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 집, 여성 - 여성 고딕 작가 작품선
엘리자베스 개스켈 외 지음,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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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집, 여성

여성 고딕 작가 작품선 | 엘리자베스 개스켈, 버넌 리, 루이자 메일 올컷, 메리 셸리 | 장용준 옮김 | 고딕서가

여성들의 공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각기 다른 매력을 지닌 네명의 작가가 [공포, 집, 여성]이라는 타이틀로 한 곳에 뭉쳤다. 개스켈은 [회색여인]을 통해서, 버넌 리는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버], 소설 [작은 아씨들]로 잘 알려진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은 [비밀의 열쇠], 그리고 [프랑켄슈타인]으로 알려진 작가인 메리 셸리는 단편인 [변신]을 통해 색다른 고딕소설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 주었다.

흔히들 이 당시에는 여성을 흡사 열등한 자 취급을 하면서 남성보다 한 등급 낮은 존재로 취급했다고 한다. 여성들이 글을 쓰는 것도 가명 뒤에 숨어서 몰래 써야했으니 말이다. 유명한 제인 오스틴 역시 거실 한켠에 놓인 작은 탁상에서 글을 썼다고 한다. 이유는 다른 사람이 들어오는 종소리가 울리면 재빨리 쓰던 것을 감춰야했으므로 말이다. 소설가 메리 셸리 또한 그녀의 유명한 책 [프랑켄슈타인]을 가명으로, 즉 남성의 이름으로 발표해야했고 말이다.

첫번째 단편인 [회색여인]은 여성의 공포가 얼마나 극단으로 치닫을 수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잘못된 결혼의 끔찍한 결말, 그리고 그것을 추격하는 한 남자의 잔인한 복수극...흡사 요즘 뉴스판을 달구는 일명 스토킹 보복을 방불케한다. 여성의 잘못이 아님에도 여성이 죄인 취급받고, 결국 그 여성은 그 속에 갇혀서 헤어나질 못한다. 얼굴빛 마저 회색으로 변한 불행한 여인이다.

두번째 단편은 다소 이름이 길다. [오키 오브 오키허스트, 팬텀 러버]... 다른 제목으로도 알려져있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광기어린 한 남성의 집착이 부른 잔인함이랄까... 과연 러브록은 실재하는가? 부부라는 자들이 한 남성을 끔찍히 살해하고, 그 살해된 남성 러브록에 대해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이 부부는 스스로의 죄 값을 살면서 치룬 것같다. 평생을 그 공포 속에서 살아야했으니 말이다. 심지어 유령을 보면서 까지 말이다. 아니, 그 유령이 실재하는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말이다.

세번째 단편인 [비밀의 열쇠]는 [작은 아씨들]의 작가 루이자 메이 올컷의 작품이다. 작품을 읽어나가면서도 그녀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소설의 결이 다르지만 정체불명의 남성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다시 나타나는 장면은 지금 이 시대에 스릴러 영화로 만들어도 될 만큼 소재가 특출했다는 느낌이 든다.

마지막 소설 [변신]은 다소 악마와의 거래라는 측면에서 색다른 공포 신화를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인간의 공포를 먹고 사는 많은 정체불명의 것들이 있다. 서양에서는 웬디고, 동양에서는 장산범 등 등 (아이들이 좋아하는 만화인 신비아파트를 보면 세상 그렇게 많은 귀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악마와의 거래를 통해서 더 나아지는 삶은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항상 그들의 승리다. 결코 인간은 악마를 이길 수 없다. 그들과 타협하거나 거래한다면 결국엔 먹히는 법이다. 악마를 상대하는 가장 현명한 법은 예수님이 가르쳐주셨다는 생각이 든다. 그가 광야에서 했던 일이 바로 그러한 것 아니던가? 결코 굴복하지 않는 것, 결코 꼬임에 넘어가지 않는 것 말이다. 인간은 항상 욕심에서 넘어진다. 그리고 악마는 기가막히게 그것을 공략한다. 욕심없는 인간이여, 복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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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자 - 키르케고르 평전
클레어 칼라일 지음, 임규정 옮김 / 사월의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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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철학자

키르케고르 평전 | 크레어 칼라일 | 임규정 옮김 | 사월의 책

모든 것에서 실패한 이는 과연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과연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인간이라는 것 그 자체의 의미란 무엇일까? 오래 전에 이 세상에서 머물렀고, 지금은 가고 없는 그 존재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왜 살아가는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하고 말이다.

지금 세상은 누구보다 정신적인 문제로 고통받는 자들이 많은 세상이다. 일명 절망에 빠진 자들이 그득하다고나 할까? 아마 키르케고르가 지금 현 시대에 존재했다면 기겁할 일이다. 왜냐면 지금의 절망에 빠진 사람들은 그 절망 자체에서 헤어나오려는 노력 그 자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절망 속에 허우적 댈 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절망하는 것에 그치지않고 다른 남들까지 그 구덩이 속으로 끌어들인다. 자, 같이 절망하자. 이 시대인들아. 우리 이 희망없는 시대에 절망으로 축복하자구나...하면서 독배를 들이킨다.

키르케고르는 누구보다 인생의 실패자였다. 그는 아들로서, 학생으로서, 그리고 연인으로서 모두 낙제자였다. 그런 그가 그런 경험들을 스스로의 안으로 돌렸다. 외부에서 문제를 찾는 대신 스스로 안으로, 안으로 깊이 파고들어갔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이 바로 신 앞에 선 단독자... 과연 우리 모두는 왜 존재해야하는가? 왜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 신이란 누구인가? 그는 말한다. 하나님은 결코 꼬드기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스스로를 믿어주길 바라지를 않는다. 하나님은 결코 악마처럼 속삭이지 않는다. 키르케고르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분은 오직 신뿐이었고, 그것은 그 당시 기독교와는 달랐다. 그는 타락한 종교에서 희망을 찾지 않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진실로 투명해지길 바랬다. 누구에게? 바로 스스로에게 말이다.

얼마전 [안나]라는 드라마를 보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나온 주인공이 하는 말이 있다. 인간이란 혼자보는 일기장에도 거짓말을 쓰는 존재라고 말이다. 인간은 스스로 조차 속이는 유일한 동물이다. 그것도 너무 유능하게 말이다. 우리는 왜 그것을 하는가? 우리는 왜 그것을 갖고 싶은가? 우리는 왜 성공해야하는가? 우리는 왜 .... 우리는 왜.... 정확히 사실을 알고 직면해야한다. 남들을 따라 살아서는 그것은 자신의 인생이 결코 될 수 없다. 어쩌면 나를 아는 것이 나를 살리는 일일 지도 모른다. 그것이 바로 유일한 나라는 존! 재! 라는 것이니까.

키르케고르의 소설같은 평전을 읽으면서 가독성이 너무 좋아서도 있겠지만 그 인물 자체에 대해서 호기심이 생겼다. 과연 어떤 인간인가? 키르케고르가 영감을 준 철학자는 너무나도 많다. 비트겐슈타인, 하이데거, 릴케, 카뮈, 사르트르...등 등 말이다. 절망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절망에 빠져있어서는 안된다. 끊임없이 돌을 밀어올리는 삶이야말로 그 자체가 바로 인간의 삶이니까 말이다. 돌을 절망으로 치유한다면 말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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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문학상 수상작품집 2022 - 제 꿈 꾸세요
김멜라 외 지음 / 생각정거장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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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 2022

김멜라, 김지연, 백수린, 위수정 외 | 생각정거장

해마다 매월 이 시기만 되면 기다려지는 책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 현대작가들의 위상을 알 수 있고, 그들의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이효석 문학상... 이 뿐만 아니라 수많은 문학상들이 존재할테지만 왜 이 이름만 유독 기억에 남을까...... . 얼마전 이름있는 어떤 문학상의 그 이름값이 실추된 사건이 있었다.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정확한 전후 사정은 알지 못하지만 아마 작가들과 출판사들 그리고 문학상이라는 뒷편에 있는 어떤 고질적인 병폐가 드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이번 2022년 수상작품집에서 제일 관심있었던 작품은 아무래도 김멜라 작가의 [제 꿈 꾸세요]이다. 제목에서 연상하듯 말랑말랑한 로맨스가 아님은 첫 장만 읽어봐도 알 수 있다. 총체적인 모든 문제를 문제처럼 보이지 않게 교묘하게 포장하는 기술이 있는 작가이다. 청년실업문제, 자살 등 등의 의도했든지, 그렇지 않든지 글 속에 내포되어 있으니 말이다.

사실 나도 김멜라 작가처럼 학교 수업시간에 배운 것들이 유독 궁금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질문하지 않았다는 것... 질문하는 것을 교육하지도 않고,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았던 학교 분위기때문이었을까? 궁금한 것이 생겨도 머릿 속에서 하릴없이 공상만을 일삼을 뿐이었다. 메기~~ 이야기가 나와서 나도 생각이 났다. 나도 그 당시에 메기를 왜 그리워하는지 몰랐다. 내게 메기는 그냥 생선의 일종이었을 뿐이니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그것이 사람 이름이었음을 알게 됐지만 말이다. 그 외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대표적은 예로 어릴 적에 무작정 외웠던 구구단이다. 그 당시에 왜 구구단을 외워야하는지, 그리고 구구단의 원리를 설명해주는 어른은 없었다. 그냥 무작정 뭐하면 뭐...하는 식으로 튀어나와야했으니까 말이다. 다소 수학적인 머리가 없었던 나는 구구단도 무척이나 어렵게해서 외웠던 기억이 있다.

좋은 추억은 과연 가능한 일일까... 만일 내 꿈 속에서 어떤 자살한 이가 나와서 좋은 기억을 선물하고 떠난다면? 그 자살이 의도치않은 사고사였겠지만 아마 유서 등을 미뤄서 자살임을 짐작할테니 좀 억울할 터이지만 말이다. 예전부터 이런 말이 있다. 끝이 좋아야 좋은 거라고, 일명 유정의 미... 유독 이 유정의 미가 어려워지는 시점이 다니고 있던 직장을 그만 둘때나, 연인간의 이별이다. 그 두 가지에서 확실히 유정의 미를 거둔다면 모든 이에게 있어서 좋은 기억을 선사하는 것이 가능할 터이다. 하지만 왜 모든 이에게 좋은 사람이어야하는가... 세상에 그런 룰은 없다. 그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의 기억에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나의 마음만을 충분히 전하는 것...그것으로 족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그럴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제 꿈 꾸세요. 나도 당신 꿈 꿀께요. ㅎㅎ 무엇보다 서로가 꾸는 꿈이 복꿈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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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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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종이우산을 쓰고 가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 신유희 옮김 | 소담출판사

갖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사람도, 이곳엔 이제 하나도 없어

에쿠니 가오리하면 항상 청량함이나 가벼운 풍선같은 문체가 먼저 떠올려지지만 이번 소설을 그렇지만은 않았다. 물론 그녀의 문체가 변했다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녀는 세월을 먹지않고 그대로 존재하는 듯 문장은 맑았고, 청초했다. 그러나 소설 속 전체의 스토리와 인물들의 감정묘사 등은 확실히 진득해지고 걸쭉해졌다. 그리고 소설에서 어떤 죽음 이야기를 계속 해나가는 것도 아마 그런 느낌을 더 가중시켰으리라...

소설 속에는 여러 인물들이 나온다.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온 모든 이들... 어느 날 여든 살이 넘은 세 명의 남녀가 엽총 자살이라는 방법으로 생을 달리한다. 그들과 관계된 모든 이들의 이야기... 남겨진 사람들의 이야기에 소설은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아들, 딸, 손녀, 동료들, 직원들, 제자 등 등 서로가 서로를 기억하는 것... 서로가 고인들의 인생을 기억하는 방법, 어쩔 수 없는 슬픔과 원통함, 모든 온갖 감정들이 이 속에 녹아있다. 그럼에도 살아가야한다는 것...저마다의 인생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미도리는 생각한다.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죽음이란 어쩌면 탄생처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라는 것... 아무리 가깝고 절친한 사이라도 사람 내면의 깊이 존재하는 무엇은 결코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차피 일어난 일이고, 감당해야할 사건이다.

얼마전에 성인이 되어 보호시설에서 얼마 간의 자금을 받고 나간 대학생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 학생의 유서같은 메모장에는 이런 글이 있다고 한다. 아직 읽고 싶은 책이 너무 많은데...... . 막막해지는 문장이다. 청춘의 시대를 뒤로 하고 이 세상을 떠날 결심을 한 학생의 미련은 얼마나 큰 것일까? 아직 하고 싶은 것, 해야할 것, 먹고싶은 것, 가고 싶은 것 등 등이 많은 것...

소설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갖고 싶은 것도 없고, 가고 싶은 것도 없다고.... 아무 것도 없는 무... 어쩌면 생의 원동력이란 욕망에서 오는 것일지도 모른다. 죽더라도 떡볶이가 먹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사소한 욕망과 욕구가 그를, 그녀를, 우리를 살게한다. 각자의 욕망을 다스리고 사는 삶은 얼마나 중요한가... 그 욕망이 커지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아예 욕망이 사그라지는 것도 경계해야한다. 사람이란 때론 단순한 어떤 것, 사소한 어떤 것 때문에 살고, 또 죽는다.

하루 하루 세월이 무척 빠르다. 어떤 날은 하루가 일년처럼 흘러가기도 하지만 어차피 그 시간도 다 지나니...지나는 시간을 반추하면 흐르는 시간 속에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내가 보인다. 흡사 빠른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는 것같다. 손잡이를 잡아야하는데,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대로 시간은 통과하고 통과한다. 결코 멈춤 버튼을 누를 수 없는 삶이다. 어차피 우리는 곧 새해를 맞을 것이고, 소설 속 한 대목처럼 '아직 얼마 동안은 이 세상을 살아가리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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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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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초 후에 죽는다

사카키바야시 메이 단편 연작소설 | 이연승 옮김 | 블루홀 6

시간 쪼개기의 기술이 있는 사람은 분 단위로 시간을 쪼개어서 산다고한다. 매 순간을 알차게 보내려는 그들만의 노력이다. 그리고 시간을 아끼려는 사람은 버스나 대중교통 역시 꺼리고 스스로 운전을 해서 목적지까지 가는 것 보다는 택시를 애용한다고 하니 그들의 머리 속에는 시간은 곧 돈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는 듯하다. 물론 이것이 표준이 아닐 것이다. 시간을 아낀다고 대중교통 대신 자가운전을 하다가 도로 사정으로 오히려 더 늦는 경우도 있을 터이고, 지름길로 몇 초 먼저가려다가 예기치 못한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

개중에는 멍때리기의 기술 신봉자도 있는데, 하루 하루 초 단위, 분 단위로 바쁘게 움직이는 일상에 지쳐 차라리 아무런 생각없이 머릿 속을 쉬게 해주는 발상이다. 물론 이런 발상을 이해못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만큼 시간이란 것은 인간 사회에서 탐구되고 누구나가 관심을 갖는 주제이자 미지의 영역이다.

15초란 소재를 가지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낸 사카키바야시 메이...그의 네편의 연작소설을 보고 있으려니 상상력과 창의력이란 끝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15초라는 시간 안에 범인을 특정해야하고, 또 증거까지 남기고, 자신이 어머니의 사건과 관련이 없다는 확신을 일명 자신을 죽인 범인에게 알려줘야하다니... 15초의 주마등같은 시간에 과연 주인공은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인가? 연작소설 첫 단편부터 소설은 흡입력있게 독자를 밀어붙인다. 과연 내가 그런 사건에 휘말리고 15초라는 시간을 좌우지 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쓸 것인가? 아마 나는 그녀처럼 내가 왜 죽었는지, 누구때문에 죽었는지 알려고 했을까? 그리고 15초를 오로지 복수를 위해서,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오해를 해명하기 위해서 고분분투하면서 썼을까? 아.... 죽는 순간까지 너무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주인공도 사실 억울하니, 너무도 안쓰럽다.

두번째 소설 역시 흥미로웠다. 난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가 되든, 안되는 우선 보는 편인데 같이 사는 분은 안그렇다. 자신이 미처 못 들은 대화가 나오면 끊임없이 채널을 앞으로 돌린다. 일명 되감기...ㅎㅎ 난 사실 되감기를 왠만해서는 안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소설 속에서 처럼 15초 동안 흥미로운 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으로 사건이 종결되고 내가 모르는 결말로 매듭지어진다면... 아...정말이지 너무 궁금했을 듯하다. 방송국에 문의를 해서라도 재방송 시간을 알려고 했을 것이다.

시간에 있어서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절대 되돌릴 수 없다는 것이다. 시간은 직진만을 한다. 되감기가 안된다. 우리 역시 지금 되감기가 안되는 시간 위를 지나고 있다. 어제 내가 한 일을 아무리 후회한들 다시 되돌아 갈 수는 없는 것이다. 대신 내일은 가능성이 있다. 오늘을 어떻게, 지금을 어떻게 살 건지 선택하는 일이 바로 내일의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기에 말이다. 소설을 통해 다시금 시간의 중요성을 되새기게 되었다. 흥미로운 추리소설 이었지만 그 너머에는 시간에 대한 작가의 통찰력이 숨어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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