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가족이 있는 집에서의 행복에 대한 사적 추구라는 아메리 칸 드림과 도스토옙스키와 그를 매우 존경했던 베르댜예프의 개념 속 에서 정신적 집 없음 spiritual homelessness, 그리고 메시아적 방랑으로 구성되는 러시안 드림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미국으로 간다" 라는 표현이 자살과 동의어라는 것,
신세계에 대해 매우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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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이름을 도대체 언제 불러보고 그만 두었을까 싶다. 그래도 가끔 무의식적으로 소련이라고 이야기 하면 이야기상대는 응? 어디? 라고 반문하곤 한다. 그상대가 젊고 어릴수록 ‘어디라고?‘하는 표정은 더 진하다.
러시아, 일상의 신화들.이라는 부제가 있지만 러시아를 읽으려면 소비에트 연방의 시기를 뺄 수 없다. 그건 마치 징검돌도 도약판도 없이 넓은 개울을 건너려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스베틀라나 보임. 소련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다가 미국관광객 신분으로 고국을 찾아 연구한 비평물이다.
매우 광범위하고 전문적이기까지하다. 읽는 속도가 붙지 않는다. 개념을 바로 잡아두어야 할것들이 많다.
제목이 된 common place 와commonplace 같은 설정들.
그렇다고 지루하거나 하진 않다. 저자의 힘이 분명하게 있다. 한문장이 다음문장을 힘있게 끌고 온다.
겨우 절반을 읽었지만 읽는 동안은 얼마나 읽었는지 인지하지도 못했다.
책 속에 삽입된 그림에 대한 도상학적 분석을 읽는데 선명하지도 않고 흑백이어서 (분홍코끼리에대한 분석을 읽으며 너무나 궁금해서..어떤 분홍?) 굳이 찾아보고 이해한다. 그깟 고무나무가 뭐라고 그것조차 이야기가 되고 분석이 되는 상황이 놀랍다.
이렇게 징검돌을 놓듯 찾아보며 읽는 것이 수고롭기보다 뭔가 즐겁다.
아직 절반이 남았다.
아무것도 아닐 일상에 새겨져있는 그들의 신화를 들여다보는 것. 다른 언어로 번역되지 못하는 그들만의 공통의 장소를 찾는 것은 의외로 스펙타클하다. 전세계적 사건과 사조와 인물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역동적인 역사이자 신화다.


모든 인간성에 공통적인 것은 기본적인 감각의 반사작용인 "열의없는 정동" languid affect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을파악하기 위해 자신을 감각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능력이다.공감은 아름다운 것을 지각하기 위해 내딛는 한 걸음이다.

 그러나 코무날카의 사적인 한 귀퉁이에 있는 고무나무는 다른 이념적 뿌리를 갖고 있다. 그것은 상상의 부르주아 온실 속의 최후의 병약한 생존자 혹은 중산 계급 거주자들의 화초용 상자 속에 있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제라늄의 초라한 친척쯤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므로 스탈린 시기에 제라늄은 제거되었고, 물리적으로도 박멸되었다.

스탠리 카벨은
"평범함의 초자연성‘uncanniness of the ordinary에 대해 이 둘은 철학적 논의에 저항하면서 동시에 이를 요청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상 삶의 평범함monplaces 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듯 보이고 이 자연스러움‘으로 인해 수많은 문화적 오역들이 생겨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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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을 한권 지인에게 선물하고 복수(?)당하는 차원에서 선물받은 시집이다.
한때는 문학동네 시인선을 따박따박 찾아 읽으며 책장 한줄이 색동저고리처럼 알록달록해 지는 것이 예쁘고 좋았었다.
표절이니 문학권력이니 수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을 때부터 문동의 책을 더는 읽지 않았다.
책장은 한쪽 팔만 있는 색동저고리의 꼴로 거기서 멈췄다.
선물받은 시집을 넘겨보며 이렇게 타협하는건가?
자신에게 몇번을 묻고 대답을 미룬다.

이은규.
봄과 꽃과 달력과 겨울. 그리고 짧은 여름과 가을.
몇개의 기대어 쓴 시들.
투명한 봄날의 눈부심 같은 시집이라고 생각했다.
전작이었을 ‘다정한 호칭‘을 필사하거나 인용하는 사람들이 꽤 많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이 시집도 그렇지 않을까?

아는 맛이 무섭다고 하지만 아는 맛인것 같아서 조금은 아쉬웠다.
나타샤를 만난건 뜻밖의 반가움이었고..

다음 시집에선 조금은 날카롭게 벼려진 표정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몇몇 지점에서 발견한다.
문동에서 나오지만 않으면 찾아 읽고 싶은 시인이다.



- 오는 봄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중력이었다.

사과한알이 떨어졌다. 지구는부서질 정도로 아팠다.최후.이미여하한정신도발아하지 아니한다. *

가도 가도
봄이 계속 돌아왔다.

(*이상의 시 ‘최후‘에서)

모든 꽃은 
안 들리는 한 점 향기를
수없이 두드린 봄의 노동

대장장이가 쇠처럼 무른 것은 없다고 말할 때
우리는 노래한다, 꽃잎처럼 단단한 것도 없음을
오늘의 노동을 다하지 못한 시인에게
세상이 바뀔 거라는 소식 대신 날아든 소식

문득 도착한 곳
아직 들리지 않는 향기, 꽃이 없다.

(꽃소식입니까. 중에서)

눈은 푹푹 내리고 시인은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오지 않을 리 없다 .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고조곤히
눈 내리는 마을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 버리지 못하는

고요한 세계, 시인이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 응앙응앙 울 것
눈 내리는 마을 스노볼이 놓여 있다.
책장 한편

(스노볼* 중에서
*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에 기대어 쓰다)

모든 봄은 지난봄을 간직한 채 피어오르고,


가만히 있으라, 가만히 있지 마라 

경고에 가깝거나
안내보다 먼 문장들에 머뭇거리지 않기 위해
이제 우리는 지난 사건을 발견하며 
그 사건으로부터 뒤돌아보면서 나아가야 한다.

그러니 봄꽃을 줄게, 꽃봄을 다오  
저만치 기억이 오고 있다 선언하는 사이

(봄이 달력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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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코프 중편선
미하일 불가코프 지음, 정연호 옮김 / 신아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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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코프를 어제 읽던 책에서 발견하고 반가웠다.
다행히 그의 중편선을 가지고 있다는 걸 기억하고 파블로프의 개처럼 군침이 돌았다.
악마의 서사시/비운의 달걀/개의 심장.
세 이야기가 연결점을 가지고 이어진다.
그로테스크한. 너무나 그로테스크한 불가코프의 글들이 갖는 매력은 단순히 서사에만 있는게 아니다.
역자의 말을 빌자면
‘세 중편은 당시 혁명과 혁명 후 1920년대의 소비에트 현실을 조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풍자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로테스크에는 항상 풍자적 요소가 있으나 풍자에는 그로테스크의 환상적인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 소설의 두드러진 공통성은 그로테스크라고 할 수 있다‘고 서술한다.
부조리극을 보는듯한 빠른 전개와 입체적 구성이 뛰어나다.
이 부조리함의 목격자이자 공범이 되는 독자는 묘한 쾌감도 느끼게 된다.

나의 책읽기란 늘 이런식이다. 충동적이며 즉각적이고 맥락없음이다. 다음 읽을 독서는 지금 읽는 책이 정해주게 되는 확률이 80%이상이다. 다음은? 일단 이 묘한 그로테스크를 더 탐닉하고 보자.

 이제 심한 두려움은 사라지고 대신에 기쁨으로 바뀌어졌다.
약 2초가량 개는 죽어가면서 젊은 의사를 사랑했다.
그리고 나서 온 세상이 거꾸로 뒤집어져 보이기 시작했으며, 좀 차갑기는 하지만 기분 좋은 손이 배 밑에 들어가 있음을 개는 아직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개의 심장. 중에서)

죄가 무르익으면 돌처럼 떨어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이것은 보통 있는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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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선율, 음악의 서술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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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의 산문집이다. 현 중화권 문학의 큰 중심이라고 해도 그다지 과언은 아닐것이다. 허삼관 매혈기 하나만으로도 ‘아~그거 쓴 사람‘ 할게 분명하다.어쩌면 우리나라 영화 제목으로만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펜을 들어 글을 연주하고 음표를 서술하는 것. 상상만으로도 멋지다.
자주 찾아 읽는 모 비평가는 때때로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고 느긋했으나 나는 어쩐지 낯설었다.
서로 책을 선물하며 끝없이 복수혈전을 벌이는 내 친구도 피아노 곡이나 교향곡을 즐겨 듣고 선호한다.
곧 죽어도 헤비메탈!의 신념(?)은 늘 외로웠다.
취향일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설날 방앗간에서 가래떡이 밀려나오듯 수없이 쏟아져 나오는 작가와 작품과 음악가와 작품이 심장을 뛰게 한다.
모옌의 이야기에 와서는 분필을 질겅질겅 씹어대는 이미지가 그려질 지경이었다.
격랑 같은 글. 천천히 빠져들어 숨가쁘게 읽어대게 한다.

음악과 문학을 두루뭉술하게 예술이라고 묶어두는게 아니라 위화의 사유와 호기심과 창작력이 응집된 산문이라고 하겠다. 아무렇게나 읽었던, 그저 읽었다는데 의의를 두었던 책들이 열댓권 떠오른다. 다시 읽어야겠다.

‘나는 텍스트와 독서행위를 각각 만만 이라고 말하고 싶다. 둘이 의기투합하기 전까지 텍스트는 죽어있고 독서는 공허하다(머리말 중에서)‘
내가 읽은 텍스트들은 아직도 죽어 있다. 의기투합하지 못한채 빠르게 읽히고 처박혔다.
단 한마리의 만만의 이야기. 날아오르는 독서와 음악의 서술을 읽어나기까지 ..

가독성 좋은 책. 밑줄을 이백개는 그을 책이다.

그렇다고 주눅들 필요는 없다. 언어로 쓰인 작품에서는 개방성이 열독의 방식과 화성을 결정짓는다. 한꺼번에 연주되는 음표의 활기찬 움직임과 달리, 글자는 한 줄 한 줄 조용하게 배열돼 있다. 잠에 빠진 듯 조용하고 꿈처럼 기이하면서다양하다. 그런데 독서는 겉으로만 조용해 보이지, 사실은거세게 일렁이는 물결 같다. 이것이 바로 독서의 화성이다.

- 그렇다면 진정한 견해는 확정할 수 없는 것이거나 마음깊은 곳의 망설임이어야 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정말 그렇다면 견해는 침묵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루쉰을 좋아하는 이유이다. 그의 서술은 현실과 맞닿을 때 총탄이 몸에 남는 게 아니라 그대로 뚫고 지나가듯 순간적이면서 강렬하다. 

다른 한편으로는 《환락의 서술자가 사물을 적나라하게묘사한 것이 독자를 정말 분노케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환락》에서 벼룩이 어머니 몸을 기어 다니는 단락은 거의 모두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유명한 초상화처럼 상징적인단락이 되었다. 또한 모옌에게 씌워진 어머니 모독죄도 작가로서의 그의 이름만큼이나 유명해졌다.

사실 보수냐 급진이냐는 어떤 한 시대의 견해일 뿐, 애당
 초 음악의 견해가 아니다. 어떤 시대에는 끝이 있기 때문에 시대와 관련된 견해 역시 소멸을 피할 수 없다. 음악에는 무슨 보수적 음악이나 급진적 음악이 존재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음악은 각각의 시대와 다양한 국가 및 민족의 사람들(중략). 따라서 음악에는 서술의 존재만 있을 뿐 다른 존재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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