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체 시장 - 생명공학시대 인체조직의 상품화를 파헤친다
로리 앤드루스.도로시 넬킨 지음, 김명진.김병수 옮김 / 궁리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끔찍해 보이는 표지가 인상적이다.

 

BODY BAZZAR

"나는 한때 인간이었으나 지금은 바코드가 찍힌 생명공학시대의 신상품이 되었다"

 

과학과 의학의 발전은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고, 건강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해 주었지만, 모순적이게도 인간의 근본적인 존엄성 측면에서 그 가치가 점점 추락하고 있는 것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현재 가장 급부상하고 있는 생명공학...
우리에게 무지개빛 미래를 선사할 혁신의 학문인가, 아님 인체를 한낱 세포와 DNA를 가진 살덩어리로 그 가치를 추락시키고 있는 비운의 학문인가....
과학의 발전과 사회, 문화적인 측면의 충돌은 불가피해 보이지만, 이쯤에서 다시 신중하게 검토해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봤던 <마이시스터즈키퍼>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난치성 백혈병을 앓고 있는 딸아이를 위해 부모는 딸아이의 치료에 적합한 유전적 맞춤 아이를 한명 더 낳기로 한다. 그렇게 태어난 주인공은 태어난 이후로 제대혈, 백혈구, 줄기세포, 골수 등 자신의 몸의 모든 것을 언니를 위해 내어주게 된다. 병에 걸린 아이의 생명도 소중하지만, 유전적 맞춤으로 태어나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신체의 일부를 채취당하는 주인공의 인권은 어디에서 구해야 하는가?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존엄성 사이에 빠진 딜레마를 잘 보여주는 이 영화 한편으로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과학과 의학이 함께 발달함에 따라 현대 사회에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는 분야는 인체를 연구하는 생명공학이다. 신체 일부에서부터 세포, DNA까지 분석이 가능하게 되었고, 그렇게 분석된 신체의 일부는 상업적 목적으로 하나의 '상품' 가치를 가지는 세상이 되었다. 과학의 발달은 인간의 신체와 생활을 편리하게 만들었지만, 인간의 가치와 생명의 존엄성 문제에서는 점점 퇴보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강제로 장기가 탈취되어 살해된 사람들을 이야기, 난자 채취에 대한 윤리적인 문제, 백혈병 치료를 받고자 한 남자는 혈액 뿐만아니라 골수, 피부, 정액 샘플등을 채취 당하고, 실제 치료와 관계없는 각종 검사를 받아왔다는 이야기 등은 전에 뉴스에서 들어봤다. 또 지네틱스사의 연구와 같이 아이슬란드 국민 전체의 유전자가 연구목적으로 이용된 사례도 있었다. 내가 헌혈한 혈액이 어느 제약회사의 연구에 도용될지도 모르며, 병원에서 검사받는 내용들이 나의 치료목적 이외에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이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혹은 스스로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연구대상이 될 가능성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생명공학 회사들은  피부, 혈액, 태반, 생식 세포 등 신체 조직을 추출하여 앞으로 경제적 이익을 낳을 엄청난 잠재력을 지닌 상품으로 변형시키고 있다. 뇌막은 피부이식에 쓰이는 약물로, 허벅지 근육의 얇은 막은 복원 수술용으로 팔린단다. 신체의 일부가 이용되는 예는 수없이 많다. 인체는 프로젝트란 명목으로 다양하게 연구되고 상품화되며, 이를 둘러싼 특허문제도 엄청난 건수에 달한다. 생명공학시대에 몸은 가치있는 특허와 시장에 내다팔 수 있는 상품, 그리고 유용한 정보의 잠재적 원천이 되었다.

 

또한 인체는 인간의 호기심을 충족하고, 표현하는 수단으로 인정 받아 뼈나 장기, 뇌 등이 그대로 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하며, 일부 예술가는 혈액, 머리카락, DNA 등으로 작품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생명공학의 발달과 함께 사람의 몸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인격을 대변하고 있다. 쓰레기로 버려질 머리카락, 혈액, 침과 같은 부분들도 DNA 검사에 노출되면 개인의 신상정보 뿐만아니라 앞날의 성향까지도 예견할 수 있는 세상이다.

 

문제는 이런 과학기술의 발달이 현대의 자본주의 시장경제와 만나, 인간의 가치를 한낱 상품으로 격하시키고 있고, 오용되거나 잘못 해석된 정보로 개인의 사생활에 치명적으로 상처를 입힐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의 궁극적으로 하고자하는 이야기도 바로 이것이다. 생명공학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경제적으로 악이용하려는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따라서 신체를 이용한 행위들이 과연 어디까지 용인해야 하며, 인간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과학의 발달과 함께 윤리적, 도덕적, 종교적, 문화적 측면에서의 충돌은 늘 제기되어왔던 것이며,  법적으로 아니면 제도적 장치로서의 제제할 방법이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적인 문제이다. 물론 제제할 방법이란 것도 과학적 관점에서 보면 부당한 것일 수 있다. 이것이 현대 사회가 직면한 딜레마인 것이다.

 

내가 이 책에서 조금 아쉬운 부분은 저자 두명 모두가 생명공학도가 아닌 법대와 사회학 교수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러 다양한 논점들을 사회적인 측면에서 서술한 경향이 많다. 물론 그들의 말은 모두 옳다. 하지만 한 문제에 있어 다양한 관점의 서술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내 리뷰 또한 책 내용을 충실히 반영하다 보니 생명공학의 부정적 측면이 다소 강조된 것 같긴 한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사실은 생명공학은 인간만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면 인류의 복지와 발전을 위해 더 없이 유용한 학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아 ..어쨌든 이 분야는 파고들면 들수록 더욱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내 리뷰 또한 오락가락 갈피를 못잡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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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간 화학자 - 과학의 프리즘으로 미술을 보다
전창림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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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의 입장에서 과학, 특히 화학의 눈으로 미술을 보다'라는 것은 화학을 공부하였고, 미술에 관심이 많은 나로선 굉장히 흥미를 끄는 요소였다. 기존의 몇 가지 미술 교양서를 읽긴 했지만 화학이라는 관점에서 쓰여진 책은 단 한권도 읽어보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 책의 저자는 나의 대선배님이시다. 어떤 식으로 미술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가실지 굉장히 궁금하고 기대되었다.
  

기존 미술 교양서와 마찬가지로 화가의 일대기와 그들의 유명한 작품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이 책에서는 미술 재료와 화학 반응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에이크가 식물성 불포화지방산 아마인유를 이용하여 유화기법을 처음 완성한 것에서부터 명화가 오랜세월을 지나오면서 탈색되고 변색될 수 밖에 없는 이유에 대한 화학적 근거를 든다.

 

다 빈치의 유명한 <최후의 만찬>이 심한 박락이 일어나고 색체가 떨어져나간 것은 물감을 잘못 혼합하여 화학반응이 일어난 결과이다. 인체, 동물, 식물을 포함해서 기계공학, 건축학, 기하학 등에 박식하여 과학자들에게 가장 친근한 다 빈치가 정작 화학 분야에 문외한이었다는 내용이 흥미로왔다. 램브란트의 유명한 <야경>은 원래 제목이 야경이 아니었지만 그림 전체가 어둡게 변하여 현재와 같은 제목이 붙은 것이다. 그림이 어둡게 변한 데에는 세월의 흐름에 따른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지만 납을 포함한 안료과 황과 만나 검게 변색된 것이다. 밀레의 <만종 >역시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밝은 느낌이었을 것이라 추측되지만 산업혁명 당시 급격히 늘어난 아황산가스의 영향으로 그림 전체가 어둡게 변색된 것이다. 휘슬러는 흰색을 즐겨 사용하여 <흰 옷을 입은 여인> <흰색 교향곡> 등 순결하고 아름다운 작품들을 여럿 남겼지만 연백의 주성분인 납성분으로 인한 납중독으로 자신의 생명까지 빼앗겼다.

 

이런 이야기 외에 스팩트럼 과학을 이끌어낸 인상주의 작품과 포스터컬러의 기원 등 다양한 화가와 작품, 그리고 화풍과 구도에 대한 이야기까지 여러가지가 설명되어 있다. 그림을 감상하는 데 있어, 어떤 재료와 구도로 그려졌으며, 어떤 반응의 결과 오랜세월 후 변화되었다는 것을 알고 보는 것도 유익한 일인 듯 싶다. 하지만 내가 이 책을 통해 인상깊게 생각했었던 것은 재료의 화학 반응이나 과학적 구도의 특이성 같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냥 과학을 향한, 아님 과학 자체를 보여주는 그림들이 더 매력적이었다. 다비드의 <라부아지에 부부의 초상> 이라든가 라이트의 <에어 펌프 실험> 끔찍해 보이지만 램브란트의 <해부학 강의> 같은 작품들은 기존 미술책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것이어서 한참 동안을 들여다봤다.

 

이 책은 과학과 예술의 접목이라는 시도로 그 내용면에 있어서는 상당히 주목할만하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가 조금 산만했고, 미술과 화학이라는 것은 그 재료면에서 무엇보다 꽤 연관성이 있다고 인정하지만, 그 내용만으로 이 책 전체를 구성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듯 싶다. 약간의 내용을 제외하곤 일반 미술 에세이에 나와있는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차라리 과학과 관련된 여러 유화 작품들을 실어줬으면 개인적인 입장으로선 더 즐거웠을 것 같다. 작품이 그 시대상을 반영하는 만큼 과거의 어떤 실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꽤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부분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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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밑에 사는 여자
마쿠스 오르츠 지음, 김요한 옮김 / 살림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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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화요일마다 침대 밑에 들어가 산다고??

 

오 ~ 이거 제목만으로도  굉장한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당장에 이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책속의 주인공 린에 비하면 나의 호기심 정도는 새발에 피였다. 그녀는 호탤 객실에 투숙한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침대 밑에서 관찰하고 있었다.
’이 여자 제정신이야?’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남을 훔쳐본다’는 호기심의 매력은 나를 비껴가지 못했다.
그녀의 행동은 아직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그녀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린은 삼십대 중반의 혼자사는 여자로, 끊임없이 뭔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다. 그녀는 청소에 강박증이 느껴질 정도로 집착한다. 예민한 성격으로 병원치료도 오랫동안 받아왔고, 지금도 일주일에 한번씩 의사를 찾아가지만 큰 차도는 없는 것 같다. 그녀는

 

린은 대부분의 시간을 호텔 객실에서 보냈다. 손님들이 두고 나간 물건들을 만지고, 뒤져보면서 그 물건 주인에 대해 상상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외로운 그녀의 생활과  답답한 일상에서의 짜릿한 자극이 되었다. 그녀는 더욱 대담해져서 객실 침대 밑에 들어가 객실에 투숙한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이른다.

 

낮에는 타인을 물건을 훔쳐보고, 밤이면 침대 밑으로 숨어들어가는 린을 난 아직도 이해하지 못한다. 정상적인 사고 범위 내에선 그저 ’정신병자’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단순히 한 여자의 호기심과 관음증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타인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의 일면을 이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타인에 대한 호기심’은 보통 사람 누구라도 쉽게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대에 대해 갖는 관심만큼 진정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설 수 있는 방법을 쉽게 외면해버리는 것 같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현대인들은 타인에게 쉽게 자신의 진심을 내보이지 않을 뿐더러 상대의 진심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각자의 이론과 편견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평가해버리고, 관계를 결정해버리는 것이다. 바쁘고 빠르게 진행되는 현대인들의 생활 속에 인간관계도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물은,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하지만 우리에게 사물의 절반은 항상 숨겨져 있어. 병에 든 생수, 연필, 램프, 그 모든 걸 우리는 절반밖에 보지 못해. 단지 옆에서, 혹은 위에서. 절대로 완벽하게 보지 못해, 절대로 전체를 보지 못해. 진짜 모습. 사물의 완전한 모습은 어둠 속에 있어. 우리 모두는 시야가 제한된 존재야. 물을 마시려고 물병을 잡으면, 물병의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아? 그저 뒷면이 있다는 걸 상상할 뿐이지. 그 뒷면을 머릿속에 그려보는 거야. 뒷면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물을 마시는 거야. 그래서 우린 분명이 뒷면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물을 마셔. 더도 덜도 아니고. <p.111>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겉으로 보이는 부분이 다가 아닐 수 있다. 진정한 진실과 본질은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우린 그 본질을 쉽게 간과하고 표면적으로만 사람들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본다.

 

린이 원했던 것은 누군가가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자신을 받아들여주길 바랬던 것이다. 자신이 관찰하는 타인과 삶을 공유할 수 없는 자신의 현실을 안타까와했고, 항상 상상 속에서만 이룰 수 있었던 타인과의 소통을 기대했던 것이었다T-FAMILY: 1153573_9"> 친구도 없고, 어울리는 이웃도 없다. 하인츠라는 만나는 남자가 있지만 사실상 오래 전에 관계가 끝나버린 시큰둥한 사이이고, 엄마가 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살아 일주일에 한번씩 통화만 한다. 그러던 어느날 호텔 청소하는 일을 얻었다. 그녀에게 딱 어울리는 직업이다. 그녀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곳까지 세심하게 뒤집어서 닦고 문지르고 털었다. 시간 외 근무까지 하면서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 일들을 계속 했다. 청소를 하는 것만이 그녀의 존재감을 살아있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난 원한다. 누군가가 내 침대 밑으로 들어오길. 난 원한거다, 단 한번만이라도 누군가 내 삶에 귀를 기울여주길. <p.129>

 

타인이 먼저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너무 이기적인 것이 아닐까? 누군가 알아서 먼저 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앞서, 자신이 진정한 마음을 열고 상대에게 다가설 용기는 없었던 걸까?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치는 바쁜 생활 속에서도 현대인들이 종종 느끼는 고독감은 타인의 문제가 아닌 바로 자신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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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닝 포인트 10 -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거대한 사건
심현정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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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몇년 전 봤던 영화 <나비효과>에서는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어떤 일들에 휘말리게 된다. 그 사건의 결말 여부에 따라 현재의 모든 상황들이 완전히 변하게 된다. 과거의 사소한 일 한가지라도 모두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꽤 흥미있게 본 영화인데, 또 이 영화의 매력 포인트는 감독이 결말을 두 가지로 만들어놨다는 것이다. 과거에 주인공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 현재의 달라진 두 가지 모습을 모두 재현해보인 것이다. 이런 이야기들은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겐 꽤 생각해볼 꺼리를 준다. '과거 그때로 다시 한번 돌아간다면 다른 선택을 해을텐데...' 라고 하는 생각을 모두 해봤을 것이다. 내 인생에도 되돌아가고픈 '터닝포인트'가 있다. '음악공부를 멈추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남자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휴학을 하지 않았더라면 ' '그때 그 선배의 책장을 넘겨보지 않았더라면..' 등등...너무 많아서 나열하기도 힘들다. 그 만큼 내 현재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걸까? 난?? ;;

 

한사람의 인간사도 이렇게 우여곡절 이야기가 많은데, 하물며 수천년 인간의 역사 속에 얼마나 일들이 많았겠는가? 저자는 인류의 문화와 역사를 바꾼 거대한 사건 10가지를 소개하고, '그때 다른 결말을 맞았더라면 현대 우리 사회가 어땠을까'라는 재밌는 생각들을 정리했다.  작가가 소개한 10가지 사건들은 살라미스 해전, 십자군 전쟁, 흑사병, 콘스탄티노플 함락, 콜럼버스 대발견, 잉카의 멸망, 프랑스 시민혁명, 트라팔가 해전, 황태자부부 저격 사건, 히틀러 수상 등극이다. 모두 역사적으로 이야깃거리가 많은 흥미로운 소재였지만 내가 가장 관심이 갔던 사건은 살라미스 해전이었다.  

 

살라미스 해전은 BC 480년경 페르시아와 그리스 연합군이 충돌한 전쟁인데, 그리스는 테미스토클레스라는 탁월한 전략가의 활약으로 페르시아를 무찌른다. 이 전쟁의 승리로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화를 주도하며, 오늘날 서양 문명의 모태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만약 해전의 결과가 정반대로 페르시아가 승리했더라면 동방의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발판으로 유럽대륙으로 진출하게 되고, 서방과 동방을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도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동양 중심의 세계관이 일찌감치 성행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현대의 우리나라도 세계 속에서의 위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역사란 대부분 승자의 기록이며, 해석하기에 따라 상황은 많이 달라진다. "진실은 그 사건 당시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 수만큼 존재한다." (이런 유명한 문구를 애니메이션 속에서 누군가 말했던 기억이 난다.ㅋ)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발견이란 것도 그것이 대발견인지 대파괴인지 생각해봐야 한다. 2차세계대전을 일으킨 히틀러 또한 독일인들에겐 그 당시 천재적인 지휘관이었지만, 우리 눈엔 한사람의 광인으로 비춰졌을 뿐이다.  

 

터닝 포인트란 것도 패자의 입장에서 다시 되돌려 쓰고 싶은 역사의 일면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역사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이뤄냈다면. '남북으로 분단되지 않았다면'... 에서부터 '현재 MB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않았더라면....까지...

 

그렇지만 한번 지나친 시간은 되돌아갈 수 없고, 역사 또한 돌이킬 수 없다. 중요한 것은 과거의 역사를 바탕으로 현재 우리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앞으로 미래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역사의 터닝포인트를 이해하는 일은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일이다. 거창하게 역사라는 이야기를 할 것까지도 없을 것 같다. 나의 일상에서 나의 과거의 실수를 반성하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는 삶.... 그것 또한 한시대 역사를 살아가는 내 존재의 의미이자 내 삶의 의미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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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시맨과 레비스트로스 - 최협 교수의 인류학 산책
최협 지음 / 풀빛 / 199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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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는 만국 공용어인가?

키스는 섹스와 마찬가지로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이성에 대한 사랑과 다정함을 표현하는 인간의 본능적인 행위라고 생각했다. 또 그것이 세계 공통의 보통의 인간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애정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 그것은 지구 상에 현대 내가 속해 있는 집단에서만 인정되는 행위임을 알게 된다. 일부 사회에서는 키스라는 행위를 모르며, 특히 아프리카에서는 키스의 관행을 발견할 수가 없다. 재밌는 이야기로 아프리카에 탐험 중인 백인이 현지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져 키스를 했는데, 그 소녀는 비명을 지르며 도망쳐버렸다고 한다. 그 소녀는 키스가 뱀이 먹이를 잡아먹을 때 혀를 낼름거리며 먹이를 축축히 하는 것을 연상했다고 한다. 백인 남자가 자길 잡아먹는 줄 안 것이다. 인류학적 문헌을 보면 백인들과 접촉하기 이전까지 키스의 관습이 없었던 종족이 많으며, 중국에서는 키스가 식인(食人)의 관습을 연상케 한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의 옛날 사람들도 키스를 몰랐을 것 같다. 

 

영어를 잘 못하는 친구가 해외여행을 다녀와서 "그깟 영어 잘 못하면 어때? 만국 공용언어가 있잖아...손짓, 발짓, 표정으로 다 해결되더라구.." 라며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그렇다. 굳이 그 나라 언어를 잘 하지 못하더라도 느낌과 세계화된 문화로 서로 어느 정도는 통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좁은 식견으로 본 그만큼의 좁은 세계에서만 통하는 이야기임을 알았다. 일례로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예'와 '아니오'의 몸짓도 다른 문화권에선 반대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세상은 넓고 나라도 많으며, 각 나라마다 오랫동안 유지해 온 풍습과 문화는 각각 많은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의 잣대로 아님 서구 문화의 보편화된 문명으로 상대의 문화를 평가하거나 잘못 이해하면서 우리는 많은 실수와 편견이 생긴다. 이 책은 인간들의 다양한 문화를 인류학적 관점에서 소개하고 있다.

 

남녀의 성차별과 성적 정체성, 성년의 사회적 의미, 세계 각국의 결혼 문화, 일본의 도시락과 미국의 햄버거의 음식 문화를 통해 인간의 의식구조가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까지....다양한 관점에서 문화를 해석한다.

 

가장 흥미있게 읽은 부분은 <야만에 대한 편견>으로 문명사회의 허위의식을 꼬집는 내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미개'라는 수식어를 붙여 일부 문화를 깍아내리는 편견을 갖는데, 그 '미개'라는 잣대가 어떤 기준에 의한 것인가? 우리가 상대 문화에 비해 우월하다는 근거는 무엇인가?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일례로 야노마뫼족의 여아 살해 관습을 얘기한다. 우리나라의 옛부터 내려온 남아선호사상을 비교하면서 과연 어느 문화가 다른 어느 문화를 비판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꼬집는다. 문화적 상대주의의 관점에서 원시사회를 '야만적' '미개적'이라 부르는 것은 편견이며, 위선이라는 것이다.

 

이 책의 다양한 문화의 이해를 통해 인류학이라는 내겐 생소한 학문에 조금 다가선 것 같아서 기쁘다. 문화와 인류와의 관계에 대한 내력도 이해할 수 있었고, 매우 일부분이긴 하지만 인류학과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레비스트로스란 인물에 대해 알게 되었다. 결국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문화든 각각의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우열성은 가릴 수 없으며,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통해 인간의 역사와 문화를 바르게 이해하고, 그와 더불어 우리 문화 또한 바르게 이해하고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 우리나라 사회에서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되는 것은 외국문화 특히 서구문화나 일본문화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다. 아파트나 상품 이름이 모두 외국어로 바뀌고, 외국 것은 세련되고 품격있는 것으로 생각되는 반면에, 우리 것은 소박하고 조금 격이 떨어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늘어가는 것 같다. 물론 일부 우리 사회의 안좋은 경향이긴 하지만.... 분별과 안목이 필요할 것 같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일 것 같다. 우리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의 것에 호응하고 따라가는 일부 분별없는 사람들과 그것을 조장하는 대중문화가 조금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한다.

앞으로의 문화중심 사회를 위해 우리 문화의 위상을 바로 세울 수 있도록 우리 문화에 대한 바른 이해와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같다. 우선 나부터 문화적 편견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우선 책부터 계속 탐독할 생각이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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