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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자서전 ㅣ 틂 창작문고 1
김혜순 지음 / 문학실험실 / 2016년 5월
평점 :
흰 소복 같은 표지를 벗기면 관처럼 검은 표지가 숨어있다. 습관적 그리움이 솟기 시작한다.
죽음과 죽음의 이야기와 죽음의 형태와 죽음의 목소리, 죽음의 죽음에 대한 변주.
마흔 아홉개의 글은 하루, 이틀, 사흘..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마흔아흐레로 마무리 된다. 49제를 마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할머니는 할아버지 영정 앞에서 울었다. 울며불며 노래했다.
"아이고~~이~ 세상에~ 나만 혼자 떨구고~~발길을 거두는~무정한~~사람아~아~아~ 살아생전에도~~무정하드니~~가는 길도 무정허네~~이 년의 팔자~ 어디 가서~ 한을 풀꼬~~누굴~ 잡고 원을 풀꼬~~아이고~~아~이~고~~~기다리지~마~소~이승일랑~잊어~먹고~ 이~년도 잊어먹고~ 자식들만~~기억하소~~자식들~~만 "
할아버지와 특별히 정이 없던 어린 손주년은 할미의 가락이 신기했다. 우는 건지 노래하는 건지 꺼억꺼억 숨을 들이 쉬고 내 뱉고 눈물 범벅이 된 입은 오히려 웃는 듯 보였다. 할머니는 정말 슬픈걸까? 맹랑한 손주년은 의심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를 묻고 돌아와 한 이틀을 누워 앓던 할머니는 이틀 후 이른 새벽 밥을 짓고 겉절이를 무쳐 맛나게 한 그릇을 드셨다. 머리에 수건을 쓰고 몸빼바지를 입고 밭에 나가 여느때와 다름없이 김을 맸다. 할미는 분명 슬퍼보이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는것처럼 보였다.
참으로 막걸리를 내오라는 말도 평소처럼 던져두고 가셨다.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할머니는 슬프지 않다.
시집을 읽으며 자꾸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이 생각났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날도 생각났다. 편안하게, 이기적이다 싶게 편안했던 아비의 표정을 용서할 수 없었던 어린 내가 생각났다.
내 기억 속에, 삶의 여백마다 여지없이 꽂혀있던 '죽음'을 발견했다. '죽음'은 언제나 화두였고 갈망이었고 최후의 목표였다. '꼭 죽고 말테야'라고 나는 사춘기무렵 결심했다. 죽음은 결코 끝나지 않는 지루한 과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어버리면 끝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죽음은 기록되고 저장되고 변이되어 사체가 썩어가듯 제 형체를 잃어가며 원망과 환상으로 조금씩 휘발된다. 아주 조금씩..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조금씩..
영생(永生)보다 어려운 영사(永死)를 갈망했다. 완벽하게 처리되는 삶의 흔적. 수천년이 지나서도 또 기억되고 또 떠올려지는 삶의 체취가 아닌 단 한번의 썩어문드러짐으로 끝나는 죽음. 더이상의 재생되는 기억도 찾아지는 흔적도 없는 죽음. 그런것이 필요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
사춘기 무렵..나는 까뮈를 읽었다. 그게 다였다.
죽음의 소문과 죽음의 실체를 이렇게 적어내린 시는 새롭다. '꼭 죽어야겠다'라고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살아있음이 지루하고 덧없고 하는 패배적이고 회의적이며 염세적인 관념이 만드는 망상같은 죽음이 아닌, 실체로서의 죽음. 완벽한 멸절을 꿈꾸게 한다.
바로 이거야.
나는 비로소 말 같지 않은 말이라며 내 죽음을 조롱하던 입들에 대꾸할 근거를 만났다.
마요
- 마흔아흐레
공중에 떠가는 따스한 입김 하나가 너를 그리워 마요
너보다 먼저 윤회하러 떠난 네 어릴 적 그 입술에 살랑 닿는 바람이 너를 그리워 마요
무한 창공 떠가는 아파서 죽은 그 겨울 그 여자의 얼음 심장에
가느다란 바늘이 가득 꽂히면서 너를 그리워 마요
떨어진 이파리들이 언 강물 위에 지문을 가득 붙여가면서
1백 층 2백 층 건물이 일시에 무너져 내리면서
안경은 안경끼리 신발은 신발끼리 입술은 입술끼리
눈썹은 눈썹끼리 발자국은 발자국끼리 커다란 서랍 속으로 쓸려가면서 너를 그리워 마요
80센티미터로 강물이 얼어붙고, 그 위로 탱크가 지나가고, 그 얼음 밑으로 물고기들이 너를 그리워 마요
담배 가게 앞에 14년째 전봇대에 묶인 개가 거를 그리워 마요
커다란 바람이 미쳐서 죽은 여자 수천 명을 데리고 날아가는데
내 일생의 '너'들이 웃어젖히는 소리, 쏟아지는 머리칼
겨울 풍경 전체가 울며불며 회초리를 휘두르며 너를 그리워 마요
눈발이 수천 개 수만 개 수억만 개 쏟아지며 너를 그리워 마요
온 세상에 내려앉아서 울며불며 수런거리며 눈 속에 파묻힌 눈사람 같은 네 몸을 찾지 마요, 예쁘게 접은 편지를 펴듯 사랑한다 어쩐다 너를 그리워 마요
너는 네가 아니고 내가 바로 너라고 너를 그리워 마요
49일 동안이나 써지지 않는 펜을 들고 적으며 적으며 너를 그리워 마요.
마지막 시를 읽으며 유언처럼 적어두겠노라 생각한다. '너를 그리워 마요. 나를 기억하지 마요. 완벽하게 죽도록..해..줘..요.'
투명한 유리잔에 담긴 맑은 물, 그 위에 덜어뜨린 검은 잉크 한방울이 번져가듯 수많은 곡선들이 춤을 추는 시집을 읽는다. 말랑하고 구불구불한 뇌를 가진 이유가 납득이 되었다. 그렇지 않다면 죽음은 오랫동안 제가 머물 자리를 탐색하느라 고생할테고 삶은 더없이 지루하고 길어질 것이니까. 맛없고 양 많은 쫄면을 받아든 것 처럼..
말랑하고 구불구불한 머릿 속 어디든 눈치채지 못하게 스며들 수 있는 죽음이어서 다행이다.
모른척 하자면, 완벽하게 죽으려면 완벽하게 살아내야겠다. 죽음을 삶처럼, 삶을 죽음처럼..
김혜순의 송진같은 시를 씹는다.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