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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ㅣ 산책자 에쎄 시리즈 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어릴 때는 악몽, 성적, 전쟁, 죽음 등에 대한 다소 구체적이고 비교적 단순한 문제에 대한 공포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 사회생활을 하고 여러가지 경험을 하면서, 내가 느끼는 공포는 딱히 꼬집어서 뭐 때문에 불안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넘쳐났다. 가장 큰 불안과 공포는 알 수 없는 나의 미래일에 대한 것이겠지만, 그것은 단순히 내 문제만을 포함한 것이 아니다. 범죄, 고용불안, 경기침체, 주식폭락, 환경재난, 질병, 테러 등의 문제는 한 국가 사회를 넘어 전세계적인 문제로 확장된다. 뉴스나 신문을 보면 온통 그런 기사들로 도배되어 있다. 그런 모든 일들이 나만 피해가란 보장이 있는가?
바우만은 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하고, 불확실하며, 포착이 불가능할 때라고 하였다.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야말고 가장 큰 공포일 것이다. 공포의 본질을 꽤뚫어 볼 수 없기 때문에, 공포를 퇴치하려 한 일들이 더 큰 공포를 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은 테러에 대한 공포 때문에 먼저 선제공격을 쏟아붓는 일들을 저질렀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세계적으로 더 큰 테러의 위협을 야기시켰다. 우리가 세균을 퇴치하기 위해 쏟아부은 강력한 항생제들은 오히려 인간의 면역력을 떨어뜨려 또 다른 질병의 위협에 노출되게 만들었다. 이렇게 공포는 또 다른 공포를 파생시키며, 우린 각종 공포 속에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책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공포의 유형에 대해 새롭게 조명한 책이다. 조금은 심리학적이거나 구체적인 어떤 것을 예상했던 난 다소 난해하고 모호하며, 포괄적인고 거대한(?) 내용이 처음에 쉽게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바우만이 말하는 '유동적 공포'의 유형이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인 문제가 아닌 전세계적인 글로벌 공포로서의 접근과 공포의 근원을 근대사회와 연결하여 파헤친 점들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바우만에 따르면 근대는 인간이 신과 자연과의 유대를 끊고, 인간 스스로 인간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한 세상이라 하였다. 그 통제의 힘은 합리성을 추구하는 '이성'이다. 하지만 그 합리성이 문제의 본질을 꽤뚫는 목적합리성이 아니라 일시적인 해결에 급급한 도구적합리성이 되었기 때문에 근대사회가 유동적이 되었다고 말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공포를 극복하고자 이룬 근대문명의 도구적 이성은 '우회(detour)'라고 표현하였다. 즉, 장애물에 부딪칠 때마다 우회해 온 것이 근대적 발전이었으며, 이러한 유동적 근대와 기술 문명의 이면에 숨어 있는 불확정성과 통제 불능성에서 오는 공포가 바로 유동적 공포(liquid fear)이다. 유동적(liquid)이란 의미는 물처럼 구석구석마다, 틈마다, 흠마다, 스며드는 것이다. 유동적 공포라는 말은 상상을 초월하는 언제 어디서 예고도 없이 터질지도 모르는 가장 무시무시한 공포인 것이다.
바우만은 현대인들의 공포를 구체적으로 죽음, 악, 통제불가능한 것, 글로벌, 유동적 이란 것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악과의 공포라는 부분으로,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에서 오는 불안과 공포를 조명하고 있었다. 상대에 대해 의심을 품고 혹시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불안한 현대인들..그런 이유로 더 넓은 친구과 동지관계의 네트웤 형성에 급급해진다. 휴대폰의 주소 속에 갈수록 더 많은 네트웤을 구축해 나가고,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들이 그러하다. 어쩌면 온라인에서의 이 블로그 습관도 인간관계의 불안 속에서 하나의 안정을 찾고 싶은 대비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우리의 질적인 결핍을 양적으로 보충하려는 현대인들의 행태를 비판한다.
부의 불균형과 불평등도 사회적 공포를 가중시키는 주요 요인이며, TV나 영화를 통해 보여지는 살인이나 범죄에 대한 감각이 점점 무력해지는 세태도 꼬집는다. 서브프라임, 멜라민, 광우병, SARS 등은 통제 불가능 속에 세계화란 이름으로 전세계적으로 퍼져 나가는 글로벌 공포에 대한 부분도 꽤 흥미롭다. (공포를 흥미롭게 읽었다는 뉘앙스가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꽤 관심을 끄는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공포의 대안은??
바우만은 이 부분에선 조금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솔직히 공포란 자체가 대안이 없음으로 인해 오는 불안감이 가장 큰 공포일 것이다. 대안이 있다면 공포가 야기되는 우려도 줄어들 것이다. 바우만은 공포를 직시하고 문제의 본질을 꽤뚫어 볼 수 있는 '지식인'의 역할에 주목한다. 하지만 단순히 지식인으로서만은 해결이 어렵고 지식인과 민중이 재결합해야하며, 전지구적인 해결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동하는 공포... 솔직히 내게 읽기 쉬운 책은 아니었다. 밑줄을 하도 많이 그었더니 책이 너덜너덜해졌다.
바우먼..이 사람 같은 말을 왜이렇게 어렵게 쓰는지...내가 이 책을 다시 재번역한다면 쉽게 고치고 싶은 문장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ㅎㅎ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을까? 라는 공포가 이 책을 읽는 동안 내가 느낀 가장 큰 공포였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현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읽어 볼만한 책이다. '공포' 그것은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것이기에..그것의 본질을 한번쯤 이렇게 정리해 둘 필요는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