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집
전영애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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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탐독의 시작은 '시'였다. 세상이 궁금했던 시절, 도스토옙스키와 까뮈, 루쉰으로 이어졌다. 잘난척 하는 까칠한 여고생의 전형이었달까?

실존에 대한 고민과, 아직 발 딛지 않은 묘연하기만 한 '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두려움은 딸 수 없는 신포도처럼 언제나 치기어린 결론을 내리곤 했다.

'별 거 있겠어? 사는거지 뭐..' 이런 시덥잖은 말들이 오가고 그 사이에 마음이 맞는 친구를 만나고, 그것이 이성이었을 때, 세상은 적당한 율격을 갖는 시가 되었었다.

막막함과 의심으로 그득했던 여고생의 노트에 릴케가, 하이네가, 브레히트가, 괴테가 그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숨쉬는 것 조차 탄성이 날 정도로 모든 것이 놀랍던 시간들. 그 속에서 '시'는 친절하게 삶을 이해시켜주는 뮤즈였었다.

공동일기를 쓸 때마다 하이네를 썼다.

마냥 낭창하지만은 않은 결기. 삶을 마주하는 견고한 시선이 내 눈과 마음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것인가? 어찌해서 이렇게 단단하고 뜨거울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고민은 거기까지였다.

혀끝에서 달달하게 감도는 시들은 청춘의 시절을 건내준 좋은 친구였다.

몇 해의 시간이 흐르고 마르크스를 읽고 엥겔스를 읽어낼 때..다시 만난 하이네.

공산당 선언의 마르크스와 천상 시인인 절친 하이네. 그제서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詩는 時라고 말이다.

시대를 노래하는 시. 끝없는 반역과 반역을 노래하는 시. 사랑조차도 무너뜨리고 넘어서는 사랑이어야한다. 감상에 주저앉아 허우적대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진화하는 영혼의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내 청춘의 대부분의 시간에 세상으로 난 창문에서 파랗게 펄럭이던 시와 시인들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가만히 앉아 그랬다더라가 아니라 그가 숨쉬었던 곳, 그가 거닐었던 곳, 그가 통곡했던 곳의 이야기가 말이다.

그의 詩가 태어나던 바로 그 時에 머물고 싶어졌다.

 

열 세명의 시인들을 찾아나선 시인.

시인의 집에서 시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노래는 먼 시간을 돌아 시를 읽어내며 신열에 달뜬 여자애를 초대한다.

여기에서, 이 공간에서, 이 때에, 나는 이런 삶을 살다가, 이런 노래를 부를 수 밖에 없었어요. 내가 시를 쓴 것이 아니라, 당신이 찾아온 것처럼 시가 찾아왔지요. 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렇게 전영애의 손을 잡고 그의 발을 빌어 걷는다.

그녀가 거기 시인이 있고 시가 있어서 찾아갔던 것과는 달리 시인의 집으로 초대받은 왕년의 독자가 되어 걸어본다.

길 위의 흙먼지도, 발밑에서 미끄러지며 자락자락 소리를 내는 자갈에서도 젖은 땅에서도, 낮은 웅덩이에서도 오래 전 낯익은 노래들이 만나지는 길이다.

때론 콧노래처럼, 때론 비통한 삶의 비명처럼, 때론 안타까운 신음으로 문 앞에 다가선 내게 조용히 인사를 건넨다.

 

"당신 거기 있군요"

이미 오래 전 떠난 자리라는 걸 알지만, 그 문 앞에 서성이다 시인과 만났던 시들이 그랬듯, 온 신경을 모아 감각해본다.

 

참 성실한 글이다.

다박다박 밟아낸 자욱이 선명하다. 낮이거나 밤이거나 찾아가지 않을 수 없었던 사연들이 하나같이 절절하다. 하나같이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시인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

시의 행간에 박힌 눈물의 흔적까지 한숨의 얼룩까지 찾아내고야 마는 애정이 느껴지는 글이다.

시인들의 시를 번역하며 얼마나 공을 들였을까 짐작이 되어진다.

 

이쪽의 시간에서 저쪽의 시를 부른다.

너무 먼 간극에 주춤거릴 때, 그녀가 조심스레 노란 징검다리를 놓는다.

"시인의 집" 구경가지 않을래요? 라고 거절할 수 없는 초대장을 내민다.

 

시인이란 아마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인 것 같다. 사람과 세상을. (p290-파리의 미아: 하이네의 미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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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전쟁
김진명 지음 / 새움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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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두뇌로 엘리트의 정석코스를 달리던 이태민. 그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한 것이었다. 누구도 그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으며 세계적인 학자가 될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는 돌연 전공을 바꿔 무기중개상이 된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으로서 남북한의 관계를 누구보다 실질적으로 해석해냄으로 능력을 인정받고 시쳇말로 한몫 잡은 후 편안한 말년을 보낼 것을 계획한다.

야망과 영민함으로 무장한 이태민은 거물과 거래를 하게된다. 그러나 방산비리 수사에 연루되어 중국으로 피신하게 되고, 그곳에서 킬리만자로라 스스로 별명을 붙인 소설가 전준우를 만나게 된다.

물론 말 한마디 섞지 않은 사이였지만 어느날 전준우로부터 전해받은 USB. 그는 태민에게 USB를 넘긴지 얼마되지 않아 살해된다.

조국으로부터 쫓기고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쥐게 된 이태민의 이야기.

 

그동안 김진명의 소설처럼 정치소설, 혹은 역사소설의 형태를 가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구려, 천년의 금서, 싸드..

이야기의 첫 장면은 북의 고위간부의 총살 순간이다.

권력의 마지막. 역사로 기록될 것인지 반역으로 기록될 것인지가 결정되는 순간이 아닐 수 업다.

그것도 절대 흔들림 없을 것 같은 북의 최고위 간부의 총살.

시작부터 숨을 삼키게 한다.

이태민의 성장과정을 읽어내려가며 도대체 이 서사와 "글자"는 어떤 관계가 있는것인가. 무기거래상과 글자. 준엄한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묻는 '글자'의 유의미성에 대한 의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글자의 이야기는 전준우에게 건내받은 USB를 읽어가며 하나씩 제기되기 시작한다.

현재와 소설이 교차되어 서술되는 이야기는 흥미진진하다.

어쩌면 이 책을 읽는 이들이 그랬을거라는 생각을 한다.

전준우의 소설만 먼저 후루룩 읽어버리는..마치 맛있는 핫도그를 손에들고 조급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시지를 먼저 꺼내먹는 우를 범하듯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는 건, 그래도 핫도그는 맛있다는걸 알기 때문이다.

전준우의 소설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이태민은 내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다. 전준우의 다음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던 까닭이다.

그렇게 소설 속 소설을 먼저 읽어버리고 한숨을 돌린다.

그리고 나서 다시 읽는 이태민의 행적과 사고의 변화.

긴장감을 다소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왔겠지만 후회는 없다. 전준우의 소설은 끝을 맺지 못했다. 그 뒤가 궁금해졌다.

 

얼마전에 한글과 한자를 병행표기 하는 문제로 시끄러웠다.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며 민족의 얼과 정체성을 이야기했다.

일제강점기에도 지켜낸 한글. 천민의 글이라는 기득권자들의 괄시를 이겨내고 천민으로부터 강인한 생명력을 부쳐받아 오히려 강인해진 한글. 그런 한글의 우수성이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제국주의의 침탈을 받아 식민지로 지냈던 대부분의 나라가 독립을 이룬 후에도 자국의 언어가 아닌 지배국의 언어를 혼용하여 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글자는 그런 것이다. 지배하려는 자는 자신의 언어를 심어두려하고, 지배당하는 자는 자신의 언어를 잃지 않으려하지만, 무력이 동원되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지켜낸 한글. 그것만으로도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질 이유는 분명하다.

그렇기에 한자를 굳이 병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적입장들이 많았다.

남의 나라 글자를 굳이 같이 써야만 하는가에 대한 문제제기. 그 문제제기는 올바르다.

그러나 만약 남의 나라 글자라고 했던 한자가, 우리나라의 것이라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소설속의 가정이라지만 김진명식의 구체적인 근거들과 치밀한 연구는 마치 그것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호기심을 발동시킨다.

세상의 모든 글자를 만들었다는 창힐. 그 글자를 얻어다 쓰는 주변국은 글자를 쓰게 해주는 것 만으로도 감지덕지한다.

기록할 수 있다는 건,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기록으로 이어질 때 영속성을 보장받게 된다.

기록이 분명할 때, 역사적으로 갖게 되는 지배국으로서의 지위는 얼마나 강고해질 것인가.

이런 지위는 후대에 걸쳐 여전히 힘을 지니게 할 것이고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국가적 우위를 점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글자를 누가 만들었는가는 중요하다.

이미 있는 글자를 없앰으로서 자신들이 만든 글자가 시작이었음을 주장하려는 세력은 또 얼마나 잔인한 세력인가.

자신들의 글자로 대체하기 위해 같은 뜻과 음의 글자를 먼저 쓴 부족을 모두 죽이는 일도 서슴치 않게 된다면 말이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전준우는 그의 소설에서 써내려간다.

마무리 짓지 못하는 누구의 글자인가에 대한 소설 속의 소설은 충분히 흥미롭다.

 

글자는.

한 나라의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진정성있는 도구일 것이다.

그것에 국가의 얼이랄지, 힘이랄지 하는 것이 실리는건 당연한 일이다.

지켜내고 발전시켜야 할 글자. 우리의 글자는 잘 지켜지고 발전되고 있는가.

어느 강대국의 글자를 부러워하고 그 글자를 쓰게 해 준다면 고맙겠다는 비겁한 생각은 하지 않는가.

수많은 의문들이 머리속에 맴돌았다.

무기거래상으로서의 이태민의 등장이 적확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전쟁이었다. 두뇌싸움도 심리전도 아닌 말 그대로 글자를 사용하는 백성들이 목숨을 걸었던 바닥으로부터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언제나처럼 바닥에서부터 지켜지는 역사와 글자.

길고 긴 고구려라는 대하소설을 집필하던 중에 써냈다는 말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러나 써야했을 것이다.

그의 이야기가, 그의 이야기가 선택한 글자가 얼마나 단단한 뿌리를 지니고 있는 것인지,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 동북공정에 힘을 쏟는 중국의 움직임에 , 그들이 기고만장함에 주눅들 필요가 없음을 짚어내야만 했을것이다.

 

그 먼 옛날 우리의 조상들이 뿌려둔 글자의 가지들을 자랑스러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을테니말이다.

글자는..

온몸으로 지켜내는 것이다.

전준우의 끝내지 못한 소설이 못내 아쉬운..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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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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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직업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른 새벽부터 모인 자리. 그들이 가난과 싸운 시간만큼 길고 긴 줄이 이어지고 피로와 희망과 긴장이 공존하는 자리에 느닷없이 돌진한 한 대의 차.

피할 곳이 없던 사람들은 고급승용차에 희생되고 유유히 사라지는 범인.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메르세데스 킬러라고 불렀다.

도난차량으로 결론지어진 그 차의 주인. 올리비아는 키를 꽂아두고 내렸다는 의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부주의한 행동이 참사의 무기를 제공한 꼴이 되며 시달린다.

올리비아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자살이었다.

퇴직한 형사 호지스. 무료한 일상속에 아버지의 유품을 만지작거리며 하루하루를 보낸다.

메르세데스 킬러 사건을 맡아 진행하다 사건을 마무리짓지 못하고 퇴직하게 된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그런 무료한 일상 속에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발신인은 메르세데스 킬러. 일을 마루리 지어보라는 일종의 도발. 아니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 일을 마무리 짓지 못할것이니 그냥 죽어버리라는 일종의 경고이자 조롱이다. 이렇게 시작된 퇴직형사 호지스와 브래디(메르세데스 킬러,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싸움이다.

길다면 긴 600여 페이지의 이야기.

스티븐 킹의 글들이 그렇듯 영상으로 옮긴대도 하나 이상할 것 없는 힘을 갖는다. 이것이 작가에 대한 선입견이 만들어내는 착각인지 아니면 이야기가 유도하는 결론인지는 불분명하다.

분명한 건, 읽어나가면서 어떤 구체적인 캐릭터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CSI나, NCIS, 크리미널 마인드, 멘탈리스트, 캐슬, 본즈...

크리미널 마인드와 멘탈리스트를 조합해 조금 더 심리적으로 파헤치고 인물 설정을 보강하면 비슷해지기도 하겠구나 싶다.

독자의 눈이 이만큼 좁은 탓인지도 모르겠다.

 

#2.

모든 것에서 손을 뗐지만 아직 미련이 남은 사람과, 세상으로부터 버려졌다고 생각하는 범인.

아버지를 잃고, 동생을 잃고, 어머니를 잃은 브레디. 그 모든 죽음들이 사고이거나 의도적인 것이었거나 죽음을 끌어온 주체는 세상이었다.

아버지의 사고사, 몇푼의 보상금과 남은 어머니와 두 아들. 지적 장애가 있음직한 둘째와 똘똘하고 의젓한 첫째 브래디. 젊은 어머니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은 브래디였다.

부주의한 사고로 동생의 상태는 더 악화되고, 비참해진 삶은 암묵적 동의하에 장애물을 제거(?)하게 된다. 그렇게 남게 된 어머니와 브래디.

비정상적인 모자관계는 어쩌면 피해의식과 죄의식이 만들어낸 뒤틀린 보호막이었을지도 모른다.

세상에 알려지고 세상이 자신을 기억했으면 좋겠다는 브래디의 희망 역시 잊혀지고 싶지 않고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바람이 만들어낸 기형적 욕망이었을거다.

작은 균열은 조금씩 자라 커다란 균열이 되고 손 쓸 사이도 없이 붕괴를 시작하지 않는가.

브래디의 작은 균열은, 그렇게 커다란 붕괴를 향해 달려간다.

 

호지스.

익숙한 어떤 역할에서 배제되는 순간 사람들은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퇴직.이라는 말이 주는 의미를 되새김해보게 된다.

무력감과 절망. 삶의 대부분을 채웠던 내용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기분일까?

어쩌면 호지스의 모습은 퇴직한 가장들의 모습과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할 일이 있는데, 아니 해야하는 일이 있는데 합법적으로 그 일로부터 밀려나 모든 권한들을 내려놓아야할 때 느끼는 막막함 같은 것이었으리라. 가족도 없이 홀로 지내는 이라면 더더욱.

그의 심장을 뛰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퇴직이라는 말은 시한부선고보다 엄청난 파괴력을 갖는 말이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시한부는, 언제까지 살 수 있다는 말일테다. 퇴직은 이제부터 죽어가는 것이라는 말일거다.

극단적인 비유인지 모르겠으나 느껴지는 무게감은 그랬다.

 

메르세데스 킬러의 도발을 받아들인 호지스.

사건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만나게 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속에서 만나게 되는 살아도 좋을 이유들.

이 이야기는 어쩌면 범죄수사라는, 탐정소설이라는 맥락보다 삶을 이해하는 방법이라는 맥락으로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장애는 누구에게나 있으며 수치심은 누구에게나 발현한다.

문제는 얼마나 치명적인가인데 이것은 불행과 장애와 수치심의 문제가 아니라 과녁의 문제이다.

단단한 강철 과녁인가 물렁한 과녁인가..이렇게 말하면 너무 개인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건가? 여기서 단련이라는 말이 필요할게다.

 

사람은 관계속에서 단련된다.

호지스나 브래디. 모두 시작은 혼자였다.

호지스가 넓혀가는 관계속의 사람들도 혼자였다. 올리비아도, 제니스도, 홀리도..

닮은 상처를 향해 내미는 손, 그 손을 잡고 이어지는 관계들, 그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는 사람들..

이들과 맞서야하는 끝가지 혼자였던 브래디.

안타까웠다. 또한 그의 고통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가 도출해내는 파괴적 결론을 응원하기도 했다.

관계를 만들어가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니까 말이다.

 

책을 읽는 내내 브래디를 응원한다. 성공하지 못할거라는 암시들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호지스의 연대는 강력했고 치밀했다.

 

#3.

참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을 만나는 재미가 있다.

보여지는 모습에서 진저리를 치거나 비호감으로 낙인을 찍어놓게 되지만, 어느 순간 그를 이해하게 된다.

이해한다는 건 어떤것일까.

판단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특히나 어떤 사람에 대한 판단은 말이다.

내 판단이 옳다는 건 어떻게 증명하며 인정받게 되는가.

생각이 많아진다.

 

올리비아는 부주의하지 않았다. 브래디가 영악했다.

제이니는 안타까웠다. 브래디가 허술했다.

프랭키는 차라리 잘되었다. 브래디는 간교했다.

엄마는 그럴거라고 생각했다. 브래디가 불쌍했다.

 

올리비아는 부주의하지 않았다. 호지스가 미련했다.

제이니는 안타까웠다. 호지스는 강해졌다.

제롬은 남자가 되었다. 호지스가 힘이 되었다.

홀리는 홀리가 되어간다. 호지스가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위로받고 싶고, 위로받아 마땅한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거나 위로를 갈구하는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기억되는 것에 집착하는 브래디.

브래디의 마지막,

#4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으며 사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브래디가 안타까웠다. 어쩌면 처음부터 호지스와 상대가 되지 않을거라는 예감때문이었거나 '정의가 승리한다'거나 '범인은 꼭 잡힌다'따위의 암시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증거물들이 쌓여가고 추론해가는 것보다 심리를 이용하는 과정이 더 많다.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제롬과 홀리와 함께 폭발적인(?) 추리를 해내는 과정은 흥미진진했다.

홀리는 어쩐지 NCIS의 에비를 자꾸 떠올리게 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혹시 후속작이 나오는건가? 하는 기대를 갖는다.

그 마무리가..그렇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 후속작은 조금 더 치밀해지거나 조금 더 잔혹해도 좋겠다.

수없이 많이 쏟아지며 점점 진화해가는 수사물에 독자들도 영악해지고 있다는 걸..아니면 아주 클래식하게 풀어도 나쁘진 않겠다. 머독 미스터리처럼..

p.s

P314. L.18- '그는 소동이 벌어지지 모르겠다고' 오탈자이지 싶다. '벌어질지'가 아닐까?

뜬금없는 지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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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박스
조시 맬러먼 지음, 이경아 옮김 / 검은숲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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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이지 않음.

 

책을 읽으며 자꾸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떠올렸다. 갑자기 사람들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이제까지 잘 보이던 세상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서 침투한 바이러스에 의해 보지 못하게 된다는 건 두려움과 당혹감일것이다.

느끼지 못하겠지만 눈으로 본다는 것은 일종의 선제적 안전장치인 것이다. 위험한 것들을 미리 인지할 수 있는..

그것을 타의에 의해 차단당했을 때 느끼는 공포는 엄청난 것이리라.

그런데,

그 엄청난 공포를 스스로의 힘으로 선택한다면?

즉, 살아남기 위해 눈을 감고 보지 않아야 한다면 어떨까? 매 순간 확인하고 싶은 눈 앞의 세상을 보아서는 안되는 상황.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리고 나오던 오르페우스도..결국 뒤를 돌아보고야 말았지 않던가.

 

보이지 않음. 보지 않음 사이에서 충돌하는 파장은 생각보다 공포스러울 수 밖에 없다.

살기 위해 눈을 감는다. 생존은 그 어떤 대의명분을 앞선다. 서편제에서는 득음하기 위해 눈을 멀게도 했다. 하물며 생존의 명분 앞에서..

 

#2.

 

먼 러시아에서부터 소식은 전해진다. 사람들이 서로에게 폭력을 행사하다 스스로 삶을 마감한다. 자살하는 것이다.

상냥하고 따뜻했던 이웃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이 어느 날 문득 이웃을 죽이고 가족을 죽이고 스스로 죽는다.

그저 먼 어느 도시의 삭막한 이야기려니 덮어두려하지만 그 잔혹함은 마치 징기즈칸의 군대처럼 빠르게 번지기 시작한다.

어느 덧 맬로리의 부모님의 동네까지..맬로리의 동네까지..번져온다.

사람들이 변하기 전, 죽음으로 온몸을 던지기 전 무언가를 보았다는 제보에 두려운 이들은 눈을 가리기 시작한다.

두려움은 말라버린 강물에 내리는 비처럼 순식간에 번져나가고 흡수되기 시작한다.

사실, 맬러리는 원치 않게 갖게 된 아이에게 모든 신경이 쏠려있다. 다른 이들의 죽음에 집중할 여유가 없다. 언니 새넌의 죽음을 마주보기 전에는 말이다.

살아야 했다.

신문 귀퉁이에 난 작은 공지. 맬로리는 그 주소로 찾아간다. 두 눈을 감고 말이다.

생존한 사람들과 매 순간 그들이 눈 뜬 순간을 노리는 크리처들..그 공포의 줄다리기가 시작된다.

공황상태에 빠져 예민할대로 예민해진 그들을 통솔하는 톰. 사람들의 모인 곳에는 늘 있는 부정적 캐릭터 돈, 그리고..사람들.

극한의 공포 속에서 맬로리는 출산을 한다.

 

이야기는 아이들의 눈을 가리고 강으로 떠나는 맬로리와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이 눈을 가린채 소리를 정확히 듣기 위해 훈련해야 하는 이유가 하나씩 교차되며 진행된다.

엄마인 맬로리의 미소까지 듣고 판단할 수 있게 된 보이와 걸..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눈을 멀게 할까? 갈등하게 했던 아이들과 맬로리의 생존투쟁이다. 상징적인 의미가 아닌,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다. 크리처를 피해 안전한 곳으로 ..

두려움과 공포. 그러나 아이들의 엄마로서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야하는 책임과 사랑. 그 한가운데 눈을 가린 맬로리는 급류위의 배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3. 버드박스.

 

노아의 방주처럼 혼란의 시대를 대비한 사람의 집으로 모여든 사람들.

그러나 끝이 보이지 않는 혼란과 죽음 속에 부족한 것은 늘어만 간다. 위험이 다가온다는 경고조차 없이 서로에게 의지한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

결국 밖으로 나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찾아온다.

그들이 그나마 안전한 집에서 나가 겨우 두 블록의 거리를 며칠동안 헤매다 구해온 시베리안 허스키 두마리와 버드박스.

무언가 가까이 다가가면 큰 소리로 울어대는 버드박스는 그들에게 좋은 경보기였다.

 

아이들과 맬로리를 노리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치 않지만 줄곧 그들의 배를 따라오며 위협을 가하는 존재.

머리위를 날던 새들이 비처럼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동물에게도 크리처는 영향을 주는걸까?

새들이 미쳐버린 것처럼 서로에게 부딪고 물어뜯으며 떨어져내린다.

커다란 새장 속에 들어온 것만 같다.

 

어째서 제목이 버드 박스여야 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좀 남았다. 버드 박스가 나오기 전까지의 이야기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것들..그 이후의 상황에서도 새가 쏟아져내리기 전까지는 이야기 속에서 '새'의 의미는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다.

히치콕의 '새'가 잠시 연상되기도 했다.

하지만 쏟아져 내리는 새의 사체라는 참담한 이미지와 잠깐 겹쳐진것 뿐..

이야기의 몰입도는 좋았다. 맬로리의 심리상태와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 사이에 드러나는 균열에 대한 묘사는 탁월했다.

모든 상황이 수긍이 되었다고 하면 과언일까?

나는 어쩌면 돈과 같은 반응이었을거라고..

 

#. 4

 

세상은 불가해한 곳이다. 위험은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고, 공포는 언제나 공격의 준비를 끝낸 채 기회만을 엿보고 있다.

너무 많은 것을 보고, 너무 많은 것을 듣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지금. 우리는 스스로를 미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눈을 감고 온몸으로 느끼며 진심으로 살아내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는지도 모른다.

세상도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정화해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 킹스맨에서처럼 인간이 지구를 망치는 바이러스일지도 모를일이다.

인간은 세상을 미치게 하고 세상은 인간을 미치게 한다.

인간은 세상을 죽이고 세상은 인간이 스스로를 죽이게 방조한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듣기 위해 애쓰지 않고, 스스로 세상의 일부분으로 살아내는 것으로 그 역할을 순응할 수 있다면..좀 나아질까?

 

생각이 많아지는, 여러가지 장면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작품이다.

버드 박스는..외부의 것이 침입하려한다는 경고이기 이전에, 삶에 대한 공동의 책임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를일이다.

 

시끄럽지 않은..새 두마리쯤 키워보고 싶다.

내 욕심에 반응하는 것이면 더 좋을 일이다.

크리처가 세상을 파괴하긴 했을까? 그 크리처가 나와 이웃이 아닐거라는 확신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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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녀굴 - 영화 [퇴마 : 무녀굴] 원작 소설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7
신진오 지음 / 황금가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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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종말은 없다. 영혼에는 출생도 죽음도 없다.

한번 생겨난 존재는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태어나지도 않고 영원하며, 항상 존재하며

죽지 않는 태고의 존재다.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 中에서.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적힌 이 한 마디가 어쩌면 무녀굴이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하나의 지침이었는지도 모른다. 기억을 타고 영원히 이어지며 불멸을 얻게 되는 영혼의 영속성 같은..

#2.

 

자전거 동호회 매드맥스의 회원들이 찾은 김녕사굴, 그곳에서 알 수 없는 일을 당하고 사람들은 실종된다. 어느 곳에서도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홀연히 나타난 동호회 중 유일한 여성이었던 희진의 귀환.

사건의 중심이며 사건의 시작이며 도구로 존재하는 금주와 이해할 수 없는 죽음을 당한 남편의 친구이자 퇴마사인 진명, 그리고 그녀의 딸 세연.

이야기는 이렇게 그 시작을 연다.

뱀과 연관된 이야기는 어릴 적부터 상서롭지 못한, 풀지 못한 원한이 있는, 이승에 미련이 남아 떠도는 원혼의 이야기로 할머니로부터 혹은 ‘전설의 고향’이라 통칭되는 드라마로 들어왔고 보아왔다. 이런 이야기 탓인지 ‘뱀’은 ‘자살’이라는 말 만큼이나 억울한 누명을 쓴 부정적인 단어가 되어왔다. 터부. 뱀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순간, 뭔가 이상한 사람이 되는 느낌을 받게 되고, 차라리 입을 다물게 된다.

어쨌든 이야기는 금주의 주위의 사람들을 죽이거나 화를 당하게 하면서 진행된다.

이 비밀을 풀어가는 진명. 생환자였던 희진에게 단서를 얻으려하지만, 강력한 무녀의 영혼이라는 것 이외의 단서는 찾지 못한다.

조금씩 맞춰지는 퍼즐조각처럼, 금주의 무당 어머니와 외할머니로 되짚어가는 가계의 역사는 평범과는 거리가 먼, 차곡차곡 한을 쌓아가는 여정이었음을 알게 된다.

무녀의 영혼이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진명과 금주의 퍼즐은 조금씩 맞춰지고 이 참혹한 일들을 끝내기 위한 작업을 준비한다.

정말 잘 풀어낸걸까?

이야기의 끝으로 치달으며 어서 이 상황을 끝내라고 조바심을 내며 읽는다.

그러다 마주하게 되는 반전.

섬뜩함은 바로 거기서 극대화되어졌다. 세상에..어떻게 이걸 눈치채지 못했을까?

이야기 속으로 몰입되며 나는 어쩌면 진명과 금주에게만 집중하게 되었나보다. 한번 결정된 시야는 좀 더 넓은 주변을 살피길 거부했고, 이야기의 전개만을 따라가게 되었다.

조용한 복도를 걷다가 갑자기 누군가 문을 벌컥 열고 나오게 되면? 놀라지 않을 방법이 없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작품의 말미에 전개되는 반전은 바로 그런 것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이가 있을 수 있는데, 어쩌면 그것이 당연하데도 의심하지 않고 있다가 털썩 주저앉을만큼 놀라버리는..그런..

잘 짜여진 이야기라는 말이다. 아귀가 잘 맞아 의심없이 끌려가게 되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고야마는..

#3.

영화화 된다고 했다.

책은 이미 영화 이상이다. 모든 장면들이 마치 드라마나 영화화를 예상하고 쓴것이 아닐까? 의심이 될만큼 구체적인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간에 보아왔던 영화나 드라마의 이미지가 남은 것일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생환자 희진에게 퇴마의식을 할 때 그녀가 보였던 행동들을 읽으며 자연스레 엑소시스트를 떠올리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스크린으로 좀 더 생생하게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마지막 일전을 치루는 김녕사굴의 비밀 공간을 어떻게 그려낼지도 ..

각색하는데 많이 고생하지 않았겠다..이미 그 자체로 주인공들의 캐릭터는 살아있고 생동감 있었으니 말이다.

#4.

악령, 전설, 이런것들이 버무려진 공포물일지도 모른다.

책장을 덮으며 오싹했다면 공포물이 맞을것이다. 하지만, 애잔했다면?

오랜 시간을 더듬어, 악령이 되어서도 확인받고 싶었던 것이 사랑이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나, 의지와 상관없이 밀려나고 터부시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은 얼마나 외롭고 처참할지 가늠되지도 않는다. 고스란히 겪어야했던 삶의 무게를 어디에도 덜어낼 수 없었던 한 여인의 응어리는..오랜 시간을 걸으며 단단해지고 날카로워졌을게다.

위로받지 못한 상처. 용서할 수 없는 일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위로하고 용서하며 이생에 살았음에 남길 것 없이 청소하는 과정은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떠날 것들이 떠나고, 남을 것들이 남아 살아내는, 누구도 이 질서를 교란하거나 깨고 싶지 않도록 용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한다. 끝나는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이리라.

별 기대 없이 반쯤은 뻔한 내용이겠거니 읽어낸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오래 생각한다.

나는..잘 살고 있는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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