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옥의 독학은 의식과 무의식, 두 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영화가의식적 차원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여성으로서의 삶은 무의식적 차원에해당하는 것이었다. 박남옥의 독학은 훌륭한 개념과 이론이 제공하는 확실한 지침 대신 공식적인 말과 글의 칸막이를 벗어난 예술적·육체적 모험을 감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말과 글의 칸막이를 넘는 일이 가정이라는 규율적 공간의 울타리를 넘는 일과 동시에 이루어졌음은 물론이다. 

훌륭한 학자 한 명이 죽으면 도서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라고 한다.
어디 학자뿐이랴. 유능한 기술자 한 명의 가치 또한 그에 못지않다. 안타까운 것은 우리 사회에 이렇게 사라지는 기술자들의 경험지를 집적할 만한 장치가 없다는 점이다. 역사에서 소외된 민중들의 구술사가 중요한 것처럼. 기술사에서 지역 기술자들의 경험지 역시 중요하다. 그들의 지식은 실전에서 찾아낸 심미적, 기술적 차원에서 가장 알맞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알맞음은 실패의 횟수와 비례해 얻어진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실패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우리 사회가 도전을 찬양하면서도 실패를 경멸하고오로지 독학만이 창조적으로 실패하는 방법을 알려준 것은 아닐까?

전태일의 분신이 한국 노동운동사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허락되지  않은 환경 속에서 읽고 쓰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노동 지리는 사실에 대한 기억은 그리 선명하지 못하다. 전태일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시회에 알리고 호소하는 데 전력했던 ‘투사‘이기 이전에 이 사회기 은페하고 있던 구조를 노동 현장에서 예민하게 탐침하며 노동자의 인어로 구체화해갔던 유례없는 독학자‘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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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학자‘란 무엇인가. 그건 사전적으로 스승이 없는 사람 혹은 학교에다니지 아니하고 혼자서 공부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느 스승‘이나 학교는 어디까지나 제도적인 측면을 일컬을 따름이다. 진정한 독학자에게는 만인이 스승이고 학교는 도처에 있다. 그런 점에서독학자‘는 기성 제도로부터 탈주하거나 소외된 인간이지만 역설적으로그 탈주와 소외로부터 수많은 배움의 단서를 풍부하게 획득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서 독학자‘는 언제나 지금 우리가 몸담고 있는 이 제도를 반성적으로 돌아보게끔 한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지배층이 지식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고 통제했 던 예는 드물지 않다. 그건 앎과 배움이 협소한 지식의 문제를 넘어 정치 적 지배의 문제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주 의는 단지 투표권의 획득에 불과한 것일 수 없다. 민주주의는 앎과 배움의 평등을 통해 만인이 통치의 주체가 될 자격을 지니는 정치체제인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바로 이와 같은 평등의 조건으로서의 삶과 배움이다. 현재 교육은 특정한 재화와 권력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합리적으로 구획하는 사회적 분할선으로 고착화되고있다. 

 개별적으로 동이하드 않든 홀로 공부한 사람은 배움이 모자란 사람이라는 생각이 지금껏 공유되고 있다. 이러한 사정은 독학이 제도권 바깥에서 배운다는 말로 무학이 제도권에서의 배움이 없다는 말로 이해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제도권 바깥에서 배우는 것과 배움이 없다는 말이 그간 유사어처럼사용되어온 것이다.

 신불출은 잡지 《삼천리》에 기고한 웅변과 만담 이라는 글에서 만담에 대한 자신의 지론을 상세히 밝힌다. 그는 만담을 강연이나 연설 재담이나 장난과 구별하며 "해후성humour의 종횡무진함과 풍랄성irony의 자유분방함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인의 가슴을 찌를 만한 칼 같은 박력이 있는어떤 진실을 필요로 하는 불같고 칼 같은 말의 예술"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어떤 독학은 그렇게 세상을 뒤틀어놓는다. 어쩌면 그 자신의 삶마저도, 그가 조선의 대중들에게 그토록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사람들이 스스로 열지 못했던, 그러나 분명 존재하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믿음의 틈새를 비틀어 열어 보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가 삶으로서 보여주었던 말이라는 독학의 한 양식을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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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때 어른들이 커서 뭐되고 싶니? 라고 물으면 ‘버스차장‘ 이라고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매일 차를 타고 멀리까지 다니는 유니폼 입은 언니들이 멋있었다. 차가 가고 서는 것도 언니들의 말이 떨어져야 했다.‘써~~ㅂ(스톱)‘ ‘오라이~~‘
이런 언니들은 드라마나 영화에도 단골로 나왔다. 가족을 위해 헌신하거나 애인을 위해 희생하다 버림받는..
공부에 취미도 소질도 없지만 남자니까 교육을 받아야하고 대학도 가야하는 오빠(혹은 남동생)을 위해 중학교 대신 공장으로 가야하는 누이들..
집안 살림을 맡아서 하며 특정되는 일이 아닌 오만가지 일을 해내며 무시와 멸시까지 받아내야 하던 식모.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한건 이모 때문이다.
‘언니.(우리 엄마) 생각나? 그 갈월동집. 내가 거기서 식모살 때 그집 아들이 하루건너 나를 팼잖아. 진짜 패물이랑 싹 훔쳐가지고 도망가서 그 집안 망하게 해볼까? 생각도 했었는데 그거 없다고 망할 위인들이 아니었던거지. 아유 내가 도망쳐봐 보증 선 사람 집이랑 우리집이랑 다 엎을건데. 엎는게 뭐야 뭐 하나라도 훔쳐갔다고 덮어씌워봐. 이름에 빨간줄 가면 xx이랑oo이는 (삼촌들) 어떡하냐구 글쎄. 내가 그때 그 쌍놈새키가 꼬챙이로 찌른 데 볼 때마다 심장이 벌렁대. 분하고 분해서‘
명절 때 모이면 이모는 그 때 이야기를 한다.
누구라도 알아달라고..이모 잘못이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거다. 하지만 엄마나 삼촌들은 못마땅해한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자꾸 얘기하고 그래! 다들 그렇게 살았는데 저만 고생한거 같이 생색은!

정말 다들 그렇게 살았을까?
일제강점기에 가속화된 여성의 취업. 그 이면엔 여성의 주인의식 주체성 같은 이유가 쪼금 있었을테고 한 입이라도 줄이려고 떠나보냈거나 떠나온 어린 일손들이었다. 그들을 고용하고 억압하며 싼 비용으로 착취한 자들은?

역사적, 사회적 분서과 다양한 매체의 자료들 그리고 생생한 인터뷰가 압권이다.
마음이 쓰리고 아프다.

엄마가 술집여자 출신 빠순이라고 한사코 인사도 안시켜주며 더러운 여자라던 한 친구와
우리엄마 양공주야! 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던 친구가 생각 났다.
그냥 ‘우리 엄마야‘ 라고 하지..그냥.

탄탄한 자료들이 뒷받침 하고 있는 책. 나이 탓인가..자꾸 훌쩍거리며 읽는다. 마저 다 읽을 수 있을지 미지수다.
아..리..다.


순이‘는 직업에 따라 세분화되었다. 식모는 식순이, 버스안내양은 차순이, 여공은 공순이‘로 불렸다. 술집 종업원은 빠순이‘였다. 당시여성들이 가장 활발하게 진출한 식모·버스안내양·여공은 뭉뚱그려 삼순이‘로 불렸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듯 이 순이‘는 그들을 비하하는 단어로 쓰였다. 가족과 떨어져 사는 어린 여성은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었다. 동정보다는 유린이 훨씬 많았다.

그들의청춘은 화창한 봄날이 아니었다. 화려한 경제 개발의 그늘에서 그들은 이름과 달리 순하게 살 수 없었다. 인권 유린과 매연, 어둠침침한 조명아래 살인적인 강도의 노동을 겪으며 청춘기를 보냈다. 이름과 반대로억척스러워져야 했다. ‘억순이는 가장 모순적인 이름이다. 모진 고생의대가가 정당했는가? 그러지도 못했다. 세상은 한 술 더 떠 그들을 삼순이라고 조롱했다. 이 억압적인 상황에 이의를 제기한 삼순이는 극소수였다. 그때마다 작명가들은 자신들이 지은 이름대로 행동하기를 요구 했다. 그렇게 그들은 묵묵히 참는 곰순이‘가 되었다.

산더미같이 쌓인 일을 하느라 제일 먼저 일어나 제일 늦게 자는 식모들의 하루 평균 노동시간은 16시간 이상이었다. 틈틈이 쉬는 시간에도 주인의 명령과 지시에 대기해야 하므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런 마당에 정기적인 휴일이 있을 리 없었다. 마음씨 좋은 주인을만나면 한 달에 한 번 쉬거나 추석이나 명절 때 집에 갈 수 있도록 휴가를 보내주는 게 고작이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4월 28일자는
"머리 빗을 시간도 없는 식모들을 위해 일주일에 하루의 휴식시간을줄 것을 당부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일의 능률을 더 낫게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임금도 최저 수준이었다. 조선인 가정의 경우 1910년대 중반까지는월 3원 정도였고, 1920년대 후반에 5~6원, 1940년대 8~10원으로 인상되었다. 1921년 기준 쌀 한 가마니(백미, 80킬로그램) 가격은 16원 4전이었다. 두 달 뼈 빠지게 일해도 쌀 한 가마니 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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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이손이 아내를 돌아보며 말했다. "갑시다. 많이 피곤할 텐데, 잘 안 되겠지만 애써 잊어봅시다." 웨이손이 아내의 손을 당겨 팔에 끼웠다.
"고마워요, 여보. 노력할게요." 부인이 낮게 속삭였다.

아내가 해스켓과의 결혼을 부정했던 이유는 그의 아내였던 사실을 지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다른사람들이 자신을 겉과 속이 다른 사람으로 판단할까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웨이손은 왜 갑자기 그녀의 동기를 분석하는지 스스로 점검하기 시작했다. 무슨 권리로 그녀에 대한 허상을만들어 판단을 가하는가? 아내는 자신의 첫 번째 결혼이불행했다고, 해스켓이 그녀의 철없는 환상을 짓밟았다고어렴풋이 말했었다. 해스켓이 전혀 해롭지 않은 사람일것 같다는 새로운 시각이 새삼 웨이손의 마음을 편치 않 게 했다. 남자라면 차라리 아내가 전 남편에게 학대받은 편이 반대의 경우보다 더 수용하기 편할 것 같았다.

아내를 보면 칼을 던지는 곡예사 같 았지만, 칼날은 무뎠고 그 칼들이 자신을 해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점차 습관도 그의 감수성에 보호막을 형성했 다. 웨이손이 조금씩 다른 착각을 하느라 그날 치 평안함을 쓰면 쓸수록 안락함에 대한 가치는 커지고 돈은 덜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는 해스켓과 배릭, 두 사람과조금씩 가까워졌고, 그 상황을 풍자하는 사소한 복수로위안을 얻었다.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작가는 상류 사회의 허식을 조롱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더 어두운 의도가 있다. 이디스워튼은 집단의 압력이 사람들의 개별적 특성을 형성하는데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19세기 말에 여성들은 대체로 ‘사회적인 이중성과 잔인성,
그리고 탐욕에 가장 처참히 고통 받는 희생자‘ 였다.
런치클럽 멤버들은 자신들의 행동을 좌우할 능력이스스로에게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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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20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타샤 2019-09-20 15:48   좋아요 0 | URL
네..주말에 뒤집어보고 나오면 보내드릴께요.^^
 

그냥 표지가 인상적이어서 구입했고 읽었다.
160쪽. 딱 떨어지는 편집(어디서 주워들으니 보통 책들의 페이지는 4배수라고..)네개의 이야기가 들었다.
위트란 이런거지. 라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작은 미소도 파안대소도 아닌 그 중간 쯤 적당한 크기의 유난스럽지 않지만 충분히 기분좋은 웃음을 짓게 한다.
스노비즘의 예시로 쓸만하지 않을까?
유한계급론도 떠오르고..반상의 체계가 무너지기 시작한 때 돈주고 산 양반지위에 거드름부터 배운 사람들의 허영도 떠올려본다.
밑줄이 많이 그어지지 않는다. 잠시 멈춤이 잘 안되는 단점이 있다. 멈춰도 되는데 멈추고 싶지 않다. 마지막까지 한호흡으로 읽고 싶게 만든다.
주머니가 큰 가디건에 쑥 찔러넣고 공원벤치나 집앞 바닷가에 앉아 키득대며 읽기 좋다.
대중교통을 이용한 이동시에 읽는 것도 가능하겠다.
이런걸 얻어 걸린다고 하나?
무심코 읽게 된 책이 자꾸 키득대게 한다.

징구 얘기 해볼까요?
전 생명의 집약이라고 봐요.^^




로라 글라이드가 잠시 불편한 듯 생각에 잠겨 있더니곧 힘주어 더듬더듬 말을 뱉었다. "작가님의 책을 읽을때는 규정하기보다 느끼죠."
 오즈릭 데인이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소뇌는어쩌다 문학적 정서가 가서 박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고는 두 개째 각설탕을 집어 들었다.

 앤슬리 부인이 시커먼 콜로세움에서 친구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난 그날 밤 전혀 기다리지 않았으니까."
슬레이드 부인이 어이없는 웃음을 웃었다. "그래, 내가 졌다. 하지만 내가 널 못마땅해 하면 안 되겠지. 벌써 오래 전 일인걸, 결국,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은 나야. 난 25년 동안 그이를 가졌고, 네겐 그이가 쓰지도 않은 편지 한 통 빼고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앤슬리 부인이 다시 침묵했다. 이윽고 테라스 문 쪽으 로 한 걸음 내딛더니 뒤를 돌아 친구를 마주했다.
 "나한텐 바바라가 있어." 그렇게 말하고는 슬레이드 부인을 앞질러 계단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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