만 듣고는 그것이 ‘제단‘을 뜻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했습니다

책 제목의 ‘재단‘은 책을, 자르는 일을 나타냅니다

책 내용 중에도 재단에 대해 언급한 부분들이 보여요

책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이 소설을 빌어 여러 가지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겠지요


탄탄한 날이 달린 재단기, 그것은 책의 입장에선 흡사 단두대와도 같은 것이었을 텐데 고스란히 느낌이 전달됩니다 전 이 소설을 통해 ‘책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됐네요

이번에 알게 된 것 중에 가장 큰 수확은 그동안 작가가 어린 시절에 당한 육체적 학대로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써오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바다로 향하는 물고기들」도 그런 내용이 담겨있었는데 말이죠

뭔가 공통된 주제와 분모를 가지고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써나갈 수 있다는 것도 책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흥미로운 일임이 분명합니다

본래 단편 연작이었기에 네 편의 제목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데요
계절적 변화가 나타내는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그 계절에 맞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름은 사건의 발단이자 주인공 치히로가 소녀 시절에 당한 성추행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심경과 재단을 통해 느끼는 고통이 묘하게 대비를 이루고 있습니다
사실 시바타와의 관계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지만 세상에는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하니 모든 걸 납득한다는 건 불가능이겠지요 마치 맑은 하늘에 쏟아지던 여름날의 소낙비처럼

가을의 여우비는 감정도 이해관계도 남기지 않고 만남과 헤어짐으로 연결된 남자들 그리고 세이노씨를 만납니다
청명한 하늘과 알록달록 물드는 가을의 변화처럼 치히로의 변화도 시작됩니다

겨울의 시작은 29이라는 완성되지 못한 것 같은 엉성함 그리고 청춘이라고 부를만한 20대의 마지막에서 생일이 지나면 30이 되는 그런 시기에 말이죠

어느 순간 아무런 약속도 없고, 어떤 관계인지도 분명하지 않은 사이인 것에 불안해지는 치히로
그리고 그녀에게 아무런 말도 해줄 수 없다며 돌아서는 세이노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며 길이를 늘려가는 고드름처럼 그것은 날카로운 비수가 됩니다


여태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한 일도 해보고 싶어지는, 그리고 해결하지 못하고 계속 누르고만 있었던 것도 정리를 하고 싶어지는 계절이 봄이던가요

열세 살 그 이후로 늘 마음의 병을 앓으며 살아온 치히로가 당사자를 직접 만나 하고 싶었던 말을 쏟아냄으로써 힘들고 버거웠던 일을 정리하죠

그리고,

˝만나고 싶어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이야기하고 싶어요.˝

˝만약 아무런 약속도 이름도 없는 채, 만나고 싶다는 기분만으로 계속 만날 수 있다면 사랑이나 연애만큼 아름다운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봄의 기운은 아련한 현기증 같은 아지랑이로 피어나 속삭입니다

이제 그 준비가, 조금은 된 것 같다
올바르지도 완벽하지도 않은 나 그대로.

사실 「여름의 재단」은 일본에서 한창 재단이 이슈화되던 시기에 쓴 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첫 이야기인 「여름의 재단」에선 상당 부분 출판과 재단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고 또 연작소설의 연결고리로 재단이 언급됩니다
작가와 주인공 치히로가 소설가라는 공통분모에 놓인 것처럼 말이지요
그런데 말이지요 저는 치히로와 세이노의 사랑 이야기에 자꾸 마음이 가네요 책을 덜 사랑해서일까요?!

책을 읽고 나서도 이내 다시 읽어보고 싶어지는 「여름의 재단」 이미 시마모토 리오를 알고 있다면 새로운 주인공을 통한 심리묘사와 조각보의 그림을 맞춰나가는듯한 정교한 표현들에 흠뻑 젖을 수 있는 기회를, 처음 읽으신다면 그녀의 다른 작품들을 서둘러 찾게 되실 거예요

저는 「여름의 재단」출간 후 3년 뒤 나오키상을 수상한 「퍼스트 러브」에 급 관심이 갑니다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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