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을 한권 지인에게 선물하고 복수(?)당하는 차원에서 선물받은 시집이다.
한때는 문학동네 시인선을 따박따박 찾아 읽으며 책장 한줄이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해 지는 것이 예쁘고 좋았었다.
표절이니 문학권력이니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문동의 책을 더는 읽지 않았다.
책장은 한쪽 팔만 있는 색동저고리의 꼴로 거기서 멈췄다.
선물받은 시집을 넘겨보며 이렇게 타협하는건가?
자신에게 몇번을 묻고 대답을 미룬다.

이은규.
봄과 꽃과 달력과 겨울. 그리고 짧은 여름과 가을.
몇개의 기대어 쓴 시들.
투명한 봄날의 눈부심 같은 시집이라고 생각했다.
전작이었을 ‘다정한 호칭‘을 필사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이 시집도 그렇지 않을까?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지만 아는 맛인것 같아서 조금은 아쉬웠다.
나타샤를 만난건 뜻밖의 반가움이었고..

다음 시집에선 조금은 날카롭게 벼려진 표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몇몇 지점에서 발견한다.
문동에서 나오지만 않으면 찾아 읽고 싶은 시인이다.



- 오는 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중력이었다.

사과한알이 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 정도로 아팠다.최후.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 아니한다. *

가도 가도
봄이 계속 돌아왔다.

(*이상의 시 ‘최후‘에서)

모든 꽃은 
안 들리는 한 점 향기를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

대장장이가 쇠처럼 무른 것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래한다, 꽃잎처럼 단단한 것도 없음을
오늘의 노동을 다하지 못한 시인에게
세상이 바뀔 거라는 소식 대신 날아든 소식

문득 도착한 곳
아직 들리지 않는 향기, 꽃이 없다.

(꽃소식입니까. 중에서)

눈은 푹푹 내리고 시인은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오지 않을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고조곤히
눈 내리는 마을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 버리지 못하는

고요한 세계, 시인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 것
눈 내리는 마을 스노볼이 놓여 있다.
책장 한편

(스노볼* 중에서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기대어 쓰다)

모든 봄은 지난봄을 간직한 채 피어오르고,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마라 

경고에 가깝거나
안내보다 먼 문장들에 머뭇거리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지난 사건을 발견하며 
그 사건으로부터 뒤돌아보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봄꽃을 줄게, 꽃봄을 다오  
저만치 기억이 오고 있다 선언하는 사이

(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가코프 중편선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신아사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불가코프를 어제 읽던 책에서 발견하고 반가웠다.
다행히 그의 중편선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군침이 돌았다.
악마의 서사시/비운의 달걀/개의 심장.
세 이야기가 연결점을 가지고 이어진다.
그로테스크한. 너무나 그로테스크한 불가코프의 글들이 갖는 매력은 단순히 서사에만 있는게 아니다.
역자의 말을 빌자면
‘세 중편은 당시 혁명과 혁명 후 1920년대의 소비에트 현실을 조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풍자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테스크에는 항상 풍자적 요소가 있으나 풍자에는 그로테스크의 환상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 소설의 두드러진 공통성은 그로테스크라고 할 수 있다‘고 서술한다.
부조리극을 보는듯한 빠른 전개와 입체적 구성이 뛰어나다.
이 부조리함의 목격자이자 공범이 되는 독자는 묘한 쾌감도 느끼게 된다.

나의 책읽기란 늘 이런식이다. 충동적이며 즉각적이고 맥락없음이다. 다음 읽을 독서는 지금 읽는 책이 정해주게 되는 확률이 80%이상이다. 다음은? 일단 이 묘한 그로테스크를 더 탐닉하고 보자.

 이제 심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에 기쁨으로 바뀌어졌다.
약 2초가량 개는 죽어가면서 젊은 의사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서 온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보이기 시작했으며, 좀 차갑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손이 배 밑에 들어가 있음을 개는 아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개의 심장. 중에서)

죄가 무르익으면 돌처럼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있는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위화의 산문집이다. 현 중화권 문학의 큰 중심이라고 해도 그다지 과언은 아닐것이다. 허삼관 매혈기 하나만으로도 ‘아~그거 쓴 사람‘ 할게 분명하다.어쩌면 우리나라 영화 제목으로만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펜을 들어 글을 연주하고 음표를 서술하는 것.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자주 찾아 읽는 모 비평가는 때때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느긋했으나 나는 어쩐지 낯설었다.
서로 책을 선물하며 끝없이 복수혈전을 벌이는 내 친구도 피아노 곡이나 교향곡을 즐겨 듣고 선호한다.
곧 죽어도 헤비메탈!의 신념(?)은 늘 외로웠다.
취향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설날 방앗간에서 가래떡이 밀려나오듯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가와 작품과 음악가와 작품이 심장을 뛰게 한다.
모옌의 이야기에 와서는 분필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이미지가 그려질 지경이었다.
격랑 같은 글. 천천히 빠져들어 숨가쁘게 읽어대게 한다.

음악과 문학을 두루뭉술하게 예술이라고 묶어두는게 아니라 위화의 사유와 호기심과 창작력이 응집된 산문이라고 하겠다. 아무렇게나 읽었던, 그저 읽었다는데 의의를 두었던 책들이 열댓권 떠오른다. 다시 읽어야겠다.

‘나는 텍스트와 독서행위를 각각 만만 이라고 말하고 싶다. 둘이 의기투합하기 전까지 텍스트는 죽어있고 독서는 공허하다(머리말 중에서)‘
내가 읽은 텍스트들은 아직도 죽어 있다. 의기투합하지 못한채 빠르게 읽히고 처박혔다.
단 한마리의 만만의 이야기. 날아오르는 독서와 음악의 서술을 읽어나기까지 ..

가독성 좋은 책. 밑줄을 이백개는 그을 책이다.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언어로 쓰인 작품에서는 개방성이 열독의 방식과 화성을 결정짓는다. 한꺼번에 연주되는 음표의 활기찬 움직임과 달리, 글자는 한 줄 한 줄 조용하게 배열돼 있다. 잠에 빠진 듯 조용하고 꿈처럼 기이하면서다양하다. 그런데 독서는 겉으로만 조용해 보이지, 사실은거세게 일렁이는 물결 같다. 이것이 바로 독서의 화성이다.

- 그렇다면 진정한 견해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이거나 마음깊은 곳의 망설임이어야 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견해는 침묵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루쉰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그의 서술은 현실과 맞닿을 때 총탄이 몸에 남는 게 아니라 그대로 뚫고 지나가듯 순간적이면서 강렬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락의 서술자가 사물을 적나라하게묘사한 것이 독자를 정말 분노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환락》에서 벼룩이 어머니 몸을 기어 다니는 단락은 거의 모두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명한 초상화처럼 상징적인단락이 되었다. 또한 모옌에게 씌워진 어머니 모독죄도 작가로서의 그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사실 보수냐 급진이냐는 어떤 한 시대의 견해일 뿐, 애당
 초 음악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시대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시대와 관련된 견해 역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악은 각각의 시대와 다양한 국가 및 민족의 사람들(중략).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아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5
캐롤 앤 더피 지음, 김준환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데, 그러더군, 종신형이라고, 감방 안에서 죽어가는 것.
그 악마는 악하고, 미쳤지만, 나는 그 악마의 아내,
이게 나를 더 나쁘게 만들었어. 난 내 감방에서 울부짖었어.
만약 그 악마가 가버렸다면, 어찌 여기가 지옥일 수 있지?

(악마의 아내-2.메두사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상의 아내 봄날의책 세계시인선 5
캐롤 앤 더피 지음, 김준환 옮김 / 봄날의책 / 2019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느 오싹한 저녁 산보를 하다가, 우리는 도랑에서 잠시 잠든늙은 토끼를 지나쳤어 - 그가 멈춰서 몇 글자 적더군 - 그러곤,
일 마일 정도 더 가서, 도로를, 결혼처럼 느릿느릿, 기어가는누군가의 애완용 거북이를 지나쳤어. "이솝 부인, 느리지만끝까지 믿고 간다면 결국 경기를 이기는 법이라오." 이런똥 머저리.

(이솝 부인 중에서)

인생이 다 그렇지 뭐.
내가 병들었을 때,
지옥처럼 아프더군.
신용카드로신장을 하나 샀더니,
곧 좋아지더군.
난 아직 파우스트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지 -영민하고, 약삭빠르고, 냉담하던 그 개자식에겐애당초 팔 만한 영혼이 없었다는 것.

(파우스트 부인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