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얼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작가의 얼굴 - 어느 늙은 비평가의 문학 이야기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 지음, 김지선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난 9월, 독일에서 안타까운 소식이 들려왔다. '문학의 교황'이라 불리는 평론가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가 향년 93세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이었다. 그의 저서 <작가의 얼굴>이 우리나라에서 재출간된 지 약 한 달만의 일이었다. 사실 나는 이 책을 만나기 전까지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에 받아든 이 책은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독일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고, TV 프로그램 <문학 4중주>를 통해서 일반 시청자들을 고전 독자로 만들 수 있을 만큼의 영향력을 지녔다는 사람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니. 게다가 이 책에 소개된 40명의 작가 중 이름조차 낯선 사람이 거의 절반에 가까운 것을 깨닫고 조금 충격이었다. 나의 독서력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제 나는 그의 이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라는 위대한 평론가와 세계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작가를 스무 명 가까이 새로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작가의 얼굴>에 실린 작가들의 초상화는 하나같이 개성이 넘친다. 마치 시사만화처럼 다소 익살맞아 보이는 로레다노의 그림들은 특히 눈길을 끈다. 화풍 때문이라고 해도 같은 작가가 그린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 보이는 것을 보면, 역시 그림이란 그리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에 실린 수십장의 초상화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툴리오 페리콜리가 그린 막스 프리슈의 초상화이다. 인자한 할아버지 같은 인상 속에서도 작가로서의 고집 같은 것이 느껴지는 이 그림을 보고 있자면 라이히라니츠키가 페리콜리에게 "재치와 풍자만이 아니라, 존경과 연민까지도 담아낼 줄 아는 화가"라는 찬사를 보낸 이유를 알 것 같다. 



문학을 사랑한 사람답게 라이히라니츠키는 글 속에 작가들에 대한 애정을 가감없이 담는다. 하지만 그는 '좋은 게 좋다'는 두루뭉술한 표현 따위는 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그는 진짜 스타 평론가가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라이히라니츠키가 신보다도 믿는다는 셰익스피어와 괴테에 대해서는 각각 "역사 이래 가장 뛰어난 작가"와 "유럽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표현했지만 하인리히 만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그의 책을 좋아한 적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을 "반편의 폴란드인, 반편의 독일인, 그리고 온전한 유대인"이라고 말했던 라이히라니츠키는 유대인 작가들에 대해서는 감정을 더 많이 드러낸다. 그는 구스타프 말러를 "도달 불가능한 것을 동경하고 갈망하다가 최고조에 이르러 좌절한" 작가로, 알프레트 되블린은 "바보라서, 측은히 여겨질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요제프 로트는 "고향을 찾아 헤맨 동구의 유대인"으로 표현했다. 유대인들은 세계 곳곳에서 부자와 천재의 상징이 될 정도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음에도 여전히 '약속의 땅'을 찾아 헤매는 실향민이다. 그런 동포에 대한 연민과 애정을 라이히라니츠키는 굳이 숨기지 않는다. 하지만 "지독한 유대인 혐오주의자"인 리하르트 바그너를, 그를 감동시킨 <트리스탄>이나 <명가수>를 썼다는 점에 있어서만은 인정하는 객관성도 지니고 있어 존경스러울 따름이다. 


무엇보다 대단한 것은 라이히라니츠키의 글솜씨이다. 평론가이니 글을 잘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만 그의 놀라운 표현력과 비유는 책 여기저기에 지뢰처럼 도사리고 있다가 독자의 입에서 감탄을 끌어낸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말이다. 

토마스는 시민이면서 귀족이었고, 하인리히는 구제불능의 보헤이만이면서 준엄한 예술가였다.(164쪽)

그는 위트를 갖춘 설교자였고, 유머를 아는 세계 변혁가였으며, 풍자를 구사하는 정의의 사도였다.(67쪽) 

읽을 때는 무척 쉬워 보이지만 아마 글을 써본 사람들은 이런 문장을 써내는 것은 녹록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작가의 얼굴>은 에세이라기보다 라이히라니츠키의 사진 일기 같다. 읽고 나면 왠지 라이히라니츠키의 삶의 단편들을 엿본 느낌이 들어 그가 무척 친근하게 느껴진다. '누군가가 읽은 책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말이 아닐까 싶다. 게다가 그는 책이 삶이고 삶이 책인 듯 너무나 자연스럽게 책을 말하고, 인용하고, 권한다. 그래서 어려운 작가론과 어려운 책들이 가득한데도 가벼운 수필을 읽듯 편안하게 읽힌다. 그가 소개한 작가와 작품이 궁금해서 자꾸만 기웃거리게 된다. 어려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재능이 아니고, 쉬운 글을 어렵게 쓰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어려운 글을 쉽게 쓰는 것이야말로 진정 글쓰는 재주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라이히라니츠키는 최고의 작가다. 


작가 지그프리트 렌츠와 "너무 가까웠기에, 평론에 필수적인 '거리'를 확보하기 힘들"어지자 그의 작품에 대한 비평을 자제한 것에서 평론가로서의 단단한 신념도 느껴진다. 그는 "평론가의 첫째 의무는 정직함"이라 했고, "명료함은 예의"라고 했다. 나는 읽은 책에 대한 리뷰를 쓸 때 '내가 책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할 자격은 없다'는 생각과 누군가 반박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언제나 모호한 태도를 견지해 왔다. 비록 평론가도 전문가도 아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리뷰어로서의 내 태도는 책에 대한 예의도 독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라이히라니츠키라는 평론가를 이제서야 알게 된 것이 정말 많이 아쉽다. 하지만 다행인 것은 그가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영화 <러시안 소설>에서 김기진 작가가 한 대사처럼 '말은 뱉으면 사라지지만 글은 남으니까'. 앞으로 그의 글을 좀 더 찾아서 읽어봐야겠다. 아,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 한 가지. "살아 있는 한 최종 결말이 어찌 날지" 모른다던 귄터 그라스와의 악연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 답은 이제 귄터 그라스만이 알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꼼쥐 2013-11-02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리뷰로 선정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

마법고냥이 2013-11-02 23:05   좋아요 0 | URL
정말 감사합니다^^ 처음이라 얼떨떨하네요~

남희돌이 2013-11-02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수 리뷰 선정 축하합니다.

마법고냥이 2013-11-03 00: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