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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평점 :
위화의 산문집이다. 현 중화권 문학의 큰 중심이라고 해도 그다지 과언은 아닐것이다. 허삼관 매혈기 하나만으로도 ‘아~그거 쓴 사람‘ 할게 분명하다.어쩌면 우리나라 영화 제목으로만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펜을 들어 글을 연주하고 음표를 서술하는 것.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자주 찾아 읽는 모 비평가는 때때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느긋했으나 나는 어쩐지 낯설었다.
서로 책을 선물하며 끝없이 복수혈전을 벌이는 내 친구도 피아노 곡이나 교향곡을 즐겨 듣고 선호한다.
곧 죽어도 헤비메탈!의 신념(?)은 늘 외로웠다.
취향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설날 방앗간에서 가래떡이 밀려나오듯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가와 작품과 음악가와 작품이 심장을 뛰게 한다.
모옌의 이야기에 와서는 분필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이미지가 그려질 지경이었다.
격랑 같은 글. 천천히 빠져들어 숨가쁘게 읽어대게 한다.
음악과 문학을 두루뭉술하게 예술이라고 묶어두는게 아니라 위화의 사유와 호기심과 창작력이 응집된 산문이라고 하겠다. 아무렇게나 읽었던, 그저 읽었다는데 의의를 두었던 책들이 열댓권 떠오른다. 다시 읽어야겠다.
‘나는 텍스트와 독서행위를 각각 만만 이라고 말하고 싶다. 둘이 의기투합하기 전까지 텍스트는 죽어있고 독서는 공허하다(머리말 중에서)‘
내가 읽은 텍스트들은 아직도 죽어 있다. 의기투합하지 못한채 빠르게 읽히고 처박혔다.
단 한마리의 만만의 이야기. 날아오르는 독서와 음악의 서술을 읽어나기까지 ..
가독성 좋은 책. 밑줄을 이백개는 그을 책이다.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언어로 쓰인 작품에서는 개방성이 열독의 방식과 화성을 결정짓는다. 한꺼번에 연주되는 음표의 활기찬 움직임과 달리, 글자는 한 줄 한 줄 조용하게 배열돼 있다. 잠에 빠진 듯 조용하고 꿈처럼 기이하면서다양하다. 그런데 독서는 겉으로만 조용해 보이지, 사실은거세게 일렁이는 물결 같다. 이것이 바로 독서의 화성이다.
- 그렇다면 진정한 견해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이거나 마음깊은 곳의 망설임이어야 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견해는 침묵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루쉰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그의 서술은 현실과 맞닿을 때 총탄이 몸에 남는 게 아니라 그대로 뚫고 지나가듯 순간적이면서 강렬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락의 서술자가 사물을 적나라하게묘사한 것이 독자를 정말 분노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환락》에서 벼룩이 어머니 몸을 기어 다니는 단락은 거의 모두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명한 초상화처럼 상징적인단락이 되었다. 또한 모옌에게 씌워진 어머니 모독죄도 작가로서의 그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사실 보수냐 급진이냐는 어떤 한 시대의 견해일 뿐, 애당 초 음악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시대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시대와 관련된 견해 역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악은 각각의 시대와 다양한 국가 및 민족의 사람들(중략).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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