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 사회를 넘어서  

서평단 모집 (2014.04.22~30)


─ "무엇을 사든 고장이 보장됩니다!"

 


올이 풀리지 않는 나일론 스타킹, 2500시간 사용 가능한 전구는 왜 사라졌을까?

새 컴퓨터 모델은 왜 호환이 잘되지 않을까? 아이팟 배터리 수명은 왜 18개월일까?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소비해야 유지되는 자본주의 경제 체제 

 

▶ 눈부신 기술 혁신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왜 물건들은 점점 더 빨리 고장 나는가?
‘계획적 진부화’ 개념을 통해 보는 자본주의 소비 사회의 진실

 경영학에 ‘계획적 진부화(planned obsolescence)’란 용어가 있다. 기업이 내구 소비재의 대체 수요를 증대할 목적으로 제품을 계획적으로 진부화시키는 행동을 말한다. 진부화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기술적 진부화란 기술적 진보로 인해 기존 설비가 구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옛날 청동기가 뗀석기를 대신하고, 증기 기관차가 마차를 대체한 것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심리적 진부화란 광고나 유행에 의해 제품을 구식으로 만드는 방식이다. 이 경우 기존 제품과 새 제품의 차이는 겉모습, 즉 외양과 디자인의 차이, 심지어는 포장의 차이에 불과하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주요 주제인 계획적 진부화는 인위적으로 수명을 단축하거나 결함을 삽입하는 방식이다. 애초 설계 시점부터 제품의 수명이 조작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프린터에는 인쇄 매수가 1만 8000장이 넘으면 자동으로 작동을 멈추게 하는 마이크로 칩이 삽입되어 있다. 1940년 듀폰사에서 출시된 스타킹은 올이 풀리지 않고 자동차 한 대를 끌 수 있을 만큼 튼튼했지만, 자외선 차단 첨가물의 양을 조절한 이후부터 여성들은 규칙적으로 새 스타킹을 구입하게 되었다. 1881년 에디슨이 만든 최초의 전구 수명은 1500시간이었고, 1920년대 생산된 전구의 평균 수명은 무려 2500시간이었지만, 현재 우리가 구입하는 것은 제너럴 일렉트릭 등 기업 간 담합으로 1000시간 이하로 정해졌다. 수리가 불가능한 아이팟의 배터리가 제조 단계에서부터 이미 수명이 18개월로 제한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바다.

▶ 가치의 쇠퇴를 대량 생산하는 ‘발전된’ 사회 일회용 제품 이데올로기’는 우리를 어떻게 지배하는가?

 일회용 콘돔과 생리대, 그릇, 포장 등 각종 생활 용품뿐만 아니라 수리할 수 없는 휴대용 라디오, 3년 주기로 바꾸는 자동차, 유행에 따라 리모델링하는 건물, 유통 기한이 도입된 식료품, 정년퇴직 등 이제 제품 수명 단축의 논리가 산업 생산 전체를 지배한다. 경영학자 시어도어 레빗은 다윈의 이론에서 영감을 받아 ‘제품의 라이프 사이클(product life cycle)’이라는 표현을 생각해 냈다. 이렇게 계획적 진부화는 일종의 자연적 현상으로 자리를 잡았다. “바겐세일, 정기 세일, 가격 파괴, 가격 인하, 할인, 특가, 프로모션 행사 등과 동의어가 된 소비주의는 염가 처분, 가치 하락과 상실의 정신을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덕, 원칙, 이상의 상실”을 부추긴다. 
 모든 것은 판매 가능한 것이 되는 동시에 가치 하락을 겪는다. 이른바 ‘발전된’ 사회는 쇠퇴를 대량 생산한다. 다시 말해 가치의 상실, 상품을 넘어 인간까지 포함하는 일반화된 퇴락을 양산한다. 일회용 제품이 갈수록 빠른 속도로 확산되면서 상품은 쓰레기로 버려지고, 인간은 소외되거나 ‘사용’ 후 해고된다


▶ 벼랑 끝에 선 생태계,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향하여

 평균 18개월 사용되고 버려지는 휴대 전화는 비소, 안티몬, 베릴륨, 카드뮴, 납, 니켈, 아연 등 다량의 독소를 포함한 쓰레기 더미를 만들어 낸다. 그럼에도 2002년 미국에서는 작동 가능한 휴대 전화 1억 3000만 대가 폐기 처분됐다. 전자 제품 폐기물의 처리 능력이 한계에 이르렀지만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이를테면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셈이다.
 한편 제한된 자연 자원의 고갈과 관련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간 존엄성 훼손의 문제도 발생한다. 아프리카 콩고는 휴대 전화 생산에 필요한 콜탄 때문에 전쟁 중이다. 중국 서부에서 진행 중인 희토류 개발은 투르크계 주민에 대한 탄압을 정당화하며, 나이지리아 니제르 삼각주의 석유 개발은 오고니 부족의 학살을 불러왔다. 그러나 끊임없이 ‘신상’으로 교체하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는 이런 현상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눈을 감는다. 휴대폰을 오래 사용하자는 구호는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물건은 반드시 고장 나고 우리는 새 물건을 사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검소한 생활을 제안하는 차원을 넘어 성장이라는 바이러스의 완전한 퇴치를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 책에서 라투슈는 검약과 자기 통제, 내구재의 공동 사용, 에너지 자립을 갖춘 전환 마을 운동, 비재생자원 관리를 위한 세계 공동 기구 설립 등을 제안한다. 그가 제시하는 탈성장 방법론의 핵심은 우리의 상상력을 탈식민화하는 데 있다. 즉 생산하고 소비하는 방식뿐만 아니라 생각하는 방식까지 급진적으로 변화시켜,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경제 제국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것이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민음사) 차례

 

머리말

서론: 성장 중독


1 말과 사물_계획적 진부화의 정의와 성격

1 계획적 진부화란 무엇인가?

2 제품이 죽어야 소비 사회가 산다


2 계획적 진부화의 기원과 영역

1 계획적 진부화의 등장

1 인류학적 상수

2 전통이라는 장애물

3 위조의 시대

4 사고방식의 전환


2 계획적 진부화의 영역

1 ‘일회용 제품’의 등장

2 디트로이트 모델

3 진보적 진부화

4 유통 기한의 도래

5 음식의 진부화


3 계획적 진부화는 도덕적인가?

1 계획적 진부화의 사회적 역할

2 진부화와 윤리

3 인간의 진부화


4 계획적 진부화의 한계

1 소비자와 시민의 반응

2 진부화와 생태 위기

결론: 탈성장 혁명

옮긴이의 말

찾아보기 


▶ 『낭비사회를 넘어서』 지은이 세르주 라투슈 Serge Latouche

1940년 프랑스의 항구 도시 반에서 태어났다. 경제학자이자 철학자로 파리 11대학 경제학 명예 교수로 재직 중이다. 대표적인 탈성장 이론가로, 발전 지상주의와 경제를 통한 세계 지배라는 관념을 통렬히 비판한다. 저서로『메가머신(La Megamachine)』(1995), 『탈성장에 걸다(Le Pari de la decroissance)』(2006), 『평화로운 탈성장 소론(Petit traite de la decroissance sereine)』(2007), 『소비 사회를 넘어서(Sortir de la societe de consommation)』(2010), 『검소한 풍요 사회를 향하여(Vers une societe d’abondance frugale)』(2011) 등 다수가 있다.


▶ 『낭비사회를 넘어서』 옮긴이 정기헌

파리 8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을 졸업했다. 『프란츠의 레퀴엠』, 『퀴르 강의 푸가』, 『프랑스는 몰락하는가』, 『해피스톤은 왜 토암바 섬에 갔을까』, 『리듬분석』 등 다수의 책을 옮겼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번역에도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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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알랭 드 보통.존 암스트롱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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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작품이 사유의 박제가 아닌 삶의 결과물임을 증명하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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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브리오 기담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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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길치의 비애.

 

한 번 갔던 길을 용케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어디든 자신이 발을 디뎠던 곳은 어떤 방법으로든 실수 없이 찾아가곤 한다.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를 한 번 훑어보곤 서울 친정집까지 차를 운전하여 간 사람. 내 짝지다.

한 번이 뭐야. 두 번, 세 번 간 길도 늘 헷갈려하고, 아무데서나 '여기 우리 왔었지?'를 남발하며 길치임을 부정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 나다.

어디를 가든, 미리 갈 곳을 점검하고 가는 짝지와 달리, 나는 대충 어디쯤인가만 (이 역시도 불확실할 때가 대부분이다) 확인하고 일단 간다. 그리곤 곧 길을 잃고 하염없이 걷고, 살피고, 아무데나 들어가서 한 숨 돌리고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니 약속시간을 한참 지나쳐버리거나, 골이 난 짝지가 찾으러 오곤 한다.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찾아가는 것. 그것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길을 잃어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은 실로 엄청나다.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생겨난 곳을 다시 찾아가보고 싶지만, 찾을 수 없다. 그 근처를 맴돌거나 아주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마는 것. 길치의 비애다.

 

이즈미 로안은 길치다.

그는 길을 건너는 순간에도 길을 잃는다. 분명 산길이었는데 어느새 바닷가에 들어서 있거나, 동굴 속에 들어가 있거나, 남의 집 창고에 들어가 있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길치라면 말이다.

 다시 찾아갈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모여 엠브리오 기담이 시작된다.

 

 

 

(야첵 예르카( jacek yerka))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어차피 길을 잃게 되어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 2. 이런 목차

 

-엠브리오 기담

-라피스 라줄리 환상

-수증기 사변

-끝맺음

-있을 수 없는 다리

-얼굴 없는 산마루

-지옥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역자 후기

 

역자후기를 목차와 더불어 적어야만 하는 책이다.  또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적어 내려간 역자 후기 또한 일품이다. '이 사람..멋지다'하게 만든 후기. 뭔가 정형화되고 분석적인 후기가 아니라, '정말 책과 소통하며 내용에 담뿍 젖어들어서 번역을 했구나, 그러니 재미있을 수 밖에..; 라는 생각이 과하지 않다.

 

주운 태아를 품에 안고 키우는 이야기, 파란 구슬을 받아들고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온천의 수증기 속에서 만나는 오래전의 인연들, 모든 것이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다리 위의 사람들, 잔인함이 뚝뚝 떨어지는 살아있는 지옥, 빗 하나로 벌어지는 사건, 나와 이즈미 로안의 인연..

모든 이야기의 도입부가 비슷하게 시작되어진다. 앞서 읽은 에피소드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묘한 구조다. 다른 이야기지만 결코 다른 이야기가 아닌, 개별적 사건이지만 시,공간적으로 치밀하게 얽혀있다.

 

라피스 라줄리의 환상. 나는 이 이야기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다시 태어나는 삶. 이전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한 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이것이 축복일것인가. 스스로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이야기. 갖고 싶어졌다. 라피스 라줄리..나는 몇번의 삶을 겪어내면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아. 라고 결심할 수 있을까? 내 욕심의 끝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라피스 라줄리-청금석)

 

# 3. 이즈미 로안

 

이즈미 로안은 여행서적을 쓰는 일을 한다. 그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이야기를 적어내는 것이다. {도중여경}이라는 여행 안내서를 쓰는 작가이다.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건, 이즈미는 여행지를 소개하거나 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인다. 이즈미의 길잃기가 어쩐지 의도된 것일 거라는 생각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뭐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아직 덜 풀린 이야기들, 저들의 앙금과 아픔, 혹은 오해와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해소해 주는 길을 찾는 어떤 사람.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어떤 사람. 이즈미는 그 어떤 사람인 것은 아닐까.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이즈미..삼손처럼 그의 이야기도 그 머리카락 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일까?

 

책 속에서 만나지는 관경은 실로 참혹하기도, 두렵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상황이 아주 섬세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던져 놓은 환상의 버튼이 작동 되는 순간, 몇가지의 설명 코드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속이 울렁거릴만큼의 참담함..같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즈미 로안의 탄생은 언급되지 않지만- 이즈미는 붓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고통을 적어내야 하는 천형을 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길에서 벗어나기는 어쩌면 잘 프로그래밍 된 행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Jim Warren)

 

 

# 4. 밑줄.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반복해, 여태 살아온 세월이 백년을 넘었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래도 제 손으로 키운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했다. 어느 아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도 잊이 않았다. 천 년이 넘게 산다 해도 품에 안았던 아이의 무게를 기억할 것이다. (70쪽) - 라피스 라줄리의 환상

 

- 사라진 사람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하루하루 무언가를 새로이 보고 듣는 나날 속에서 옛날 일은 윤곽을 잃고 어렴풋해진다. 머릿속에 수증기가 끼는 것처럼 사라진 사람의 얼굴이 흐려진다.(101쪽)- 수증기 사변

 

-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였다. (..)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감정과 사랑은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 노파를 걷어찼을 때 느낀 감촉이다.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남을 밀어내서라도. (179쪽) - 있을 수 없는 다리

 

- 글을 쓴다는 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걸 누군가에게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글도 쓸 줄 알아야죠. (309쪽) - "자, 가요 ." 소년이 말했다.

 

 

 # 5. 길을 잃어도 괜찮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현실이 팍팍하고 서럽다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단지 길을 잘 못 든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방 도착할 길이었는데 너무 오래 헤매고 있다고 노여워 할 일도 아니다. 가끔은 오래 걸릴 길을 금방 찾아내기도 하지 않는가.

중요한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올바른 지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삶 속에 미처 태어나지 못했던 이야기, 태어났지만 너무 약했던 의지들,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온전히 만족하지 못했던 이야기, 이게 정말 내 이야기인지 믿기 어려운 자신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처 다 듣지 못하고 묻어둔 이야기..차마 꺼내지 못하고 마주 하지 못한 이야기..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없는 척했던 이야기..그 이야기들은 그렇게 묻히고 잊혀지고 사라지게 되는걸까?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고 드러날 것이다. 맺히고 풀리는 것이 순리라면 말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일은 모험이고 낯선 여행이다.

누구에게나 현재는 처음 맞는 시간이고, 처음 마주하는 상대일테니까..

백만명의 사람들이 백만가지의 방법으로 현재를 살아낼것이다. 그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억울해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일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Joel Robison 사진)

 

이즈미 로안이 한 마디 건넨다.

 

"자네는 꽤나 비관적이군. 나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아. 그냥 산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잖아." (185쪽)

*P.S​

각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있는 나비가 그려진 간지가..정말 멋지다는 귀뜸을 꼭 하고 싶었다.

정말..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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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그림자는 월요일
김중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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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어느 날의 뉴스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며 신도들에게 수억대의 돈을 받은 일면 '숙모님'이 잡혔다는 뉴스를 본다.

기도 해 주는 댓가로 헌금을 하라며, 마치 빙의 된 무속인처럼 집안의 우환까지 미리 귀뜸해주며 금품을 요구했단다.

천국에 가게 해주겠다며..

그녀에게 헌금을 한 사람들은 모두 성공적으로 천국에 도착했을까?

확인할 방도가 없다. 어느 누구도 자신의 위치를 알려주지 않는다. 그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아니 그 이전에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기는 한건지..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인 할 수 없는 어떤 것을 위해 노력하고 애쓰곤 한다.

 

구동치의 일이 그렇다. 전직 경찰출신인 탐정. 그리고  ​'딜리터deleter'​​.

어느 날 어떻게 죽을 지 모를 사람들이 자신이 죽고 나면 꼭 없애고 싶은 것들을 미리 의뢰해 둔다. 그렇게 의뢰를 받은 후 그 사람의 사망이 확인되면 구동치는 계약대로 주문한 것들을 삭제하기 시작한다. 아무도 모르게..마치 처음부터 그런 것은 없었던 것처럼 ..

구동치가 의뢰받은 일을 제대로 완수했는지 아닌지를 의뢰인들이 확인할 방법은 없다. 마치 천국에 잘 도착했는지 확인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눈 속의 불안은 아직 껍질을 깨고 나오기 전의 새와 같다. 불안은 자라서 공포가 되기도 하고, 폭력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점이 되어 사라지기도 한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을 사랑했다. 불안하지 않으면 아무도 탐정을 찾지 않을 것이다. 구동치는 사람들의 불안에 먹이를 주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p52) >​

 

# 2. 악어의 눈물

지독한 냄새가 지배하고 있는 악어빌딩 4층. 구동치의 사무실이 그 곳에 있다.

재개발이 시작될 마을, 그 곳에 자리한 악어빌딩. 악취가 빌딩의 주인이고 사람들이 그 곳에 세들어 사는 ..

악취. 어떤 것이든 살아있었던 것이 죽고 나면 제가 살았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마지막 발악처럼 형체도 없이 오래도록 머문다. 악어빌딩의 악취는 살았던 이가 많았고, 그들의 흔적과 이야기가 때론 발효되고 때론 부패하며 내는 삶의 마지막 가스층 같은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딜리팅을 의뢰받은 사람이 죽는다. 구동치는 그 사람의 흔적들을 지우기 시작하고, 그러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의 죽음과 그가 없애주기를 바랐던 물건을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 사이의 이해관계와 치졸함, 그리고 비열함.

죽은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려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의 딸을 제외하곤..

사람을 만나고 사람을 잃으며 구동치는 자신의 일을 계속해도 좋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 살아있으면서 더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으려는 마음이 삶을 붙잡으려는 손짓이라면, 죽고 난 후에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마음은 어쩌면 삶을 더 세게 거머쥐려는 추한 욕망일 수도 있었다.(p328)>

# 3. 김중혁의 글.

언젠가 나는 김중혁의 "악기들의 도서관"을 읽으며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정도로 웃었다 굳었다는 반복한 기억이 있다.

김중혁의 글에서만 느껴지는 <김중혁스러움> .

어느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서사는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임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게 한다.

자칫 사족처럼 열거하다 이야기의 핵심을 비껴가거나 너무 돌아가게되어 지루해지기 십상인 글을 있는대로 펼쳐두고 꼼꼼하게 모으고 다시 펼치기를 반복한다. 야무진 어부가 그물을 엮듯이말이다.

크게만 만들겠다고 엉성하게 엮거나 쫀쫀하게 만들어보겠다고 답답하게 엮어내는 초짜 어부의 어리숙함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물 실을 넓게 펼쳐두고 턱하니 주저 앉아 적당한 크기로, 작은 고기들은 빠져 나갈 수 있게 수완좋은 어부가 하듯이 잘도 엮어낸다.

또한 그의 글이 갖는 <김중혁스럼움>의 중요한 코드. 유머.

긴장이 고조되고 있는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툭 뱉어내는 그의 유머는 '우와` 이 사람 대체 뭐야?' 하는 반문을 하게 한다. 어이없음이 아닌, 대단한 배치인게다.

장례식장 조화 사이에 느닷없이 튀어오른 작고 푸른 청개구리처럼..슬며시 미소짓게 만들고 오래도록 기억하게 만드는 것이다. 상처가, 슬픔이, 언제까지나 그 모습 그대로 유지하며 기억을 파헤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암시라도 하듯이 말이다.

# 4. 구동치는 아마

책을 읽으며 나는 내내 구동치는 아마 마동석이라는 배우와 닮았을까? 생각했다.

 

 

어쩐지 잘 어울리는 ..만약 이 소설이 영화나 드라마로 재구성된다면..구동치 역할로 어울리지 않을까?

구동치의 냉소적인 모습, 그리도 치밀한 모습.

마치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내려놓은 사람처럼 초연하기도 , 처연하기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을 뜨겁게 끌어안은 사람이겠다 싶어졌다.

# 5. 나는

나는 얼마나 내 삶을 끌어안고 있는가.

치밀하게 내가 살아온 길들을 기억하거나 분류하고 있는가.

나는, 딜리팅을 의뢰할만한 무엇이 있는가.

많은 생각들이 머리속을 뛰어다닌다.

딱히 남기고 싶은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딱히 지워버리고 싶은것도 없다. 그만큼 애정없이 살아온 것일까? 하는 의문이 바닥에 주저앉아 저혼자 그림자의 길이를 늘이고 있다.​

내가 그늘에 숨지 않는 한 내의지와는 무관한 길이로 제 존재의 영역을 살아내는 그림자. 저마다의 기억이 바닥에 누워 그림자라는 것이 되어진것이라면, 내 그림자의 길이는 얼마나 될지 궁금해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아도 기억은 있다. 꺼내어 확인하기를 거부하는 것 뿐이다. 내가 딜리팅을 의뢰하고자 한다면, 나는 아마 그 기억들을 마주하고 파헤치는 과정을 겪어야 할게다. 세상에 남기고 싶지 않은 기억.

그건 아마 내가 세상에 저지른 오류의 다른 이름이지 않을까? 지워버리고 싶은 오류..

나 역시..좋은 사람으로 되도록 좋은 기억으로 남고 싶다는 욕심이 있다는 말이다.

내 흔적은 악어빌딩의 악취처럼 지워지지 않더라도..

<일요일의 기다란 그림자는 이미 월요일에 가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자동차는 그림자를 밟으며 빠르게 시간을 건너갔다(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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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는재로 2014-04-05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마동석같은 느낌이라고 할까 어딘지 묵직하지만 인간적인 느낌이라고 할까 구동치라는 인물이 가지는 매력이죠

나타샤 2014-04-08 15:08   좋아요 0 | URL
구동치 캐릭터가 참 아프구나 싶었어요. 더 이상 압착 불가능한 최대치까지 누르고 있는 듯한..
*^^*
흥미로운 작품이었습니다.
 
HQ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1
조엘 디케르 지음, 윤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1.

 

조엘 디케르..

작가의 어머니는 혹은 할머니는 작가가 어렸을 때 뜨개질을 하시곤 하셨을까?

아무것도 아닌 실을 이리저리 떠서 다양한 무늬를 만들어내는 마법을 따스한 미소와 함께 작가에게 보여주곤 하셨을까?

우리 엄마가 그랬다.

꽈배기무늬가 멋지게 들어간 카디건이나 알록달록한 무지개 바지, 빨간 실로 딸기무늬를 넣어주셨던 조끼..

노랑색이 귀여웠던 망토까지..엄마는 늘 손뜨개로 만드신 옷을 맵시나게 내게 입히시곤 하셨다.

그것으로 생업을 삼기도 하셨던 기억이 또렷하다.

솜씨가 좋은 엄마를 바라보며 난 늘 가슴 조리곤 했다. 느닷없이 몇개의 뜨개코를 빼놓으셨다가 한참 뜨고 나서 뒤에 남은 코를 멋지게 잡아끌어 뜨개질을 이어가셨다. 그렇게 하고 나면 햇님 달님의 동아줄이 저렇게 생겼을거야..하고 끄덕이게 하는 꽈배기 무늬가 생기곤 했다.

엄마가 그렇게 코를 떼어 놓고 뜨개질을 할때면 저게 풀리면 어쩌지? 어린 걱정이 꽈배기 무늬보다 먼저 엄마의 뜨개 바늘위를 달렸다.

점점 줄어들기도, 점점 늘어나기도 하는 마법의 뜨개질을 보며 나는 꿈을 꾸곤 했다.

 

해리 쿼버트 사건의 진실.

두 권이나 되는 녹녹치 않은 분량(열권도 넘는 대작들도 있지만)에도 그리 어렵지 않게 읽히는 책이다.

잘 짜여진 뜨개코트 같다는 느낌. 과하지 않은 무늬들로 뽀송한 털이 섞인 크림빛의 뜨개코트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2.

 

꽤 잘나가는 작가인 마커스는 첫 작품의 성공 뒤에 글이 써지지 않자, 옛 스승인 해리를 찾아가게 된다.

그 곳에서 마커스가 만나게 되는 사건.

33년전 실종된 소녀의 사체가 해리의 앞마당에서 발견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노라 켈러건.

실종 당시 15세였던 소녀.

해리는 주용의자로 체포되고, 해리가 그랬을 리 없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마커스는 조사를 시작한다.

해리를 통해 듣는 충격적인 이야기.

해리는 노라를 사랑했다고 한다. 노라 또한 해리를 사랑했다고 한다.

이 터무니 없는 사랑의 증언을 토대로 마커스는 사건의 실마리를 풀어가기 시작한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모든 오로라 사람들의 이야기가 드러나고 그들 사이의 연민과 애증과 애달픔이 드러나게 된다.

누가 노라를 죽였는가.

 

1부의 내용은 오로라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느 누구도 뺄 것 없이 노라가 사라지던 1975년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증언한다.

따로 벌어진 사건이겠지만 결국 하나의 바늘에 꿰어진 코일 따름이다.

잠시 앞 뒤로 순서만 바꾸어 배열되었을 뿐

2부에서 드디어 본격적인 무늬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마커스와 게할로우드..그들이 본 것은 정말이었을까?

해리가 혐의를 벗고, 다른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그는 정말 놀라를 죽인걸까?

놀라의 비밀과 해리의 비밀이 고스란히 보여지게 되는 2부의 모습에서는 극한 상황에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서 인간이 얼마나 교활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3.

범인이 누구인가?

이 소설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 범인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이야기 .

그들의 속내와 만나게 되는 과정이 중요한 것이다. 조끼의 무늬도 중요하지만 실이 더 중요했던 엄마처럼 말이다.

절망은 상실은 사람을 얼마나 초췌하게 만드는가. 제니가 그랬고, 노라의 아버지가 그랬고, 루터가 그랬으며 해리가 그랬다.

욕심은 사람을 얼마나 간교하게 만드는가. 태미가 그랬고, 프랫이 그랬고, 트래비스가 그랬으며 해리가 그랬다.

사랑은 사람을 얼마나 달뜨게 하는가. 노라가 그랬고, 루터가 그랬고, 해리가 그랬다.

이 모든것을 우리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을까? Human!

 

#4.

마커스와 해리의 대화를 토대로 쓰여지게 되는 글은 주고 받는 대화를 주축으로 이루고 있다. 마치 <악의 기원>이 주고 받은 편지로 이루어진 것처럼 말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모습에서 어느덧 훌쩍 커버린 제자와 스승의 조우도 볼 수 있다.

첫 코를 뜨고 이게 뭐가 될까? 가늠도 못하겠지만 어느 순간 모자도 되고, 장갑도 되어져 있는 것을 보는 것처럼,

과정 속에서 훌쩍 커버린 마커스를 만나게 된다.

서른 한가지의 가르침.

골라서 배우는 재미가 있을까?

 

 

< 해리가 이렇게 말했어요. ' 자네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게. 삶에 의미를 줄 수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네. 책과 사랑'>

마지막에 마커스가 남긴 한마디가 이 책의 마지막 매듭이 될것이다.

잘 짜여진 카디건이다. 과하게 치장하지 않고 따스하게 가슴에 품게 되는..

중간 중간 몇번인가 코를 놓치고 방황하긴 하지만, 어느새 찾아내어 흔적없이 뜨개질을 해 낸 멋진 작품이다.

 

크림색 카디건.

해리쿼버트사건의 진실은 내게 그렇게 남게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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