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브리오 기담 이즈미 로안 시리즈
야마시로 아사코 지음, 김선영 옮김 / 엘릭시르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 길치의 비애.

 

한 번 갔던 길을 용케도 기억하는 남자가 있다. 어디든 자신이 발을 디뎠던 곳은 어떤 방법으로든 실수 없이 찾아가곤 한다. 네비게이션도 없던 시절, 지도를 한 번 훑어보곤 서울 친정집까지 차를 운전하여 간 사람. 내 짝지다.

한 번이 뭐야. 두 번, 세 번 간 길도 늘 헷갈려하고, 아무데서나 '여기 우리 왔었지?'를 남발하며 길치임을 부정하려 드는 사람이 있다. 나다.

어디를 가든, 미리 갈 곳을 점검하고 가는 짝지와 달리, 나는 대충 어디쯤인가만 (이 역시도 불확실할 때가 대부분이다) 확인하고 일단 간다. 그리곤 곧 길을 잃고 하염없이 걷고, 살피고, 아무데나 들어가서 한 숨 돌리고를 반복한다. 그러다보니 약속시간을 한참 지나쳐버리거나, 골이 난 짝지가 찾으러 오곤 한다.

단 한번의 실수도 없이 찾아가는 것. 그것이 좋은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길을 잃어서 만나게 되는 이야기들은 실로 엄청나다. 그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생겨난 곳을 다시 찾아가보고 싶지만, 찾을 수 없다. 그 근처를 맴돌거나 아주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마는 것. 길치의 비애다.

 

이즈미 로안은 길치다.

그는 길을 건너는 순간에도 길을 잃는다. 분명 산길이었는데 어느새 바닷가에 들어서 있거나, 동굴 속에 들어가 있거나, 남의 집 창고에 들어가 있기도 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그럴 수 있다. 길치라면 말이다.

 다시 찾아갈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모여 엠브리오 기담이 시작된다.

 

 

 

(야첵 예르카( jacek yerka))

 

자신의 삶에서 길을 잃지 않을 자신은 있는가? 어차피 길을 잃게 되어 있다면, 그 이야기를 해보는 건 어떨까?

 

 

# 2. 이런 목차

 

-엠브리오 기담

-라피스 라줄리 환상

-수증기 사변

-끝맺음

-있을 수 없는 다리

-얼굴 없는 산마루

-지옥

-빗을 주워서는 아니 된다

-"자, 가요" 소년이 말했다.

-역자 후기

 

역자후기를 목차와 더불어 적어야만 하는 책이다.  또 하나의 에필로그처럼 적어 내려간 역자 후기 또한 일품이다. '이 사람..멋지다'하게 만든 후기. 뭔가 정형화되고 분석적인 후기가 아니라, '정말 책과 소통하며 내용에 담뿍 젖어들어서 번역을 했구나, 그러니 재미있을 수 밖에..; 라는 생각이 과하지 않다.

 

주운 태아를 품에 안고 키우는 이야기, 파란 구슬을 받아들고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온천의 수증기 속에서 만나는 오래전의 인연들, 모든 것이 사람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는 마을.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다리 위의 사람들, 잔인함이 뚝뚝 떨어지는 살아있는 지옥, 빗 하나로 벌어지는 사건, 나와 이즈미 로안의 인연..

모든 이야기의 도입부가 비슷하게 시작되어진다. 앞서 읽은 에피소드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묘한 구조다. 다른 이야기지만 결코 다른 이야기가 아닌, 개별적 사건이지만 시,공간적으로 치밀하게 얽혀있다.

 

라피스 라줄리의 환상. 나는 이 이야기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다시 태어나는 삶. 이전의 삶 속에서 만나고 겪었던 일들을 고스란히 기억한 채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 이것이 축복일것인가. 스스로 자살을 하지 않는 이상 다시 태어날 수 밖에 없는 기막힌 이야기. 갖고 싶어졌다. 라피스 라줄리..나는 몇번의 삶을 겪어내면 더 이상은 원하지 않아. 라고 결심할 수 있을까? 내 욕심의 끝은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라피스 라줄리-청금석)

 

# 3. 이즈미 로안

 

이즈미 로안은 여행서적을 쓰는 일을 한다. 그는 이곳 저곳을 여행하며 그곳의 이야기를 적어내는 것이다. {도중여경}이라는 여행 안내서를 쓰는 작가이다. 책을 읽으며 느껴지는 건, 이즈미는 여행지를 소개하거나 하는 것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보인다. 이즈미의 길잃기가 어쩐지 의도된 것일 거라는 생각 또한 부정할 수 없다. 뭐라고 정의 할 수 없는 존재. 그러나 아직 덜 풀린 이야기들, 저들의 앙금과 아픔, 혹은 오해와 고통을 어루만져주고 해소해 주는 길을 찾는 어떤 사람. 그들의 못다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어떤 사람. 이즈미는 그 어떤 사람인 것은 아닐까.

길고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가진 이즈미..삼손처럼 그의 이야기도 그 머리카락 속에 단단히 묶여 있는 것일까?

 

책 속에서 만나지는 관경은 실로 참혹하기도, 두렵고 섬뜩하기까지 하다. 상황이 아주 섬세하게 설명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던져 놓은 환상의 버튼이 작동 되는 순간, 몇가지의 설명 코드만으로도 실로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된다. 속이 울렁거릴만큼의 참담함..같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즈미 로안의 탄생은 언급되지 않지만- 이즈미는 붓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고통을 적어내야 하는 천형을 진 것은 아니었을까. 그의 길에서 벗어나기는 어쩌면 잘 프로그래밍 된 행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Jim Warren)

 

 

# 4. 밑줄.

 

- 죽어서 다시 태어나길 반복해, 여태 살아온 세월이 백년을 넘었다. 그동안 만난 사람들은 헤아릴 수도 없다. 그래도 제 손으로 키운 아이들의 얼굴과 이름은 기억했다. 어느 아이가 어떤 성격이었는지도 잊이 않았다. 천 년이 넘게 산다 해도 품에 안았던 아이의 무게를 기억할 것이다. (70쪽) - 라피스 라줄리의 환상

 

- 사라진 사람의 얼굴을 언제까지나 기억하는 게 가능할까? 하루하루 무언가를 새로이 보고 듣는 나날 속에서 옛날 일은 윤곽을 잃고 어렴풋해진다. 머릿속에 수증기가 끼는 것처럼 사라진 사람의 얼굴이 흐려진다.(101쪽)- 수증기 사변

 

- 그것은 살아 있는 사람에 대한 증오였다. (..) 과거에 가지고 있었던 모든 감정과 사랑은 죽음과 함께 사라졌다. (..) 노파를 걷어찼을 때 느낀 감촉이다. 나 혼자만이라도 살아남고 싶었다. 남을 밀어내서라도. (179쪽) - 있을 수 없는 다리

 

- 글을 쓴다는 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걸 누군가에게 전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글도 쓸 줄 알아야죠. (309쪽) - "자, 가요 ." 소년이 말했다.

 

 

 # 5. 길을 잃어도 괜찮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 현실이 팍팍하고 서럽다고 좌절할 일도 아니다. 단지 길을 잘 못 든 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금방 도착할 길이었는데 너무 오래 헤매고 있다고 노여워 할 일도 아니다. 가끔은 오래 걸릴 길을 금방 찾아내기도 하지 않는가.

중요한건, 시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올바른 지도가 아닐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삶 속에 미처 태어나지 못했던 이야기, 태어났지만 너무 약했던 의지들, 몇번이고 다시 태어나도 온전히 만족하지 못했던 이야기, 이게 정말 내 이야기인지 믿기 어려운 자신의 이야기들에 귀 기울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미처 다 듣지 못하고 묻어둔 이야기..차마 꺼내지 못하고 마주 하지 못한 이야기..세상의 평가가 두려워 없는 척했던 이야기..그 이야기들은 그렇게 묻히고 잊혀지고 사라지게 되는걸까?

이야기는 어떤 식으로든 전개되고 드러날 것이다. 맺히고 풀리는 것이 순리라면 말이다. 저마다 살아가는 일은 모험이고 낯선 여행이다.

누구에게나 현재는 처음 맞는 시간이고, 처음 마주하는 상대일테니까..

백만명의 사람들이 백만가지의 방법으로 현재를 살아낼것이다. 그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억울해하거나 두려워 하지 말일이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말이다.

 

 

 

(Joel Robison 사진)

 

이즈미 로안이 한 마디 건넨다.

 

"자네는 꽤나 비관적이군. 나는 조금도 불안하지 않아. 그냥 산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잖아." (185쪽)

*P.S​

각 이야기들 사이에 끼어있는 나비가 그려진 간지가..정말 멋지다는 귀뜸을 꼭 하고 싶었다.

정말..멋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