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도시는 누군가가 오래된 잊힘에서 그 도시를 불러내면서 새롭게 태어난다. 도시로서는 아무런 기능을 할 수 없으나 폐허 도시라는 이름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미 그리스 건축을 공부했고 동방 폐허도시 여러 곳을 발굴한 적이 있던 콜데바이는 바빌론이라는 거대한 고대 도시를 폐허에서 이렇게 불러낸다. 발굴을 하는 자에게폐허 도시는 잊힌 도시가 아니다. 자신의 환상 속에서 움직이고자신을 구속하는 살아 있는 현재이다. 

기록자가 절대 화자인 고대인들의 글쓰기는 강력한 위계질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한 기록자가 사실 전부를 지배하고 있는이 태도에는 글쓰기, 라는 것이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는 고대적인 인식에서 비롯되며 그 주술의 힘을 타인하고 나누지 않으려는 혼자서 말하는 자‘ 를 수없이 태어나게 했다.

 봄빛이 아련한 그 바닷속에는 새 바다풀이 돋아나고있었다. 할머니는 바닷빛을 한없이 들여다보았다. 그러고서 문득나를 바라보았다.
"니 그, 바다 때깔, 보나, 니가 글을 쓸 줄 알게 되몬 그 때깔 이바구 먼저 써다고."
나는 그 순간 할머니가 보던 바닷빛을 내 가슴에 끌어넣은 것같다.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의 손으로 기록하지 못하는 아직 고대에 머물러 있던 할머니가 바라보던 바닷빛을, 바닷빛을 그토록 들여다보는 삶의 한순간을 기록해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고고학적인 사실, 이라는 거창한 말 속에는 발굴의 우연이라는작은 괄호가 언제나 들어 있기 마련이다. 어떤 유적터는 다른 유적터보다 많은 유물을 안고 있으며 또 어떤 유적터는 자신의 과거를 발설하는 아무런 유물을 전해주지 않는다. 아무리 찬란한 과거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발견되지 않은 과거는 고고학적인 사실로 들어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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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개의 시산문과 희곡.
머리가 복잡할 때는 수학관련 책을 읽거나 수능 기출문제집 같은 걸 푼다. 오래 집중하고 몰입하면 개운하게 정돈된다.
신혼때는 부부싸움을 하다 감정이 격해지면 수학의 정석을 들고 방에 들어가 밤새 풀었다. 그리고 화해했다.
함기석은 수학적 상상력이 대단한 작가다.
기교가 아닌 사유가 보여서 늘 가까이 두고 읽는다.
절판되었던 국어선생은 달팽이가 복간되었다니 조만간 읽어야겠다.
태풍 때운에 창밖이 소란하다.
바닷가라 바람은 더 거세고..
고독한 대화속 수학적 상상력에 빠져버려야겠다

하나의 사물이나 현상에서 발견한 개별성을 일반성으로 보편화시킬 수 있으려면 수학자는 어떤 예술가보다 뛰어난 상상력의 소유자이어야만 한다. 특히 현대의 수학이 집중하고 있는 고차원 시공간 속으로 들어가려면 첨예하고 다채로운상상력이 요구된다. 일반인들이 수학에 접근하기가 어려운 이유는수학이 다루는 대상과 대상을 표현하는 기호 자체가 추상적이기때문이기도 하지만 수학이 고도의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라는점을 간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시를 정의하지 못한다. 나는 현실을 정의하지 못한다. 나는 나를 정의하지 못한다. 정의定義, definition는 용어의 뜻을 간결하고 명확하게 정한 문장을 뜻한다. 나는 지금 나를 진술하고 당신은 읽고 우리는 함께 세계에 갇혀 있다. 과연 이 문장은 참인가 거짓인가. 당신이 나를 읽어나갈 때 당신도 나도 계속 사라진다. 당신은 이미 좌측으로 사라진 없는 문장이다. 당신도 영원히 정의되지 않는다. 이것을 연속적으로 시각화하면 남는 것은 백지다.
백지는 무수한 당신이 참수된 광대한 설원이자 황무지고 처형지다. 나는 시인의 비논리적인 상처투성이 문장들이 그들의 삶이 처한 현실의 무수한 국면들과 결코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누구도 그것이 참인지 거짓인지 판정할 수 없다. 그 내용이 참인 지 거짓인지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문장을 수학에서는 명제命題,
 proposition라고 한다. 

(정의. 중에서)

시에서 유일한 리얼리티는 말 그 자체다. 그러나 말은 안개고양파고 그림자다. 일종의 유령이자 환영이다. 말은 사방으로 분산되면서 동시에 사방에서 실종되고 증발한다. 시에서 유일한 리얼리티는 말 그 자체에 내재된 무無와 침묵이다. 이 침묵에서 최초의음이 흘러나오고 리듬이 발생하지만, 음은 곧 우주 저편으로 긴 메 아리를 남기며 사라진다. 그 소멸의 끝자리에 누군가 서 있다. 시 인이다. 

(리얼리티. 중에서)

나에게 시는 물질이면서 반물질이고, 나는 나라는 물질의 전생과 내세 사이에 놓인 하나의 점 좌표다. 점은 수학적으로 둥근 모양이지만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한 존재다. 크기가 없고 위치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불안정한 점과 점사이에 세계가 있고 무한이 있다. 나라는 외딴 점 곁에 당신이라는외딴 점이 있다. 그 사이에 광대한 무한의 바다가 있다. 그 물결을타고 일렁일렁 표류중인 작은 조각배, 그것이 시다.

(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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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르트 판매원은 각 지역 관리점에 소속되어 있는데, 하나의 관리점마다 주택, 직장, 아파트, 시장 지구 등 17~20개 지구를 관리한다.
즉, 한 판매원이 하나의 지구를 맡아 개인영업을 하는 개인사업자가 되는 것이다.
"개인사업자지만, 회사의 직접적인 지시도 많고, 따라야 할 것들이많아요. 저희가 취급하는 제품이 발효유 외에 건강식품까지 40종이 넘어요. 그러니까 영업교육도 많이 시키고, 고객 응대방법도 많이 시키고,
새로운 제품에 대한 교육을 한 달에 두 번씩 받고, 하지만 저희한테 돌 아오는 것은 없어요. 퇴직금도 없고, 4대보험도 없고, 교묘하게 혜택만 없는거예요"

운동산업에서 폭력적인 관행이 만연한 이유는 우리가 살고 일하는사회 전체가 폭력을 묵과하기 때문이라는 거였다.

출산은 ‘애국‘이라 불리는 시대지만, 출산한 여성과 신생아를 돌보는 일은 최저임금을 조금 웃도는 임금이 책정될 뿐이다. 정부는 육아와돌봄은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인력이 제공해야 한다며 서비스의 질‘을 강조하지만, 불안정한 일자리, 부정기적인 수입 등 ‘고용의 질‘은 고려하지 않는다.

혹독한 삶의 세월 속에서 안상숙 씨가 끝내 놓지 않고 지켜온 노동들, 인간다움을 지키는 것에 대한 믿음이 그이의 주름 속에 새겨져 있다.

보육 문제를 지역사회와 정부가 함께 공공화의 방안으로 나누고, 임금노동이 정규직화되고 삶의 시간을 점령하지 않는 것으로 재편되고,
다양한 가족이 사회 속에서 공존할 때 미혼모들도 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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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출간된 책이다. 근간이라면 근간이지만 책의 절판주기가 짧아진 것을 고려하면 그리 근간도 아닌셈이다.
그럼에도 아직 구매할 수 있다니..
책이 출간되고 얼마되지 않아 읽고 리뷰를 썼었다.
다시 책을 펼친건 도로공사 노동자들 때문이다.
톨게이트에서 근무하는 고충이 미루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비인간적이며 비인격적이다.
심지어 그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되었으나 하루아침에 비정규직으로 만들고 직접고용하라는 법원의 판결도 무시한채 아무 관련없는 직무를 맡기거나 회유하며 정규직으로 고용요구를 포기하게 하려한다.
이미 갖고있던 지위를 빼앗고 시혜를 베풀듯 뻗대며 돌려주지 않고 있다.
도로교통부산하 공기업이다.
크게 이야기하면 국가에 책임이 있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해야하는 국가의 의무를 방기한 채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가의 태도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구사대(참..언제적 구사대인지)가 동원되었고 여성 노동자들은 상의탈의로 저항하기도 했다.
여전히 전기와 물이 끊어진 곳에서 경찰들과 대치중이다.
전기와 물을 끊다니..심지어 보건의료단체연합 소속 의료인들의 진료조차 막고 있다고 했다.

법무장관 후보자를 호위(?)하던 정의(?)로운 사람들은 다 어디갔을까?
노동이 존중받지 못하는 사회는 민주적이지 않다.
노동자. 특히나 여성 노동자, 거기다 장애가 있는 여성노동자의 경우는 더 참혹하다.
태풍이 거센 날.
김천의 톨게이트 노동자들과 강남역 CCTV 철탑 위의 김용희씨가 걱정된다.
그들과 그들의 가족이 ‘국민‘ 으로 보장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이유를 묻고 싶다.

기록되지 않은 노동을 다시 읽는다.

우리가 옳다!
우리가 제일 앞에 서겠다!
라던 도로공사 여성노동자들의 표정이 또렷하게 보인다.


도로공사는 하이패스에서 돈을 안 내고 도주하는 고객들 요금까지여성노동자들에게 받아오라고 요구한다. 도로공사 직원들이 직접 고객을 만나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거쳐 경영 평가가 좋으면 성과급은 도로공사 직원들 몫이다. 책임지는사람 따로, 성과급 가져가는 사람 따로인 것이다.


사람들은 판검사, 의사, 변호들에게는 ‘웃지 않느냐고 반말로 따져 묻지 않는다. 그렇듯 톨게이트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에게도 인사와 웃음을 강요할 수는 없다. 
(중략)
세상에 귀하지 않은 노동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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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론(富論), 그곳에서 읊다
용환신 지음 / 더페이퍼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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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순의 시인의 시집.
책 욕심이 많아 닥치는대로 (그래봐야 조족지혈이겠지만) 읽는 편이지만 이 시집의 이야기를 듣고 마음이 급해 서둘러 읽었다.
시인은 손글씨로 적어 몇부만 만들겠다고 했고 지인들이 말려서(?)재생지로 삼백부를 만들었다고 했다.
삼백부. 삼백명의 독자 안에 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급했다.

부론,
그곳에서 읊다.

제대로 읊은 시집이다.
눈에 마(魔)가 끼었는지 이상하게 띄어쓰기나 오탈자가 눈에 잘들어 온다.정작 나는 어법이며 띄어쓰기 다 무시하지만..
습관처럼(?) 시를 읽는데 뭔가 달랐다.
뭐지? 다시 읽는다. 뭐지?
이 시집은 읽을 수 없다. 읊어야 한다.

‘단풍잎에 스민 마음
새벽비에도 씻기지 않고
찬 물결소리에 눈뜬 바람
쌓인 낙엽 괜히 빗질하며
떨어져 길을 덮은
가을볕과 시비질이네‘
라고 읽으면 안된다.

‘단풍잎에 스민마음
새벽비에도 씻기지않고
찬물결소리에 눈뜬바람
쌓인낙엽 괜히 빗질하며
떨어져 길을덮은
가을볕과 시비질이네‘-풍경 1연
라고 ‘읊어‘야 한다.

노래하듯 장단 맞춰 띄어쓰기에 따라 읽는게 아니라 가락에 맞춰 읊어야 한다.
사진과 시가 마주한 시집은 바랜 초록색이다.
아직도 시퍼런 청년의 마음이신가보다.
시간이 색을 바래게 했겠지만..그래도 초록이다.

태풍이 온다고 비바람이 거센 창앞에 앉아 나즈막히 소리내어 ‘부론. 그곳에서 읊‘은 시를 읊는다.
잠투정이 심한 나를 재우느라 ‘자장~자장~ 우리 손지 하늘보다 귀한손지, 땅보다 너른손지. 금을준들 너를줄까,~‘한참을 읊어주시던 할머니 생각이 났다.

1/300 의 확률로 시집을 구했다.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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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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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2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