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다드 동물원 구하기 - 그가 구한 것은 동물원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The Earth)’였다!
로렌스 앤서니 지음, 고상숙 옮김 / 뜨인돌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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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동물을 매우 좋아한다. 가끔 동물원에 있는 동물들을 보면 그들의 귀여운 모습에 기분이 좋아지고 한껏 미소가 지어지기도 하지만, 넓은 자연에서 맘껏 뛰어다녀야 할 저들이 이렇게 좁고 갑갑한 철창 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사실이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비단 동물원의 동물들만이 안타까운 것은 아니다. 우리가 키우는 애완동물들도 그렇다. 필요에 의해, 인간들의 욕심에 의해 키워졌다가 버려지는 동물들이 많다. 마치 장난감이나 인형처럼 귀여울 때 생각없이 데려가 키우다 병들고 늙어서 미워지면 버리는 몹쓸 사람들이 문제인 것이다. 또 버리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사정상 키우다가 다른 곳으로 보내버리고....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이기심에 의한 동물 학대로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물론 동물을 사랑하고, 애완동물들을 끝까지 사랑하고 책임지는 사람도 많다.

 

세상 곳곳에 동물원들이 많듯이, 이라크 바그다드에도 동물원이 있었다. 하지만 2003년 봄, 이라크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라크 시내에 무차별 폭격이 가해지고 사람들도 여럿 죽어나가는 혼란 속에서 누구하나 동물들 목숨을 책임지고자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가여운 동물들은 세상에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죽음을 맞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환경보호운동가인 로렌스 앤서니는 어느날 CNN 뉴스에서 수류탄 파편에 두 눈을 거의 실명한 사자를 보고, 오직 동물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이라크 행을 결심한다. 전쟁이 일어나면 동물들은 도망치지도 못하고 스스로 보호할 수도 없다. 무관심 속에 도매금으로 살육되거나 우리에 갇힌 채 굶어죽는다. 또한 전쟁으로 살기가 오를대로 오른 광기어린 군인들은 무차별 총난사로 이유없이 동물들을 학살하기도 한다.

 

동물을 구한다는 그의 생각이 참 대단하고 존경스러웠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전쟁통에 동물을 구하겠다고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그가 솔직히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이 얼마나 무섭고 끔찍한 것인지는 일일히 설명 안해도 이해될 듯 싶다. 사방에서 총탄이 날라오고, 자살폭탄테러가 들끓으며, 언제 어디서 폭탄이 터질지 알 수 없으므로 한시도 긴장을 풀 수가 없다. 게다가 이라크에서 백인으로서 다닌다는 것은 그냥 대놓고 '죽여줍쇼'와 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정신이 아니시네요....이곳은 시궁창이에요. 싸워서 뺏을 가치조차 없는 곳이라고요"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들끼리의 갈등 때문에 동물을 지옥으로 꺼지라고 할 수는 없었다 <p.80>

 

"문명화 된 인간이 야생동물을 그렇게까지 끔찍하게 학대하는 것을 정당화한다면, 대체 얼마나 많은 보이지 않는 악행이 지구에 가해지고 있을까?"  <p.334>

 

우여곡절 갖은 고생과 위협 속에 쿠웨이트와 중립적인 남아공 정부 그리고 연합군본부 지원을 받아 가까스로 이라크 진입에 성공한다. 이라크 현지 동물원의 실상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처참했다. 폭격으로 벽 한쪽이 모두 허물어졌으며, 총구멍이 수없이 뚫려 있었다. 일부 힘없는 동물들은 약탈자들에 의해 모두 잡혀가거나 희생되었고, 남아 있는 동물들은 그나마 스스로 인간들의 탐욕에서 몸을 지켜낼 수 있었던 일부 이빨을 가진 맹수와 하늘을 나는 새뿐이었다. 전쟁의 공포는 과연 인간에게만 미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속에 갇혀서 눈앞에 폭탄이 떨어지는 상황을 이 동물들을 얼마나 무섭게 견뎌냈을까?
그들은 패닉과 갈증, 굶주림으로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였고, 상처로 고통받고 있었다. 눈앞의 상황이 너무 비참했던 그는 차라리 총을 하나 서서 동물들을 하늘나라로 고이 보내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자비를 털어 동물들을 위한 먹이와 수로를 만들었으며, 현지 이라크인들을 고용해서 힘겹게 난관을 헤쳐나갔다. '힘겨운 난관'이란 것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무서웠다. 단지 동물을 구하기 위해 이라크에 진입한 한 남자의 눈을 통해 난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간접체험 한 느낌이다. 그는 동물들 뿐만 아니라 굶주려 있는 이라크 사람들도 돕는다. 목숨에 위협을 받는 상황을 잘 이겨내며, 그들은 동물들을 살려냈고, 사담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궁에 고립된 사자들을 구출하고, 도둑과 마약범들이 들끓는 아부그라이브에서 사담 후세인이 기르던 종마도 구출해낸다. 6개월간의 고생 끝에 동물들은 안정을 찾고 2007년에 바그다드 동물원은 다시 새롭게 문을 열게 된다.

 

꽤 감동적인 이야기였다. 세계 한편에선 개발이란 이름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전쟁으로 인간을 포함한 수많은 생명체를 몰살시키고 있는 현실에서, 하나의 생명이라도 지켜내고자 노력하며 자신의 모든 것, 목숨까지 걸었던 그의 용기가 더욱 값지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것을 지켜내려는 노력... 그것이 모든 생명체와 공존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인간이 지구에 대해 지켜야 할 최소한의 책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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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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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는 세밀하게 조직화되어 있으면서도, 거대한 조직이 긴밀히 연결되어 돌아간다. 경제와 환경 문제에 있어서 한 나라에 문제가 생기면 그 파급 효과는 거의 전세계적으로 미친다. 특히 환경 문제는 더 이상 지역적이고 국가적인 문제가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고심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작가는 이와 같은 논지를 시작으로 역사 또한 거시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으로 이해하고, 자잘한 것이 아닌 전체 '흐름'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사의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을 '인간의 감정'이라 규정하고, 인간의 감정이 만들어낸 다섯가지 힘을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로 나누어 설명한다. (여기서 '몬스터'는 이데올로기를 말한다.)

 

'욕망' 분에서는 커피와 차, 금과 철 등의 물질들이 어떻게 세계사의 흐름을 만들고 변화시켜왔는지 설명한다. 물질을 획득하려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상업이 번창하고 상업의 흐름이 경제와 국가의 흐름을 바꾸며 인류 역사가 변화해왔다는 것이다. 또한 브랜드와 도시가 세계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음을 설명한다.

 

'모더니즘' 부분에서는 우선 근대문명이 딜레마를 갖게 된 원인이 유럽이 지중해 문명으로부터 받는 '가속력'에 원이이 있다고 말한다. 근대와 중세문명의 차이점과 근대 유럽의 원천이 된 민주정치에 대해 설명하고, 프로테스탄트의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발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막스 베버의 이론으로 설명한다. 또 자본주의가 근대화와 함께 발전된 이유를 알게되며, 데카르트의 이론에서부터 이성에 의한 과학적 사고가 중시되는 시대로의 변모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제국주의' 부분에서는 인간의 본성적인 야망의 욕구가 제국이라는 산물을 탄생시켰으며, 각국의 제국주의 역사를 통해 제국의 본질을 설명한다. 로마제국, 이슬람제국, 청나라 등 역사적으로 이민족을 지배했던 많은 제국주의를 예로 들어 성공하는 제국과 실패하는 제국의 이유를 설명한다. 또 현대 '글로벌리즘'이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되어 불리는 '보이지 않는 제국주의'의 문제를 꼬집어 비판도 한다.

 

'몬스터'부분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이라고 하는 세 가지 이데올로기에 대해 설명한다. 이 부분은 내가 가장 흥미롭게 읽은 부분이기도 하다. 마르크스가 간파한 자본주의의 본질과 자본주의의 결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계속 발달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데올로기의 대립으로 야기된 전쟁과 현재의 국제정세를 설명하고,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이슬람 전쟁을 반복하는 미국에 대해 현대판 파시즘으로 비판한다. 또 신흥 자본주의국으로 떠오른 인도와 중국의 특이한 국가적 사정과 이후 향로도 주목할만 한다.

 

'종교' 부분에서는 세계사를 움직인 3대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에 대해 설명하고, 종교들이 인류 역사의 거의 모든 전쟁사의 주범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을 이야기한다. 제국주의와 기독교가 하나가 되어 정복전쟁을 추진했던 가혹한 역사와 '이슬람=테러'라는 공포의 이미지가 만들어진 역사에 대해서도 짚어본다. 더불어 현대사회에 해결하기 어려운 중동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작가가 동양인이어서 그런지 이슬람교에 비해 기독교에 비교적 신랄한 비판을 한다.

 

이 책은 굉장히 새로운 학설이나 내용은 아니었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우선 '욕망'이라는 이름 하에 상업의 영향력 측면에서 주목했다는 것이 흥미로왔다. 또한 중고등학교 시절에 배웠던 토막토막한 세계사의 흐름을 한눈에 쉽게 정리할 수 있어서 편리했다. 또 역사 이외에 문학, 예술,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설명은 역사를 쉽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이 더 많다.

그 첫번째는 조금 산만하다. 다섯가지의 주제 하에 원시고대사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설명은 큰 흐름은 대강 잡힐지 모르겠지만 요약과 생략이 많고, 이내용 저내용 조금씩 추려서 설명하다보니 오히려 혼란스러운 점이 많았다.

두번째는 작가가 일본인이라는 것이다. 일본 관점에서 일본 역사를 주축으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나라 입장에서 우리 역사를 중심으로 설명했더라면 더 이해가 쉬웠을 것 같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세번째는 작가의 주관적 경향이난 편향적인 추측성 해석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과거 역사와 함께 현재의 역사를 재조명하기도 하는데, 그것 또한 작가의 주관적 경향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제국주의, 종교, 글로벌리즘 등등)

자칫 따분해질 수 있는 역사서에 작가의 견해가 들어감으로 인해 흥미를 북돋아 줄 수는 있겠지만, 역사서라는 것은 명확학 객관적 증거만을 다뤄야 한다는 것이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어쨌든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꽤 쉽고 즐겁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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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공식 한국어판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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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기술이 발달되면서 인간은 예전보다 편하고 안락한 생활을 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난 커피포트에서 걸러진 커피를 홀짝이며, 인터넷을 통해 앉은 자리에서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일들을 보고, 또 이렇게 틈틈히 즐거운 블로깅을 하고 있다. 아무리 복잡한 계산과 정리라 하더라도 컴퓨터 하나로 간단히 해결되고, 이메일이나 메신저 하나로 세계 곳곳과 연결하여 통화가 가능하다. 얼마나 간편한 세상인가? 세상이 빠르고 간편해졌다는 의미에서의 진보라고 한다면 상상을 초월할 만큼 확실한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발전된 진보가 시간이 빨라진 만큼 사람들로부터 시간을 빼앗아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고 있는 것 같다.;; 우린 늘 시간에 쫒기는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가?(나만 그런가 ;ㅋ)

 

과연 우리는 예전에 비해 편해지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사내 메신저로 오더가 내려오고, 모든 업무가 내가 직접 움직이지 않아도 전자와 네트웍으로 신속하게 처리되지만,  메신저는 편리함을 넘어선 사원들을 하나의 네트웍으로 통제하는 강력한 철창이다. 이메일로 간단히 외국의 친구와 서신을 교환할 수 있지만 손수 글을 써서 우편으로 보내는 것에 비해 정겹고 따뜻한 맛은 떨어진다. 이밖에도 현대사회의 기술발달과 문명에 대해 설명할 것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사회가 진보하고 발달되었다면, 우린 전보다 여유롭고 안락한 생활을 누려야하지만 실상 우린 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전보다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또한 기계를 통한 교류는 인간관계를 더욱 단절시키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진보인가?

 

전에 리프킨의 '엔트로피'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는 엔트로피로 세상의 이치를 정의하며, 세계는 점점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고, 결국 세상은 카오스의 세계, 즉 혼란과 파멸로 가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사회의 저엔트로피 방향을 모색하자고 주장한다. 난 이 책에서 리프킨의 이론과 논리는 이해가 되었지만 '과연 저엔트로피로의 방향 전환이 가능할까?' 라는 의심을 접을 수가 없었다. 이론적으로는 타당한 것 같지만 '실제적 적용이 가능한가'에 대한 의심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진보를 거꾸로 돌리자는 이야긴 것인데.. 상식적으로 불가능하단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책 <오래된 미래>를 통해 저엔트로피로의 방향 가능성을 조금이나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가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일부 사회에선 자연스럽게 그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식문화나 주거문화 같은 것들이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유기농 식생활, 흙을 이용한 주거환경 개선 등등.. 각종 인스턴트 식품과 그것도 모자라 유전자 조작 식품까지 판치는 요즘 세상에 이런 자연친화적인 방향으로의 모색은 확실히 저엔트로피로의 전환 가능성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이 책을 쓴 작가가 주장하는 바도 결국 낭비를 지양하고 자연을 효율적으로 절약하며, 자연친화적인 삶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이 책의 작가 헬레나 노르베르는 라다크란 나라에서 십수년을 살면서, 그곳 사람들의 생활, 습성, 문화를 모두 습득하고 경험했다. 라다크는 히말라아 지역을 넘어 카라코람의 하부에 위치한 2000피트에 이르는 고봉과 계곡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자급자족하는 농경생활을 하며, 자연을 아끼고 검약의 중요성을 생활화하며 살아가는 민족이다. 그 검약 속엔 불교의 가르침이 존재한다. 물질적으로는 풍요롭지 못한 생활이지만 자연 속에서 늘 여유있고, 행복한 모습으로 살아간다. 많은 수의 미개발 지역 사람들은 자연과의 친밀성이라는 측면에서 문명사회보다 더 강한 힘과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70년대 중반 그들 앞에 관광 지역과 경제 개발이란 이름으로 현대 문명이 침투하면서 라다크 사회는 변화한다. 인간들이 변하고, 사회도 점점 각박하게 바뀌어 간다. 이 모든 변화를 지켜보며 작가는 진정한 의미의 진보와 행복한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던진다. 행복하게 살던 라디크 사람들은 서구의 규범을 따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래도록 유지해온 평온함을 잃어버렸다. 서구 문물 유입 속에 자신들이 낙후되고 가난하단 생각을 하게 되었고, 자신의 고유 문화에 대해 열등의식에 사로잡혔다. 물질적인 욕구에 크게 개의치 않았던 소박한 사람들이 돈에 사리사욕을 챙기기 시작했고, 빈부격차가 커졌다. 생활 속도는 빨려졌고, 사회적 유동 경향이 증가하면서 친밀했던 인간관계가 소원해졌다.

 

소위 말하는 글로벌경제와 증대되는 과학기술의 영향력은 자연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 관계를 단절시킬 뿐만아니라 자연과 문화의 다양성도 파괴한다. 서구사회의 획일적 문화는 강력한 강제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인간의 폭넓은 자아개념과 문화까지도 말살시킨다. 작가는 인간과 자연의 생명들 사이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파괴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경제활동이라는 의미의 성장이라는 단어가 미화되어 사용된다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컬하다고 하였다. 제3세계 국가의 환경문제와 기아문제는 현재 경제개발의 모델에 뭔가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작가는 꼭 사회적, 생태학적 균형을 희생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삶의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다.

 

작가는 제3세계 국가가 스스로 미래에 대한 자율적인 결정을 할 수 있는 '반개발'과 기술의 획일성에 반대하는 것과 함께 지역자원의 지식, 기술의 최대한 활용을 장려해야한다고 말한다. 또 경제와 에너지 부분에 있어서도 탈중심화가 필요하며, 농업의 합당한 권위를 복원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고, 불필요한 무역을 줄일 것을 시사하고 있다. 그것은 보수주의를 고수하는 차원이 아니라 세계 전역의 자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그 활용에 있어 평등함을 유지하기 위함이라 말한다.

 

앞서 내가 생각한 것처럼, 현대 사람들은 현대의 진보를 과거로 절대 돌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연 그리고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근원적인 패턴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해 볼 수 있다. 라다크의 원시 사회에서 배울 점은 바로 그런 것들이다. 인간 중심의 자연 친화적인 새로운 운동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이런 운동은 '새로운'이 아니라 라다크 그리고 훨씬 그 이전부터 우리 사회가 해오던 오래된 것들이다. 머지 않은 미래에 바로 이런 숭고한 가치를 재발견하고 새로운 전환점을 모색하는 일들이 곧 일어난다. 아니 이미 시작되었다. 그것이 바로 '오래된 미래'이며, 이것이 작가가 이 책을 통해 그리고 라다크로부터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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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젖 짜는 사람 - 다마스쿠스에서 온 이야기들
라픽 샤미 지음, 이상훈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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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몇 개의 프랑스 작품에 심취해서 제목만 보고 골라온 <파리 젖짜는 사람>이란 작품은 내겐 황당하게도(?) 프랑스 작품이 아니었다. ㅎㅎ 작가는 독일인이었고, 이 책의 배경은 우리에게 낯선 도시 다마스쿠스이다.(다마스쿠스는 시리아의 수도이다.) 생각없이 짚어 든 소설 속에서 난 다마스쿠스의 이국적이고도 따뜻한 이야기들을 접할 수 있었다. 마치 작가가 어린 시절 경험한 내용을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알고보니 작가는 다마스쿠스 태생 독일인이다.

이 책은 열세가지의 단편으로 꾸며진 하나의 작품이다. <파리의 젖짜는 사람>은 열세가지 중 하나의 제목으로 살림 아저씨가 군대에 안가려고 귀먹어리 행세를 했던 이야기를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책의 내용이 유쾌하다 말했지만, 사실 내막을 들여다보면 안타까운 부분들이 훨씬 많다. 알다시피 이 책의 배경인 시리아란 국가에서 과거의 경험을 끄집어 내어 이야기를 엮기엔 어두운 사회적 배경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그다지 평탄하다고 할 수 없는 시리아의 현실....잦은 내전과 쿠데타 그리고 아랍 - 이스라엘간의 전쟁으로 사회는 안정되지 못하고 사람들도 궁핍한 생활을 면하기 힘들었다. 이 책속에서도 그런 안타까운 현실들이 속속 엿보인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가난한 살림, 어려운 살림에 돈을 보태기 위해 설탕 과자나 닭은 파는 어린 소년, 학교와 사회에서 차별받는 쿠르드족 친구 마흐, 이슬람과 기독교의 갈등, 비밀 경찰 이야기 등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 모든 이야기들을 작가는 따뜻하고 정감어린 시선으로 우리에게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간혹 슬픈 내용도 있었지만, 대부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고 어쩔 때는 혼자 낄낄 웃기도 하며, 열세개의 이야기를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마치 전에 읽었던 <망고 스트리트>라는 작품(미국에사는 멕시코 빈민자들의 어두운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천진난만한 소녀 에스페란자를 통해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졌던)의 안타까운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결코 따뜻할 수 없는 현실들이 이렇게 유쾌하고 아름답게 풀어낼 수 있는 것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눈을 통해서였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어쩌면 작가는 아이들의 눈을 통해 안타까운 현실과 사회 정세를 풍자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즐거웠지만 묵직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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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1
미셸 투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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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내가 무인도에 홀로 떨어진다면? 이란 상상을 해봤다. 친구들끼리 우스개 소리로 무인도에 가게 되면 젤 먼저 뭘 가져갈꺼냐는 이야길 하기도 한다. 농담삼아 '머리빗하고 책...'이라 대답하긴 하지만, 무인도에 갈 이유도 없거니와 만일 홀로 그곳에 떨어진다는 생각만으로 소름이 끼친다. 아주 어린시절 그림책으로 봤던 <로빈슨 크루소>라는 이야기가 어렴풋이 떠오른다. 배가 난파된 영국인이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면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어린 내게 굉장한 공포감(?)을 주었다. 무인도에 혼자 떨어져 살아간다는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만약 내가 이 책에서처럼 폭풍 속에 배가 난파되고 홀로 살아남아 무인도에서 깨어났다면, 홀로 살아남은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되지 않을 것 같았다. 홀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도,  탈출하고자 하는 의지도 잃어버릴 것 같았다. 공포로 미처버리거나 맥없이 죽는날만 기다릴지도 모르겠다. 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 같았다. 인간이란 타인이 있기에 자신의 존재성을 깨닫게 된다는 이 책속의 내용이 정말 뼈져리게 와닿았다.

 

로빈슨이 무인도에서 홀로 살아남았을 때, 처음에는 탈출하려 배를 만들고 갖은 노력을 다했지만 실패한다. 그는 좌절했고, 무력감에 빠졌으며 점점 동물적인 욕구로 젖어들게 된다. 자신이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느껴갈 즘 죽은 누이의 환영을 보고 서서히 정신을 차린다. 섬을 재건하기 위해 노력하고, 섬을 '스페렌자'라 부르며 자신을 그 섬의 총독으로 칭한다. 법을 만들고 인력, 시계 등의 지표를 만들며, 일지도 쓴다. '스페렌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스페렌자'와 결합하여 '만드라고라'라는 딸들도 만들어낸다. 하지만 그는 대지와의 결합으로 인간성을 점점 상실하고 자신이 원소화 되어 간다고 느낀다. 결국 그가 인간의 존재로 남아 있기 위해 필요한 것은 '타인'의 존재였다.
 
그때 로빈슨 앞에 처음으로 '타인의 존재'인 그 섬의 혼혈 원시인인 방드르디가 나타난다.
 
로빈슨은 방드르디를 길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방드르디는 처음엔 로빈슨에게 순종하지만 쉽게 길들여질 인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로빈슨이 그동안 구축해 놓았던 문명의 질서를 하나하나 파괴해나가기 시작한다. 방드르디는 로빈슨과 전혀 다른 이세계에 속해 있는 것 같았다. "방드르디는 실질적으로 일이라곤 전혀 하지 않았다. 과거와 미래의 개념이라곤 일체 알지 못하는 그는 오로지 현재의 순간에 갇힌 채 살고 있었다" 그를 복종시키려 할수록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신성시 여기는 스페렌자 뿐만아니라 그의 마음까지도 서서히 침몰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빈슨 자신이 방드르디의 원시 생활과 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세상의 주축은 로빈슨이 아니라 방드르디로 자연스럽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은 미셸 투르니에가 다니엘 디포의 원작 <로빈슨 크루소>를 개작한 것이다. 미셸 투르니에는 디포의 원작이  지나치게 서구 백인의 기독교 중심적인 사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고, 소설 속 방드르디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로 취급되고 모든 진리는 로빈슨의 입을 통해서만 전달되는 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주체를 변경해서 책 내용을 뒤집게되는데, 책의 제목처럼 방드르디를 주축으로 지금까지 '문명 중심'으로 읽혔던 로빈슨 크루소를 '원시 자연' 중심으로 바꿔 쓰게 된다.
 
하지만 문명과 원시라는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소설 초기엔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폭발'이라는 결정적 계기를 만들어 기존에 이분법으로 나뉘어 있었던 문명과 원시를 완전히 뒤섞어 카오스 상태로 만들어버린다. 로빈슨과 방드르디는 서로 협력하고 의지해 살아가는 평등한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방드르디를 만나기 전까지 로빈슨은 자신이 백인이라는 우월성, 그리고 서구문명과 기독교 사상이 최고라는 생각에 미개인인 방드르디를 억압하고 원시 자연을 자기 중심적으로 통치하려 생각했다. 하지만 방드르디와 원시 자연 생활에 차츰 동화되어 자신의 껍데기 뿐인 우월성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망한 사상들을 버리고, 자연인으로서의 진정한 자유를 느끼게 된다. 인간은 탈구조화된 자연 속에서도 존재의 본질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28년 후 문명 세계에서 온 '화이트버드'호가 구하러 왔을 때 그냥 섬에 남기로 한 그의 선택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화이트버드호에서 온 문명의 사람들의 거친 행동, 물질적 욕망에 혐오감을 느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28년 전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문명인이 아닌 것이다. 그는 이미 원시 세계에 그 스스로가 동화되어, 화이트버드호의 입장에는 그 또한 방드르디와 다를 바 없는 원시인인 것이다.
 
난 이 소설의 결말이 왠지 마음에 들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이런 결말이 오길 어렴풋이 예상했는지 모른다. 문명과 동떨어진 무인도에서의 생활이 끔찍하다 생각했지만(물론 그 마음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인간은 어쨌거나 환경에 순응해가며 살아가게 마련인가보다. 방드르디 앞에선 종교와 문화도 결코 우월한 것이 되지 못했다.  인간들의 소위 문명이라 말하는 한낱 형식과 틀이란 것이 위대한 자연 앞에서는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지 깨닫게 된다. 형식과 위선을 거스르며 자연에 순응하는 삶... 어쩌면 이것이 미셸 투르니에가 말하는 철학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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