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칙이 바뀌면 재미있는 현상이 벌어진다. 한 시간 전만 해도나는 정확히 어디로 가서 무얼 하고 무얼 기다리면 되는지 알았기에 마치 주인인 양 이곳으로 걸어들어왔다. 배심원의 의무, 그래, 그래. 어쩌면 점심시간에 괜찮은 네일숍을 찾을 수 있을지 몰라. 그런데,
이제는 남들처럼 우왕좌왕하며 지시를 기다리고, 행렬을 따라 미지의 세계로 향해 가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내가 듣기에는 섬뜩한 이야기였다. 어떤 사람이 벨뷰 정신병원으로 실려가는지 알 것 같았다고 할까.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작품을 보여주었다. 르누아르의 작품과 아주 비슷했다. 구성과 화풍과 주제가 거의 복사판이었다. 게다가 대가의 작품 일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심어주려 그랬는지 전부 서명이 없었다.
 상당히 이상하고 독창성 없는 오마주였다.

거의 모든 걸 잃었다. 그렇다고 내가 불평할 처지는아니었다.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지 않나. 나도 하는 걸 남이라고하지 말라는 법 있나. 나의 세상은 벽난로 위에서 빛나는 장미와아네모네로 지탱되는, 무정한 도시의 고독한 삶으로 쪼그라들었다. 나는 포터필드의 집안에서도 느껴질 똑같은 분위기를 상상해보았다. 지도 위에 꽂힌 두 개의 핀과 같은, 기쁨과 희열의 진원지한 쌍을, 그에게는 그의 르누아르가, 나에게는 나의 르누아르가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계속 자리에 앉아서 두번째 발작을 기다리는 중이다. 벽이 휑해 보이지만, 어쩌면그게 더 나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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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스는 꿀꺽꿀꺽 남은 맥주를 비우고 새 캔을 향해 손을었다. "아니, 파랑은 광기를 상징해."
"뭐라고?"
"그게 패턴이야." 마이어스는 소용돌이치는 그림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대순으로 연구했거든. 반 도른이 점점 미쳐갈수록 파란색을 쓰는 빈도가 높아졌어. 그리고 주황은 고통을 상징해.
그의 전기에서 개인적으로 위기를 겪었다고 한 시점과 그림을 매치해보면 그에 상응해서 주황색을 썼다는 걸 알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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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화살" 딕슨이 말했다. "아시다시피 여기서 선택된 무기는 화살이죠. 보스의 작품에서 화살은 메시지를 상징합니다. 연구자들의 얘기로는요.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날아간 화살은 메시지 전송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게 있고 또 이게 있죠."

양심의 위기는 피할 수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

딱 몇 분만 더 쉬었다가 다시 시작하자. 다 잘될 거야.
그는 델라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쩌면 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손전등이 나갔고, 어둠이 동굴을 채웠다.

도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물 간의 경계 상실을 극도로강조함으로써, 사물이 한데 뭉뚱그려지고 서로 연결된 범신론적색채의 우주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반 도른의 그림에서 나뭇가지는 외형질의 촉수가 되어 하늘과 풀밭으로 뻗고, 하늘과 풀밭의촉수는 나무를 향해 뻗어나와 한데 뒤엉키면서 선명한 색감의 소용돌이를 이루었다. 그는 빛이 일으키는 착시 현상이 아니라 현실자체 혹은 적어도 그가 생각하는 현실에 대해 고심하는 듯했다. 그의 기법에 따르면 나무가 하늘이었다. 풀밭이 나무이고 하늘이 풀밭이었다. 모두가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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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젤 앞에 앉은 마스터를 관찰하면 절대 안 돼요. 고통과 갈망과 희열로 인한 발작으로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숨을 헐떡이고 무릎을 부들부들 떨며 이젤 앞에 웅크리고 앉은 마스터를 흘끗 쳐다보는 것도 절대 안 돼요. 왜냐하면 예술은 마스터에게조차 잔인한주인이거든요. 

상처를 치료하는 능력으로, 또는 상처를 찢어서 더 큰 고통을야기하는 능력으로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예술이라는 수수께끼..

그러던 어느 날 마스터가 간결하고 섬뜩한 제목을 붙이려는 특별한 작품의 모델로 나를 선택해요. <라 빅팀〉.
아빠도 이 초상화를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그게 바로 내가 미술관에서 보고 생기 없이 축 늘어진 포즈로 누워 있는 소녀가 나를닮은 게 아니라 바로 나라는 걸 느낀 작품이거든요.


 아직 살아 있는 우리는 인색하게 구는 마스터의 하인에게 먹을것을 구걸해요. 마스터는 아주 영리하고 아주 잔인해서 아이들에게 주는 만큼 하인들 몫은 줄어들도록 집안의 먹을거리를 제한해놓았거든요.
모든 폭군이 그렇듯 마스터도 서로 싸우게 만드는 법을 알아요.
우리는 유한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주는 게 많을수록 네가 갖는 것은줄어들 것이다. 너무 많이 주었다가는 네가 굶어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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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규는 귀연이를 사랑하여 그녀에게 입맞췄다. 귀연이는 나를 사랑하여 나에게 입맞췄다. 나는 당골네를 사랑했으나 그녀에게 입맞출 수 없었다. 나는 당골네의 달 같았다. 당골네를 중심으로 공전(公轉)하였다. 귀연이는 나의 달, 나를 중심으로 공전하였고, 승규는 귀연이의 달, 귀연이를 중심으로 공전하였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결국당골네를 축으로 하여, 그녀가 움직여가는 궤도를 따라 나와 귀연이와 승규가 서로를 중심으로 공전하며 우주를 유영하고 있었다. 가난뱅이들이 짓밟힌 몸뚱이를 눕히기 위해 도시의 버려진 산자락에 가까스로 마련한 달동네는 우리의 우주였다. 

터덜터덜 쓰레기밭을 걸어내려오며 나는 이 사이에 쓰디쓴 침이고여드는 것을 느꼈고, 그와 더불어 그때 이미 깨달아야 했다. 나의꿈은 결코 현실과 화해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집세가 밀리면 집주인 여자가 어미에게방을 빼라고 호통을 쳤고, 어미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건드리면 죽은 체하는 거미처럼, 바보 흉내를 내며 멍하니 서 있다가 내가 눈에 띄면, 어서 들어가서 공부 안 해 이 똥통에 처박았다가 뙤약볕에 말려 죽일 놈아, 하고 고함을 질렀으며, 동네 사람들은멸시의 눈총으로 흘끗 쳐다본 다음에는 저주가 전염될까 두렵다는듯 우리집 쪽을 외면하고 다녔다. 그들은 불운이 얼마나 전염성이강한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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